[성탄절] 박사들의 신앙(마태복음 2:9~12)
박사들의 신앙
마태복음 2:9~12
서론
성탄 사건에서 가장 이색적인 장면은 동방박사들의 출현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구주의 탄생을 목도했고, 유일하게 구세주에게 예물을 드린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이방인이면서 구주의 탄생을 목격했고 유일하게 선물들을 드릴 수 있었음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을까요?
1. 꾸준한 신앙입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아마 페르시아를 뜻할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서남아시아에 속해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 속해 있었습니다. 지금에야 교통수단이 발달해서 세계가 한 지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당시만 해도 도보로 다녀야 했기에 그곳은 상당히 먼길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 먼길을 꾸준히 걸어온 것입니다.
1) 신앙은 꾸준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루 만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꾸준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단시간의 헌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꾸준한 신앙생활을 하기는 쉬운 게 아닙니다. 십 년 전이나 지금에나 꾸준한 사람들이 좋습니다. 열심을 낼 때에는 온 몸을 다 불사르는 것 같지만 열심이 식어지면 열심냈던 것만큼 빈 공간을 남겨주는 신앙은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가 그 자리를 찾았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들락날락하는 신앙은 진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2) 신앙은 험한 고비를 다 넘겨야 합니다.
그들이 구세주를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길은 참으로 험한 길입니다. 찬송가에도 나오듯이, 그야말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입니다.
그들은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물정은 모릅니다. 그리고 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들은 험한 길을 자원하고 나선 것입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널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맹수들의 공격에 두려움으로 떨어야 하는 날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길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이기에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3) 먼길을 오기 위해서는 내 감정을 죽여야합니다.
그리고 서로 협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마음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주님을 맞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배에 타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협조와 이해심이 없으면 우리들은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늘상 만나니까 만나는 횟수만큼 상처를 줄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들은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많아야 하며 서로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그들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신앙의 순수성. 그리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은 믿음.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주님을 만나고 돌아가기만 할뿐입니다. 그러니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라토너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마라토너는 사람들의 박수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냥 꾸준히 걸어가야 합니다.
2. 하늘을 보며 소망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에 살면서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메디아라는 종족입니다. 그러나 메디아가 페르시아에 멸망당했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 당국자들에 의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다른 직업은 갖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 정치적인 세력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왕국을 재건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언을 믿었습니다. 하늘에서 왕이 출현하다는 것입니다. 그 왕은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며 그러면 메디아도 독립을 할 것입니다.
1) 그들은 오직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늘 하늘을 쳐다보기에 그들은 순수하고 순결한 영혼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 속에 별이 보였습니다.
오늘 누구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일까요? 순수한 사람들의 눈에 보일 것입니다.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뇌성마비아들에게 더 아름다운 예수가 보이는 것일까요? 그들은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예수가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그들의 눈에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왜 일을 하며 왜 많은 것을 추구합니까? 육을 위한 것이요, 우리의 정신적 만족감을 위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육을 위해서는 많은 일을 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위한 준비는 없습니다.
이제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하늘의 것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들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일 것입니다.
2) 동방박사들은, 그렇다고 세상에서 완전히 떠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천문학만 아니라 의학, 자연과학의 전문가들입니다.
세상에서도 자신들의 일을 잘 감당하면서도 늘상 하늘에 눈을 두었고 하늘의 징조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차 오실 재림 주 예수를 맞이하는 이들도 역시 늘 하늘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늘 하늘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바라볼 수록 우리들은 더욱 신령해 질 것입니다.
바울은 하늘의 것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책임 있게 감당하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사모한다면서 자신의 책임을 소홀히 한다면 주님 오실 때 칭찬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면서도 늘 현실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3. 박사들은 돌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 헤롯에게 보고할 작정입니다. 헤롯은 자기도 경배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박사들은 그 여우같은 헤롯의 마음을 알 까닭이 없습니다.
그들은 박사들입니다. 인격이 고상한 자들입니다. 정치가가 아니었기에 정치가들 속에 숨겨진 그 음흉한 궤계를 알 길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헤롯에게 돌아가 구주 탄생의 소식을 전해줄 참입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12절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
그들은 성령의 가르침을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먼 길입니다. 그 길은 더 힘듭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헤롯의 눈을 피해 달아나듯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박사들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고집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억지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만약 자신들의 생각대로 밀고 나갔더라면 예수는 어려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성과 지식을 포기할 때 헤롯의 궤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돌아가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이 힘듭니까? 지나치게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하는 이들이 힘들게 세상을 삽니다. 사람들이 돌아갈 때는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옛말에 "사내 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찔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나름대로 옳습니다. 그러나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용기는 앞으로 나가기만 한다고 용기가 아닙니다. 때때로 돌아가는 것, 후퇴하는 것, 그것은 더 큰 용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봅니다. 수많은 상처들. 그 상처의 대부분은 앞으로 밀고 나갔기에 된 것입니다. 그때 내가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후퇴했더라면 상처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좇아 돌아가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결론
이제 다시 성탄절을 맞습니다. 성숙된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동방박사들의 신앙에서 우리들은 교훈을 배웁시다.
-꾸준한 신앙을 배웁시다.
-하늘의 것을 소망합시다.
-돌아서 가는 법을 배웁시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에 주님과 함께 하는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