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어려운 시절, 격려하며 살기(사도행전 4:36, 37)

갈렙처럼 2025. 2. 9.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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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절, 격려하며 살기

사도행전 4:36, 37

 

서론

여러분은 성경인물 중에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세요? 신약만을 대상할 때 저는 안드레와 바나바를 좋아합니다. 안드레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남을 성공시키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2인자로 자족합니다. 축구로 말하면 어시스트(Assist)입니다. 어시스트는 골을 넣기에 알맞은 위치에 있는 선수에게 볼을 패스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을 때 그 팀의 성공률이 높습니다. 교회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또 한 명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안드레와는 달리 뒤에서 밀어주기보다는 앞에서 끌어주며 격려해 주는 사람입니다. 격려는 용기나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주는 행위입니다. 위로가 단순히 그 사람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주는 소극적인 행위라면 격려는 그를 일으켜 세워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같이 움직이며 앞에서 끌어주며 뒤에서 박수를 쳐 주는 사람입니다.

 

지난 40년동안 늘빛교회 목회자로서 단순히 교회 사이즈를 키우려는 목회를 하지 않았음을 여러분은 증인이 되어줄 것입니다. 제 관심은 언제나 여러분입니다. 건물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운 교회! 이 모토에 제 목회관이 함축되어 있고 그 목회 방법이 ‘친정집 목회’입니다. 친정어머니는 기다려주고 이해해 주고 다독여주고 들어주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격려해 주는 멘토입니다. 그게 제 목회관이요 방법입니다. 그게 잘 되었는가, 효과를 거두었는가, 하는 점은 별개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개인심리학’의 창시자이며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과 함께 ‘현대 심리학의 3대 거장’이라 합니다. 한국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는 학자입니다. 오히려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일본의 1인자 기시미 이치로와 작가 고가 후미타케가 ‘미움 받을 용기’라는 설명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습니다.

아들러 심리학은, 모든 인간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기본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이 열등감을 어떻게,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따라 그의 행복, 업적, 영향력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인간 내면에는 열등감들이 내재해 있습니다.

서울대학생은 서울대학생에게서 열등감이 있고 의사는 의사에게서, 목사는 목사에게서 열등감이 있습니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열등감이 있습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위너요 성공자이지만 자기만의 열등감이 숨겨 있습니다.

 

열등감(劣等感)이란, 남에 비하여 자기는 뒤떨어졌다거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입니다. 장애로 인한 신체적 열등감, 학교성적이 나쁘거나 용모가 예쁘지 못함에서 오는 정신적 열등감, 학력, 신분 차별에 의해 생기는 사회적 요소의 열등감이 있습니다. 별 다른 원인 없이도 열등감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우울증의 경우도 많습니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며 무의식 속에서 자기를 부정합니다. 그러다보니 불안 심리를 동반해서 스스로를 해칩니다. 이게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하고 열등감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믿음생활, 교회생활에서 엉뚱하게 분출됩니다.

 

지난번에 ‘옥토(沃土) 만들기’ 설교를 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오래고 좋다 해도 내 마음에 감정이 굳어버린 길가 마음, 돌로 눌린 돌짝밭, 가시로 채워진 가시밭이 있으면 옥토가 될 수 없습니다. 이걸 치유하지 않으면 박토(薄土)가 되고, 쓸모없는 사막이 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있는 나는 성장하지 못해 ‘성인아이’가 되어 아파하고 남몰래 울고 외로워합니다. 그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니까 남들에 대한 비판과 공격으로 상처를 주게되는 것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이 곧잘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지 행복한 자존감으로 차 있으면 여간한 소리에 상처 받지 않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잘 넘어가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교회는 바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런 옥토신자들을 만들어 내는 학교입니다. 옥토신자의 특징이 격려입니다.

 

레이건이 대통령 시절, 프랜시스 그린이라는 83세 노파는 정부 보조금을 받고 살았지만 매월 1불씩 공화당을 위해 후원금을 냈습니다. 어느 날 백악관에서 모급파티를 위한 초청장이 왔습니다. 할머니는 내용을 모르고 그냥 갔는데 백악관 로비에서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했습니다.

 

“명단에 없다. 기부금을 안 냈다?”

“무슨 말이냐? 나는 매월 1불씩 낸다!”

1불이면 1200원 정도입니다. 그걸 냈다고 매월 후원금을 냈다는 것입니다. 옥신각신하는데 비서가 지나가다 듣고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안내했습니다. 놀랍게도 레이건은 40분을 독대했습니다. 기라성 같은 재벌들이 와 있는 데 대통령이 나오지 않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40분 후, 대통령이 웃으며 나오자 비서실장이, “사람들이 기다리는 데 1불짜리 후원자를 어찌 40분이나 격려하는가?” 볼멘소리로 말하자 레이건 대통령이 정색하며 말합니다.

“내가 노인에게 격려 하다니? 아니오! 내가 격려를 받았소. 선거를 눈앞에 두고 나를 향해서 쇼를 한다느니 배우나 하라느니 별소리 다하는데 이 할머니의 순수한 사랑을 듣고 나니 신바람이 났소. 나는 선거에서 이길 것이오!”

 

레이건은 배우출신이고 성공한 배우도 아닙니다. 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대통령이 되었을 때 모두 놀렸습니다. 그러나 2001년 2월 CNN과 갤럽은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여론조사에서 레이건이 1위를 차지했고 케네디와 링컨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레이건이 재직했던 8년은 위기가 꼬리를 물었던 격동기입니다. 이 기간 레이건은 ‘레이거노믹스’로 미국과 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든 위인 하나가 무명 시골노파요, 1불짜리 격려였습니다.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일국의 대통령도 위로가 필요하다면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 누구라 있겠습니까? 그 격려는 꼭 큰 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그 위로는 1불의 사랑이면 됩니다. 아주 하찮은 것에서 사람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런 사람이 초대교회의 중심을 이루었던 지도자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격려에 뛰어난 사람입니다. 바나바의 원 이름은 요셉입니다.

 

36절, 이름은 요셉이라…. 그런 그를 사도들이 바나바로 개명을 해주었습니다.

36절,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격려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기에 사도들이 그에 합당한 이름으로 그의 공을 기린 것입니다.

 

바나바는 누구를 위로해 주었습니까? 사도들을 격려했습니다. 사도들은 위로를 해주는 사람, 남을 격려해 주는 사람이지 위로를 받거나 격려를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초대교회가 시작되던 때는 초라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지위도 없었고 건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요주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런 때 요셉이라는 사람이 사도들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밭을 팔아 교회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 일은 사도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인정해 주는 것도 감사한 데 재산을 가져왔습니다.

 

사도들은 바나바의 믿음 앞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기들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은 주님을 좇을 때 빈손으로 좇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사도들은 너무도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름을 ‘위로자’ ‘권면자’라는 뜻의 ‘바나바’로 명명해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을 위로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위로를 받기 원했습니다. 도움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거꾸로 사도들에게 힘이 되었고 사도들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위로자였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격려했습니다. 바나바가 초대교회의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그는 큰 교사도, 행정가도 아닙니다. 권능을 행사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평범한 목회자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명성은 초대교회에 점점 높아갔습니다. 그는 위로에 능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바나바 때문에 교회를 찾아왔고 부흥된 것입니다.

 

그때 초대교회에 미묘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울이 개종한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를 이단이라며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처형당할 때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개종하자 그의 개종이 음모일 것이라 의혹의 눈길을 보였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이겠습니까? 이런 때 누가 보증을 서 준다면? 그러나 그가 강성인물이고 유대교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에 누구도 그의 진실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잘못 편을 들다가는 같이 망신당합니다.

이때 바나바가 나섰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사울을 소개했고 보증했습니다(행9:26-30).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이 사울의 개종을 인정했습니다.

 

바나바의 신뢰와 격려가 사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격려를 받은 사울은 믿음생활 잘하고 초대교회의 거목으로 성장하고 13권의 성경을 집필합니다. 바나바의 격려가 없었다면 사울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을 것이며 초대교회는 큰 손실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큰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말 한마디를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믿어주는 그 한 마디가 어떤 도움보다도 큰 격려가 됩니다.

제가 지난 36년 간 목회하면서 가장 큰 힘은 “목사님, 요즘 힘드시지요.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하 그 한마디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삭개오, 향유를 부은 여인,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자… 이들을 격려했습니다. 남을 인정하고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잘 해준다는 것은 큰 격려입니다.

설교하고 나면 반응에 신경이 곤두섭니다. 이런 때의 말 한마디 “오늘의 설교는 저를 위한 것이었어요.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큰 격려가 됩니다.

 

말 한마디는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줄이 됩니다. 격려 한 마디로 걱정을 잃어버립니다. 때로는 말 한마디로 사람을 크게 낙심케 합니다. 우리는 남을 인정해주는 말을 하며 삽시다. 커트라인을 낮추면 격려의 말이 나옵니다.

 

바나바는 여러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바나바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의 사역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역입니다. 가는 곳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 13:43)고 권면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 시험 당한 사람들, 자기의 욕심에 끌리어 사욕을 좇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그의 권면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성전 중심의 레위지파 출신이기에 그의 위로는 더욱 무게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위로의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한쪽 강도를 위로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격려자입니다. 우리는 격려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격려 받기 보다는 격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위로에 목표를 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되어 제가 위로를 받고 삽니다. 교인들이 보여주는 그 깊은 사랑 앞에 저는 많은 위로를 받으며 인생의 크고 작은 산들을 넘어왔습니다. 남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결론

미국 유명 연예인 중에 지미 듀란테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참전 용사들을 위한 위로 쇼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너무 바빠 시간을 낼 수 없다 거절했는데 하도 사정하기에 짤막한 원맨쇼만 약속했습니다. 막상 그 날에 10분, 20분, 30분을 했습니다.

듀란테가 인사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쇼 기획자가 물었습니다.

“어쩐 일입니까? 나는 당신이 몇 분만 설 줄 알았는데… ”

“나도 그럴 계획이었소, 그러나 결코 그럴 수가 없었소. 저기를 보시오”

기획자는 무대 틈 사이로 관객석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대 맨 앞에 참전 용사가 앉아있는 데 둘 다 전쟁에서 한쪽 손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팔을, 한 사람은 왼팔을 잃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마주쳐가며 지금도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듀란테에게 격려가 되고 마주자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또한 모두에게 격려가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갑자기 부흥된 교회입니다. 베드로의 불같은 설교, 사도들의 능력… 이런 것들로만 부흥된 것은 아닙니다.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중심이 된 교회는 위로와 격려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회에는 율법만 있었고 판단과 시시비비와 지적질만 있었습니다. 여기에 질려있던 사람들이 따듯한 불을 찾아오듯이 위로가 교회에 있어 불나방처럼 모여들고 찾아왔다가 십자가의 능력 앞에 죄사함의 은혜를 받고 제대로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모두 남들이 위로하며 사니 초대교회가 그 수를 더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 부흥! 간단합니다. 교회가 서로 위로의 체제, 격려 분위기로 가면 됩니다. 남들이 하는 일에 손뼉을 쳐주고 칭찬해 주면 됩니다. 이게 없어 우리가 신자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 격려의 하나님입니다.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능히 위로해 주시는 위로의 하나님이 되십니다(고후1:4). 우리는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보혜사’라 합니다. 보혜사라는 뜻은 ‘위로자’ ‘상담자’ ‘격려자’입니다. 성령은 격려하시는 분입니다. 성령 충만은 위로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위로라는 것은 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고, 박수 한번 열심히 쳐주고, 설교를 경청하는 그 눈길, 진지함. 그것은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위로와 용서와 사랑과 격려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자기의 똑똑함을 드러내 위한 곳이 아닙니다.

요즈음처럼 어려운 시절, 서로 격려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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