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 설교

[새해 설교]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민수기 6:22~27)

갈렙처럼 2025. 2. 2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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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주시는 복

민수기 6:22~27

 

 

청소년 여러분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느 해의 통계를 보니,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아주 낮게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가난한 빈민국가 백성들의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빈약한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높고 살만한 국민들이 오히려 불쾌지수가 많다는 사실은 행복의 조건이 외부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소년 여러분들은 행복합니까?

 

모세는 세 가지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복입니다(24절).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축복! 장수하고 부자가 되고 땅을 많이 차지하고… 제사장들은 그런 축복을 전해주어야 백성들이 좋아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전해야 할 축복은 물질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는 여호와의 복.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신다는 임마누엘의 복은 가장 우선적이어야 될 복입니다.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면서 물질적인 복, 세상적 복은 노력과 땀을 통해 얻을 것이니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랍비 시몬 벤 요하이의 제자 중 하나가 외국에 나가서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질투했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을 데리고 마을 골짜기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한 후 외쳤습니다.

“골짜기여 금화로 가득 차 흘러라!”

 

골짜기는 갑자기 금화로 눈이 부시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돈이 탐나는 사람은 갖고 가거라. 그러나 지금 이 돈을 갖고 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지켜주지 않으실 거야!”

제자들은 아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편 127편의 말씀을 암송하며 살아온 백성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워주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돈을 벌어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런 생각이 유대인들을 세계 1등 국민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복은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금년에도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바로 그 복입니다.

2. 은혜의 복입니다(25절).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택한 선민입니다. 택한 것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고난을 더 많이 당했습니다. 선민 때문에 음식에도, 안식일에도, 복장에도, 사교에도, 결혼생활에도 제재가 많았고 애로가 많았습니다. 선민 자체는 행복의 조건이 못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련을 당해도 시련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기에 당하는 시련으로 알고 감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능욕 당했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랬더니 예수의 이름으로 매맞고 하나님께서 예수의 제자로 인정하셔서 형벌에 참여시키는구나, 생각하며 기뻤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어처구니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수학의 방정식, 과학의 논리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밝혀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에 보이지 않으면 안 믿지요.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 불신자들이 정상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어져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용서를 수용하고 죄 사함의 은총으로 기쁘게 살아갑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 말미에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지어다.”

 

은혜가 없으면 신앙생활이 엉망이 됩니다. 그때부터는 종교가 됩니다. 기독교신앙의 종교화, 이거 경계해야 합니다. 은혜 없는 크리스천처럼 안 좋은 게 없어요. 그들이 곧 바리새인이고 율법주의자가 아니겠습니까? 은혜가 자라나는 한 해 되기를 바랍니다.

3. 평강의 복입니다(26절).

한 나라의 경제력은 비행기 수와 함께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비행기가 2, 3분만에 하나씩 뜹니다. 인간의 근심도 비행기처럼 수없이 뜨고 날아옵니다. 근심이 하나 끝나면 또 다른 근심이 날아오고… 계속됩니다.

 

청소년 여러분들에게도 근심이 참 많지요?

“인간이 죽으면 그 육신은 벌레에게 먹히고 만다. 그러나 살아있다 하더라도 근심 걱정에게 먹히고 말 때가 많다”(탈무드).

 

예수 그리스도는 풍랑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풍랑 만났을 때 모두가 두려워 떨며 아우성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모습이요, 우리 크리스천들의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평안을 잃어버리는 것은 교인들 간의 라이벌 의식 때문입니다.

“라이벌”이란 말의 원래 어원은 라틴어 “rivales” 곧 `강가에 사는 주민'이란 말이었습니다. 같은 강가에 살면서 같은 강물을 마셨습니다. 이웃에 살면서 서로 도우며 고기를 잡는 사람들을 `라이벌'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어울려 살다가 시집, 장가갔습니다. 늘 상 만나서 웃고 떠들고 사는 사이니 서로 친밀하고 깊은 이해와 우정을 나누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긴장을 유발하는 일도 생기게됩니다. 이유는, 같은 강가에 살다보니 고기 잡는 일에 경쟁관계, 가뭄이 심할 때 논밭에 물을 댈 때 남자들끼리 마찰, 한 여자를 두고 경쟁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강가에 사는 사람'이란 좋은 관계가 경쟁관계 라이벌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한 교회 안에 오래 함께 있다 이런저런 일도 다 생겨요. 특히 교회 일 열심히 하다보면 마찰이 생기고 대립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것을 훌훌 풀어야 합니다. 같은 교회 강가에 사는 좋은 “리벌즈”가 되어야지 경쟁 대상의 "라이벌"이 되면 영혼이 망치게 됩니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졌다”(탈무드)고 하잖아요. 질투, 나쁜 라이벌은 심령을 썩게 합니다.

같은 강가에서 살아가다가 분통이 터질 때마다 김을 빼버려야 합니다.

 

인디언에게는 재미있는 풍습이 하나 있습니다. 화, 분노로 소리지르고 싶을 때에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가서 구멍을 파고 엎드려 소리를 지르고 실컷 욕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구멍을 흙으로 덮고 돌아옵니다.

 

청소년 여러분, 우리 청소년 부서가 누구나 자기의 분노를 소리지르고 묻어버릴 수 있는 구멍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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