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도 맛있다] 자족의 은혜(빌립보서 4:10-13)
자족의 은혜
빌립보서 4장 10-13절
서론
제가 어렸을 때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등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빌립보의 오늘 본문의 말씀은 누구나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말은 80년대의 경제성장과 맞물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기도원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요절처럼 외우던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말씀의 왜곡으로 한국교회를 오염시키기도 했습니다.
"할 수 있다!" 이게 잘못되면 신앙이 아니라 신념이 될 수가 있습니다. 모두들 신앙을 마술처럼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상당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는 "우리가 왜 이 지경이 되었나?"라는 공황 상태가 더 우리들을 낙담케 합니다.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되는 일이 없고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참으로 우울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해놓은 일도 없으면서.
바울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감옥 속에서 그가 기록한 성경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구절입니다. 그가 큰 일을 이루어 놓고 "내게 능력…" 라고 했다면 더 당당해 보이고 존경이 갑니다. 감옥에서 죄수의 신분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내게…" 라 하고 있으니 이것은 오기도 아니고 허풍을 떠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 그 문맥의 앞뒤를 잘 살펴보면 바울이야말로 절망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구나, 그는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본문의 말씀은 모든 것이 풍성하고 잘 나가던 시대에 적합한 말씀이라기보다는 지금처럼 우울한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바울은 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방인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덜컥 옥에 갇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바울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울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상황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그에게 능력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능력? 이해케 되는 능력.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곳으로 부르신 데에는 다른 섭리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처한 형편을 이해했습니다. 그러자 평안이 왔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힌 것이 조금도 우울하지 않았습니다. 한참 일하고 싶은 전도의 길이 비록 막혔으나 그는 감옥에서 편하게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이해할 수 없다 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남들의 행동에서 믿음을 떠나기도 합니다. 죄는 남이 짓고 타락은 내가 합니다.
나에게 여러 곤경이 닥칠 때 우리들은 묻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필이면 왜 나입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되기에 믿음은 떨어지고 삶은 시들어갑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가고 술이나 엉뚱한 방향으로 갈등을 해소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우리의 꼴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뿐입니다.
참으로 힘든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기도하십시오. 그냥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그릇된 가르침에 속지 말고, 이 상황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이해만 된다면 남편의 모든 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미국 보스톤에서 2,500명의 유대인 신자를 상대로 목회하고 있는 랍비 쿠시너는 평범한 성직자였습니다. 장례식을 집례 하며, 병원으로 이들을 방문하며, 이들의 이별의 아픔, 사업의 실패, 자녀들로 인한 불행을 위로하며 사역하는 평범한 성직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살 난 아들 아론이 희귀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병은 조로증(早老症)이었습니다. 1미터 이상 자라나지 못하고 처음부터 늙어 가는 병. 그때부터 쿠시너는 평범한 성직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호소했고 원망했고 아이를 살려내기 위해 성직자라는 체통을 벗어던집니다. 그러나 아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15년을 늙어가다가 죽습니다.
아이가 죽었을 때 쿠시너는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목회를 포기하려 합니다.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를 통하여 고통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이해시키셨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왜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까?>
이 책에서 쿠시너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론의 삶과 죽음이 있었기에 더 민감한 사람, 더 효과적인 목회자, 더 동정적인 카운슬러가 되었습니다. 만약 내 인생에 아론이 없었다면, 아론의 죽음이 없었다면 모든 정신적 성장과 깊이를 포기하고 그냥 세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내 아들 아론의 눈물과 고통을 통하여 많은 것을 얻어내었습니다. 내 아들 아론은 나의 정신적 스승이었습니다."
죽음은 끝입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 받을 길이 없는 게 죽음입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쿠시너는 더 많은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빌립보의 이 말씀은 죽을병에 걸려있는 사람을 붙들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살려낼 수 있다!" 류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아들의 죽음에서 새로운 의미를 깨달은 쿠시너와 같은 사람들이 "능력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구절입니다.
인간은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모든 것은 프로그램에 의해 작동되고 나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앞길을 전혀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낙심합니다. 그러나 이해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잘 이해하시는 능력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오고 시련이 있습니다.
지금은 국가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습니다.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포기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바울은 지금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약골(弱骨)인 그가 감옥살이를 하기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성지순례 시 바울이 갇혔던 로마의 옥에 들어가 본 일이 있습니다. 아주 지하입니다. 그곳에 갇혀있었습니다.
*로마에 얼마나 오려고 했나? 복음전할 기회가 차단당함.
*빌립보교회는 분란.
*제자 중 일부가 이탈.
*교회 안에 이단이 들어옴
이런 등등의 것들은 노(老) 사도를 감당하게 힘든 요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너무나도 괴로웠기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능력을 주었습니다. 어떤 능력? 옥문이 열리는 능력?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을 잘 감당하고 견디게 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사람들도 감당할 수 없는 그 어려운 환경을 잘 감당했습니다. 감옥 밖의 상황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전도의 일도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그의 속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나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으니까 이세벨의 핍박을 피해 달아나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7천명의 사람들은 이적의 힘은 없었으나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어려운 현실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견디는 것도 큰 능력입니다. 장례식에서 견디는 사람들을 보면 큰 능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회처럼 무거운 짐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별의별 일들이 벌어집니다. 아침에는 초상집에서 눈물 흘리고 점심에는 결혼식장에서 축하하고 저녁에는 병원에 심방을 가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넥타이를 갈아매는 것이 목회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인들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는 기도원 산길을 올라가다 고목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신세처럼 처량하게 느껴져 고목나무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목을 붙들고 울며 기도하다 말했습니다.
"나무야, 너는 목회도 하지 않으면서 어찌 속이 다 쇠하였느냐?"
목회 현장만 힘든 짐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다 어깨에 무거운 짐들을 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우리가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신앙은 우리들을 더 곤고하게 하고 뿌리 없는 신앙을 갖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신비적인 신앙에 물들게 됩니다. 이런 때에는 잘 감당케 해달라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견디는 능력을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날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이런 노래를 좋아합니다.
"주님 여 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견디는 것도 큰 힘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못 견딥니다. 못 견딤으로 아이들과 동반자살하고 집을 떠나고 인생을 포기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주님,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8-10)
바울의 강력한 삶은 예수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옥중에서 찬송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족하다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감옥의 상황이 상당히 불편했을 것입니다. 마음의 불평은 더 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면서 그는 현실을 이해하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감옥에 그를 넣었는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는 감옥 안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감옥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성경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성경은 힘이 있었고 가는 곳마다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복음은 상류층 사람들을 통하여 로마 전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밖에서 활동한 것보다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감옥에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면 살해당하거나 암살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이 활발히 진행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바울은 자족했습니다.
"나는 족하다!"
그것은 능력의 힘이었습니다. 예수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가시를 위해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족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여, 가시를 없애주소서!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능력이 아닙니다. 진정한 능력은 가시와 함께 견디며 자족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목표 삼아 믿음으로 밀어붙이려 했고 그것을 믿음이라 했습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족하다 하는 은혜는 어떤 것보다 큰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중국 동부의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대나무를 심고 기다렸습니다.
첫해에는 아무 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해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해에도, 네 번째 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다섯 해가 되었을 때, 수백 평방미터의 땅 밑에 대나무 부리가 빽빽이 퍼져있었으며 마침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대나무 싹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대나무들은 하루에 한 자가 넘게 자랐습니다. 불과 여섯 주만에 15미터 이상씩 커졌습니다. 농부는 그 대나무들을 팔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대나무는 `모소'라고 하는 데 싹을 내기 전에 사방 수십 미터씩 뻗어갑니다. 그래서 일단 싹을 내면 뿌리에서 보내주는 거대한 양의 자양분 덕분에 순식간에 대나무 숲을 이루게 됩니다. 5년이라는 기간은 말하자면 뿌리를 내리기 위한 준비기간인 셈입니다.(이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신앙은 대나무를 심고 하루아침에 "큰 나무가 될 줄 믿습니다!"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신념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써왔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대나무를 심어놓고
이해하는 것입니다.-대나무의 속성을.
기다리는 것입니다.-대나무의 싹이 올 때까지.
자족하는 것입니다.-1년의 무(無) 수확도 2년의 무(無) 수확도….
그럴 때 우리들은 엄청난 대나무 숲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풍성함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