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강단은 은혜의 지성소이다!(마가복음 9:2~8)

갈렙처럼 2025. 2. 1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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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모형도

강단은 은혜의 지성소이다!

마가복음 9장 2~8절

 

서론

이번에 우리교회가 강단을 전면 교체했습니다. 강단이 너무 좋지 않아요? 그렇잖아도 처음 교회 오시는 분들이 예배당이 답답하다, 새마을스럽다, 하는데 참 잘 되었습니다. 이만한 분위기이면 결혼식은 못해도 팔순잔치⋯ 등은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좋습니다.

 

우리가 강단에 애착을 느끼고 기대감을 갖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은혜의 기관이고 그 중에서도 강단은 말씀의 은혜가 흘러나오는 샘의 원천이자 일종의 지성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해도 내 강단, 우리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영적 가뭄이 옵니다! 강단에서 풍성한 말씀이 흘러나오고 내 마음의 저수지에 맑은 말씀으로 저장하고 나눠주어야 심령은 물댄 동산이 됩니다. 그러면 참 행복해요~

믿음생활, 교회의 사역은 은혜와 함께 갑니다. 은혜를 계속 공급 받고 계속 유지하며 은혜를 따라 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열정이 식어져 버리면 종교적 유교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전의 강단도 은혜를 많이 받은 고마운 강단인데 새로 교체된 강단을 통해 더 큰 은혜의 체험들을 하시고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교회생활을 하다 소위 시험에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험과 상처를 붙들고 있으면 그게 영혼의 고름이 됩니다. 빨리 짜내야 합니다. 그냥 두면 이웃들에게 변집니다. 부부간에 자식들에게로 구역원에게로... 그러면 항상 불평하고 불만하고... 궁시렁거립니다. 은혜가 사라진 그리스도인, 가장 다루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생기게 되면 교회는 질이 낮은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보니 베드로도 시험에 들었습니다. 뜻밖입니다. 베드로는 굉장히 다혈질입니다. 남에게 상처는 주고 남을 시험 들게는 할지언정 자기가 시험에 들어 상처를 받을 타입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혈질인 분들이 이외로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들면 모든 일을 놓아버리기도 합니다.\

 

2절, 엿새 후에⋯.

 

1주일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사건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100점이다!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칭찬을 받다보니 으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시자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대번에,

 

8:33,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의역하면 “사탄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뒤로 꺼져!”하신 겁니다.

이런 창피, 이런 수모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 6일 동안 베드로는 어떤 모습이겠어요? 풀이 죽었어요! 저리 꺼져~ 했으니 제자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말석에서 슬슬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 성격과 안 어울려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도 은혜가 떨어지니 들어오지 않습니다.

 

너무 섭하지요! 말에 실수를 했어도 사탄이 뭐예요? 그것도 제자들 앞에서⋯ 제자들은 모두 베드로보다 나이가 어린 아우들 아닙니까? 그런 아우들 앞에서, “저리 꺼져!⋯” 화도 나고 창피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우리말로 시험이 든 겁니다. 고상한 말로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앞장섰던 사람이 뒤로 빠져서 딴지나 걸고 궁시렁거려야 하나요? 아니면 선생님을 떠나야 하나요? 제자그룹을 떠나도 유능한 어부이기에 먹고 살만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은혜의 맛을 알고 은혜의 물을 먹은 사람입니다. 벳새다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떡을 얻어먹고 배가 부르자 모두 떠납니다. 허탈하신 예수님,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베드로가 가로되,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요6:68)

베드로도 예수님이 영생이라는 은혜의 맛을 알고 있기에 시험 들었다고 떠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열정이 식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엿새 동안 마음을 추스르려 했지만 회복이 안 됩니다. 엿새 동안 은혜 맛은 어디로 가고 죽을 맛입니다. 앞장서던 사람이 꼴찌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에 찹니까?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힘들어요!

 

그러던 베드로가 빠른 시간 안에, 엿새 후에 은혜를 회복합니다. 사단에게 시험에 들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베드로의 강점입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은혜를 회복했나요?

1. 최고의 은혜의 장소로 나갔습니다.

2절, 높은 산에⋯. 학자들은, 헬몬산으로 추정합니다. 구약에서는 시온산이라 합니다(신4:48).갈릴리호수 북방 안티레바논산맥에 위치하며 해발 약2,850m, 항상 눈이 덮여있는 만년설봉입니다. 만년설 눈이 녹으면서 요단강 통해 이스라엘전역에 물을 공급해주니(시133:3) 은혜의 산입니다. 이런 은혜의 산으로 예수님께서 데리고 가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특별하게 데리고 올라갑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엄청 은혜를 받았습니다.

 

높은산에는 신비함이 있고 경외심이 우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실 때는 평지보다 산이 많았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을 만났고 호렙산에서 모세를 불렀고 시내산에서는 율법을 수여하셨습니다. 엘리야에게는 갈멜산, 모세가 죽을 때도 느보산입니다.

 

그래서 족장들은 대체적으로 해발 800m 선에서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이 800m입니다. 대관령이 800m입니다. 이게 족장로(路)입니다. 그 이하는 여간해서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폴리스라인(police line)입니다. 폴리스라인은 최소한의 질서유지를 위해 사건 현장이나 집회 장소에 설치되는 경찰 저지선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을 가리켜 산의 백성이라 합니다.

 

베드로는 이런 높은 산에 올랐다가 은혜를 받습니다. 높은 산에 오르니 생각이 정리되고 세상만사가 아주 하찮고 사사로운 일입니다. 그 일을 갖고 시험에 들었다고 목숨을 걸 일이 아닙니다. 사방이 고용하니까 집중력이 생기고 산속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었다고 생각하면 내려가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합니다. 순례의 길을 뚜벅뚜벅 걸으며 묵상하고 자기를 성찰하며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으로 점점 깊숙히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혼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내려가면 시험에 들었다가 아예 실족합니다. 그러니 시험에 들었다 하면 더 바짝 강단 앞으로 나오시고 하나님의 깊은 말씀 속으로 기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을 통해 더 좋은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최고의 영성가를 만났습니다.

4절,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모세와 엘리야,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의 아버지나 같은 분이고 영웅 중의 영웅입니다. 두 사람도 시험에 들려면 얼마든지 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40여년 죽도록 일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코앞에 가나안을 두고⋯ 일종의 토사구팽을 당한 셈입니다.

 

엘리야. 세상에 보내서 오래 살아보지도 못하고 잠깐 쓰시고 승천하게 하셨습니다. 이세벨에게 그 모욕을 당한채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궁시렁거릴려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모세, 죽도록 일만 시키고 제대로 보상해 주지 않았다는 거지요! 엘리야, 불꽃처럼 일어나 불꽃처럼 잠간 반짝하고 생명을 거두어 버리셨다는 거예요! 얼마든지 시험에 들 상황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시험에 들었나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역을 내려놓았습니다.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1500년 후에⋯ 성지(聖地)에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성자와 머리를 맞대게 합니다. 그동안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을까요?

 

누가복음은 두 사람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다합니다(눅 9:31). 모세는 구약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선지자와 예언의 대표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시야를 예언했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입니다(말 4:5). 엘리야는 산채로 승천하고(왕하 2:11), 모세는 특이한 방식으로 죽어 그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신 34:6).

 

두 영적 거성(巨聖)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그들 사역은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두 영적 거인, 오직 예수님의 구속사역, 예수님의 영광만을 바라봅니다. 지난날에 섭섭함을 토로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바라보면서 그냥 기뻐하고 열심을 냅니다.

 

베드로가 그걸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섭섭함으로 꽁하지 않고 충만한 것을 볼 때 베드로는 자기가 얼마나 시시하고 쩨쩨한 인간이었음을 자각합니다.

 

왜 시험에 들었나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실 일을 말씀하실 때에 그리하지 말라! 고 윽박질렀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서 말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베드로 자신의 영광과 입지 때문입니다. 대단한 영적 거성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차분히 그 일을 의논하고 영광을 올리고 있는데 자기는 자기 입지 생각밖에 못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책망을 받았다고 삐지고 시험에 들어 있으니 얼마나 사내답지 못한 처신입니까?

 

베드로는 회개합니다. 회개가 나오니 저절로 은혜가 회복되고 훌륭한 사도가 됩니다.

3. 최고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2, 3절,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엿새 전만 해도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습니다. 지금 눈앞에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구약의 예언을 참고한다면 예수님은 흠모할만한 것이 없다 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함께 했던 선생님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했습니다. 고백과 체험은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구세주로 고백은 했지만 이렇게 대단한 존재임을 몰랐습니다. 너무 눈부시게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어떻게 저런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한 마디 자랑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나요? 지난 2년 몇 개월 동안을 얼마나 많이 배고프고 모욕당하고 지치고⋯ 그랬음에도 속에 있는 저렇게 아름다운 신비함과 눈부심을 감추고 살 수 있었을까요?

 

저렇게 찬란한 하나님의 독생자가 어떻게 인간의 태속에 열 달을 갇혀 살았을까요? 그 엄청난 겸손, 대단한 인내, 낮아지심⋯ 이런 예수님을 생각하고 천사 같은 모습을 목격하니, 내가 받은 모욕, 책망, 창피함⋯ 그게 무슨 시험입니까? 시험거리도 못됩니다. 그런 생각에 변형된 예수님을 보면서 베드로는⋯ 죄송해요 선생님, 죄송해요⋯ 눈물범벅으로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4. 최고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7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으니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음성만 들어도 은혜였었는데 그만 시험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목소리도 싫고 말씀도 안 들리고⋯ 섭섭하고 또 섭섭하고⋯ 선생님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그런 마음으로 은혜이고 사명이고 더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예수님께서 모욕과 자존심이 상할 일들이 많았음에도 시험에 들거나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견디고 상처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잠시 책망을 받고 창피를 당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모두 베드로를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그와 함께 해주시며 신뢰해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위한 사랑을 모르고 말 한 마디에 시험에 들다니... 그것도 자신이 잘못해놓고... 그런 자신을 내치지 않고 높은 산 부흥회를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니 베드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을 것입니다.

 

베드로. 그렇게도 믿었고 사랑했고 그 분의 한 마디에 기쁨도 슬픔도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책망은 너무 지나쳤습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상처를 받았다며 토라져 버릴 책망입니다. 시험에 들고 맏형으로서 훼방꾼이 될 수도 있는 베드로, 그 산에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든 시험의 요소를 다 털어냅니다.

 

그 이후, 베드로 사역은 더 빛나고 명실상부 제자 중의 리더, 최고의 사도가 됩니다. 헬몬산은 예수님만 아니라 베드로조차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를 쓰면서 이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부릅니다.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1:18)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상처를 극복하고 시험에서 벗어난 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걸 아셨습니다. 베드로의 진실을 알았기에 시험에 들어있는 베드로를 특별히 산으로 데리고 올라갑니다. 베드로가 부담될까봐 야고보 요한을 동행시켰던 것 같아요! 베드로가 노상 시험에 드는 사람이었다면 놔두었을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는 얼마든지 시험에서 일어날 사람이기에 제자들 앞에서 책망했고 그가 시험에 들자 변화산에서 그를 깨우칩니다. 그는 깨우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시험에서 충분히 일어날 사람이니까요!

결론

이번에 유충진 집사님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집사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처음 교회 나와서 설교의 은혜를 받은 이야기입니다. 설교 중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이 “말씀을 맺겠습니다!” 설교가 너무 힘들었는데 그 말씀만 들으면 눈이 번쩍! 은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감사한 일이지요! 오래 다니는 지금에도, 설교 때마다 “말씀을 맺습니다” 수없이 듣고서도 은혜를 못 받는데 초신자가 그런 말씀에라도 은혜를 받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래요! 교회는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은혜는 어디에서 받습니까?

 

-베드로는 높은산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대단한 영성가들에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후, 베드로에게 그 높은 산은 은혜의 산! 거룩한 산이 됩니다. 시험과 상처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그 상처가 고름이 아니라 영적인 단단한 근육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교회생활 하다보면 시험에 들 수도 있고 상처가 있을 수 있지요? 시험을 두려워하고 상처를 두려워한다면 공동묘지를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상처도 시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도 쉽게 시험을 받는 허약한 체질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험에 들었다가도 곧 은혜의 장소로 나가십시오.

 

우리가 은혜를 받을 곳이 어디입니까? 늘빛교인이기에 늘빛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늘빛교회 강단에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단을 사랑합니다. 강단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더 아름다워진 강단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말씀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시험 들 일도 말씀의 힘으로 물리치는 우리 늘빛가족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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