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당신은 신사적인 크리스천입니까(사도행전 17:10~15)

갈렙처럼 2025. 3. 11. 21:08
반응형

사진/늘빛교회 성탄칸타타

당신은 신사적인 크리스천입니까

사도행전 17:10~15

 

서론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깡패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들을 죽이려 했기에 실라를 데리고 간신히 도망쳐서 베뢰아로 피신했습니다. 그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습니다. 지쳐있는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11절 “더 너그러운 사람들”, 즉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베다니의 세 남매가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참 좋은 일들을 했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바울에게도 아들 같은 디모데와 디도가 있었고 많은 동역자들, 여성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인생은 거친 가시밭을 걷는 고난의 행진이었지만 옆에, 앞에, 뒤에, 안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생활, 특히 교회생활은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믿음생활이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하나님 외에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장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기쁨과 보람을 누리고, 또한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사회생활 전반도 그렇습니다. 회사를 그만두는 분들, 교사직을 그만 두는 분들이 대부분 인간관계 때문에 정든 회사와 학생들을 떠납니다. 그러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축복을 늘 기도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인생의 고초를 당하고 상처를 받은 분들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 회복됩니다.

좋은 공기를 마시면 육체에 새 힘을 얻는 것처럼 좋은 사람-너그러운 사람을 만나면 영혼도 새 힘을 얻습니다.

경직되어 있는 사람, 불평하는 사람, 매사에 비판적인 사람과는 5분만 있어도 숨이 막힙니다. 내 몸에 있는 에너지를 다 뽑아가는 느낌입니다.

 

믿음이 있고 격려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열등감이 없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정신 건강에, 믿음생활에 큰 유익이 됩니다. 왜냐?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너그럽습니다. 매사에 이해를 하고 웃고 넘어갑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럽다는 말을 개역성경은 “더 신사적이다”라고 번역합니다.

'더 신사적'이라는 것은 비교급의 형태로서 '가문이 좋은', '출신이 좋은', '고귀한'.. 등의 의미입니다. “더 고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성품은 정신이나 외형적인 신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성품의 혈통을 뜻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선한 혈통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모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편견 없이 객관적 자세를 나타내 보였고 또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베뢰아 성도님들은 어떻게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요?

우리도 베뢰아사람들처럼 너그러운 사람, 신사적인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시선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좋은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신사입니다. 보는 것의 차이가 신사를 만들어 냅나다.

자주 화를 내는 사람들은 인내심의 문제, 성격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시선의 문제입니다.

자꾸 화가 나고 열 받을 것만을 쳐다봅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봐도 좋은 것은 넘어가고 열 받을 기사만 읽고 모아둡니다. 그러니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는가요? 보는 것이 화병이고 간직해 둔 것이화병거리인데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요즘 대한민국은 어느 때보다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같은 대한민국인데 어떻게 두 나라처럼 서로 대결하고 경멸하고 손가락질을 합니까?

자기들 쪽의 정보에만 시선을 두고 귀를 열고 자기들끼리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쪽 저쪽을 떠나서 SNS나 유튜브를 잘 가려내고 선택하는 바른 시선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주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합니다.

안디옥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사도행전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안디옥교회 신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각양각색의 개종자들이고 초보신자들이기에 안디옥교회도 미숙함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개종자들에 대한 유대교 신자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도 있었습니다.

 

22절,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1절, 듣기는 들었는데...

 

어떤 이들은 기뻐했고 어떤 이들은 2절처럼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은 소문에만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들은 소문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파송한 것이 아닙니다. 바나바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이방인 선교는 문이 열리기도 하고 문이 닫히기도 할 것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 신자들을 만나고 거기에서 보았습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미숙함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그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바나바는 역시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신사적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11:24, "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이는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실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않고 사람들만 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앞날에 희망을 거는 사람은 장점을 봅니다. 그렇지 않는 아버지는 아들의 단점만 봅니다. 그러니 늘 책망이나 합니다. 이런 아버지에게서 어떻게 건강한 인성이 생길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기가 보는 대로 가게 됩니다.

오른쪽을 보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갑니다.

믿음으로 보면 믿음으로 갑니다.

긍정을 보면 긍정으로 갑니다.

얼마나 너그럽고 얼마나 신사적인 사람이 되겠습니까?

 

성도님들! 신사적이고 싶은가요? 보는 눈들을 교정하세요! 바른 것을 보세요! 모두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게되고... 하나님의 측은지심을 갖게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너그럽고 신사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표현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갑니다.

11절,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이것이 참말이야? 이것이 정녕 율법이 말하던 그 내용이더냐?

베뢰아 사람들은 질문하고 대답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남을 공격하고자 질문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묻고 대답하고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모두 뚝!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하던 엄격한 율법주의자들 앞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에 대한 궁금증을 표현하고...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해답을 찾아낼 때마다 얼굴로 표현되는 기쁨들을 보고... 그런 것들을 사람들이 보고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2절,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표현하는 구원의 감격을 보면서 나도 저런 기쁨을 갖고 싶다, 나도 저리 행복하고 싶다... 그런 사람들이, 빈부를 가리지 않고 초대교회로 공동체로 들어오면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한국교회가 부흥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씨조선 5백년 유교의 영향권에 있었던 우리나라 남자들의 미덕은 자기표현을 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울어서는 안 됩니다. 비가와도 뛰어가면 안 됩니다. 감정 표현, 언어표현은 천박한 것으로 알고 식사 때도 말을 하면 책망을 듣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정은 깨어지고 남자가 은퇴 나이가 되면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럴 때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주 모였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경조사를 통해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얼굴에 성령충만한 모습들이 드러났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그 무뚝뚝했던 선비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변화를 입었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기쁜 것을 보니 기쁨이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표현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정적인 명사보다는 동적인 동사명사가 많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이런 시대를 한국교회가 이끌어 왔습니다. 좋은 것이니까, 기쁜 것이까, 은혜스러운 것이니까 세상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남자이건 여자이건 자기를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을 들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사에서 가장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표현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싫지도 좋지도 않는 무덤덤한 사람들은 아무리 실적을 내도 기피 대상입니다. 그래서 입사시험 면접을 볼 때는 인성을 중요시 여깁니다. 명랑한 사람, 사교적인 사람이 지금은 우대를 받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의 너그러움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따뜻하면 오지 말라고 해도 불을 쬐기 위해서 모여드는 원리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사적인 사람은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표현해야 합니다. 너그러운 사람들은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신사들이 됩니다.

좋은 것에는 무(無)반응하다가 나쁜 것만 보이면 표현하는 것은 신사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우울하게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표현하지 마세요. 행복해도 표현하지 말고 기분이 좋아도 표현하지 마세요. 나쁠 때만 표현하세요. 그러면 우울함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가 이런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보이면 마귀가 옮다구나, 너는 내 것이다! 하면서 달려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말씀을 사단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우울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울하다고 두려워하지말라! 행복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걱정마라! 굳세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해주마! 내가 너와 함께 해주겠다!"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풍성함을 위해 오셨지만 마귀는 우리의 기쁨을 뻬앗기 위해서 자꾸만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너그러운 사람,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좋은 것을 표현하세요. 좋은 느낌! 좋은 사랑! 그걸로 표현하세요.

믿음은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자꾸 입으로 시인하고 표현하세요. 성경도 소리를 내어 읽고 찬양도 소리를 내어 찬양하고 기도도 소리로 표현하세요!

그래야 보존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방향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신사적이라는 말은 그 사람들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방향성입니다.

신앙이란 현재의 위치가 아닙니다.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몸의 방향이 신사적이냐 아니냐를 판결합니다.

우리는 너무 위치에만 연연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괜찮았던 사울이나 의식적으로 경건을 추구했던 바리새인들에게서 신사의 모습을 보고 맙니다.

 

사울-위치로는 그 사람이 더 의인입니다. 제사문제, 아각 왕 처리문제. 이 모든 것이 자기 딴에는 민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윗-위치로는 오히려 사울보다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충신의 아내를 빼앗는, 그것도 치졸한 방법으로 충신을 죽인 못난 군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마음에 품으셨습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밧세바와의 불륜이 나단 선지자에게 지적 당했을 때 다윗은 이리 애통해 합니다.

 

시편 51편입니다.

4절,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9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다윗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백성들의 수를 조사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을 때 세 가지 선택 앞에 놓이게 됩니다(삼하 24장).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13절)

 

1번,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냐

2번.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냐

3번.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냐.

 

갓 선지자의 말에, 다윗은 이런 이유로 3번을 택합니다.

 

14절,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것이 죄인의 신분, 죄인의 위치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다윗의 심정이고 열심입니다. 사람들에게 약하게 맞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센 매를 맞고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영광을 덜 가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사됨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와 창기 중에서 주님은 누구에게 우호적인가요?

위치는 바리새인들이 훨씬 좋았습니다. 경건하고 의식적으로 선을 베풀고 구제와 자선을 베풀었으니까요.

세리들은 하자품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버렸고 종교가 버렸고 동족들이 버린 인간 쓰레기요 불량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았고 용서와 구원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했기에 너그러움이 있었고 너그러움으로 타인을 대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방향성!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인애를 닮아 인애의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의 용서를 닮아 용서룰 구하고 용서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오늘날의 베뢰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방향성이 바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짜 신사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결론

신사적인 것은 좋은 것이 먼저 나오는 사람입니다. 좋은 것이 앞서 나오면 그 사람은 신사적이고 나쁜 것이 나오면 신사적이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까 사람들도 신사적이었습니다(11절). 그들보다 베뢰아 사람들은 더 신사적이었던 것입니다. 매사에 신사적인 것이 더 먼저, 더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인 신앙생활을 합시다!

그러려면 어찌해야 하나요? 오늘의 말씀을 복습합니다.

 

- 눈의 시선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감정의 표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몸의 방향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없이 오래 있고 같이 있고 싶은 사람,

산소 같은 공기를 공급해 줄 수 있는 사람,

좋은 영향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들…

이런 신사들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리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멋진 신사 장로님들이 되십시오!

멋진 신사 권사님들이 되십시오!

멋진 신사 안수집사님들이 되십시오!

멋진 신사 집사님들이 되십시오!

멋진 신사 크리스천들이 되십시오!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