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도 맛있다] 두 개의 3장 16절(요한복음 3:16, 요일 3:16)
두 개의 3장 16절
요한복음 3:16, 요일 3:16
서론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밧모섬에 귀배(龜背)되어 18개월을 지내면서(BC 94~96년 사이)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밧모 섬에서 돌아온 후에는 에베소교회를 담임합니다. 스승의 남은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제자들은, 예수님처럼(요 15장 ~17장), 모세처럼(신 33장) 여호수아의 이별 강론(수 23장 24장)처럼 스승에게서 멋진 명(名) 가르침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노(老) 사도를 강단으로 모시고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사랑스런 교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노(老) 사도, 입을 열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신자들은 다음 가르침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사랑이 머금은 눈으로 신자들을 보기만 합니다. 기다리던 제자가 재차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요한이 다시 입을 엽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스승님, 다른 말씀도 좀 해 주십시오! 스승님은 유일한 사도님입니다. 3년을 수학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중에 우리가 평생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말씀을 남겨주십시오!”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사도 요한, 세 번째 남긴 말씀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제자들은 그제야 스승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스승의 가르침을 포기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전한 예수님 교훈의 엑기스는 “사랑하라”-“서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풍년시절에 살고 있습니다. 연속극에서 사랑이 없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연극에서, 소설에서도 사랑이라는 주제가 빠진다면 볼만한 것들이 없습니다. 유치원생도 잠옷 바람으로 화장하는 제 엄마를 보고 "섹시하네요!"라고 말할 만큼 사랑은 우리시대에 흥미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사랑에 목마르고 사랑을 갈망합니다. 홍수의 흙탕물 속에서 정작 마실 생수는 모자라는 것처럼 사랑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정작 사랑의 결핍을 느낍니다.
이런 사랑풍년 속의 사랑결핍이라는 역설의 시대에 두 성경의 3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진정한 사랑은 무엇이고, 그 사랑을 키우며 누리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1. 하나님 사랑-하나님에게서 나에게로 흘러오는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십계명의 첫 부분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원리, 사랑의 원리를 말합니다.
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경배의 대상,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무엇도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놓지 말라! 남편이 내게 대한 요구와 같은 것입니다.
2계명, “내 모양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경배의 방법, 사랑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신데 물질로 형상화하면 왜곡입니다. 그것은 나를 뿔달린 도깨비 추남으로 그려놓고 “나”라고 소개하면 기분이 나쁜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경배의 정신, 사랑의 정신입니다. 제대로 경배한다면 그 이름을 높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이름을 아낍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우습게 되고 놀림의 대상이 된다면 죄스럽고… 분하게 여겨야 경배입니다.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경배의 시간, 사랑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상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 원리요 사랑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십계명을 요약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35~38절)
첫째 되는 계명은 우선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우상에 중독(中毒)되고 경배했습니다. 호세아를 비롯한 선지자들은, 영적 간통, 종교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일이라 비판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바람난 여인들처럼 스스로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거짓된 사랑에 목말라하고 잘못된 사랑에 자신들의 일생이 망가지는 것을 알면서도 불나비처럼 우상사랑에 달려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본남편의 그 애끓은 사랑을 맛보지 못했기에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사랑을 몰랐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나그네백성들이었습니다. "히브리"라는 뜻이 강 저쪽에서 건너온 민족, 떠돌이, 나그네, 유랑민족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선택, 계약 성취-땅, 대민족, 메시아혈통, 율법수혜, 보관, 아브라함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예례미야는 버림받은 아기를 데려다 씻기고 키우고 아름답게 성장시켜 결혼시켜 주었더니 바람을 피운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애끓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요 3:16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신약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려면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도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자기 식대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몰랐던 것입니다.
요한은 언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사랑을 알았나요?
예수님 사후(死後),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요한은 제대로 사랑을 이해합니다. 아! 사랑은 주는 것보다 먼저 받아야 하는 것이구나… 사랑은 받은 것만큼 밖에 할 수 없는 것이구나… 그래서 쓴 성경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사랑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사랑했는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어떻게 사랑했는가? 누가 누구를 사랑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다룬 성경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요약한 엑기스가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가룟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하고 포기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이처럼 사랑하사”의 사랑의 참의미를 보았습니다. 세 번씩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를 찾아오신 스승 앞에서 하나님의 “이처럼 사랑하사”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모두 도망 간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사랑을 복원하시는 스승의 관대함 앞에서 하나님의 “이처럼 사랑하사”의 사랑의 진수를 보았습니다.
사랑 받을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 사랑해주는 것! 내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 찾아오는 사람들만을 사랑한 것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를 구하지 않음에도 사랑해주는 것! 원수 된 상태에서조차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을 찾아가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요한은 찾아오는 사랑으로 구원받고 만들어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역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런 “받는” 사랑이 있었기에, 부어지는 사랑이 있었기에 스승의 어머니 마리아를 평생 모실 수 있었고 밧모 섬의 유배지에서 18개월을 견딜 수 있었고, 이런 사랑을 알고 나니 사랑의 복음 요한복음을 비롯해서 요한1서 2서 3서 요한계시록… 다섯 권의 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주는 사랑 이전에 받는 사랑, 하는 사랑 이전에 받아들이는 사랑… 이런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 앞에서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는” 사랑에 익숙한 것이 아닙니까?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허물된 우리들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를 기다리고 받아주셨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독생자 희생이라는 자기희생을 통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며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눈물나는 이 사랑을 알아야 제대로 된 하나님 사랑이 나오고 우리 저수지에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했을 때 이 사랑을 나눠줄 대상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요한의 사랑의 방정식(式)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는 받는 사랑이 너무 작아서… 하나님에게서 공급받는 사랑이 너무 작아서 껄끄러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받는 사랑의 저수지가 너무 작기에 사랑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좋아하는 몇 사람, 내 마음에 드는 몇 사람, 내 조건에 맞는 몇 사람만을 좋아하기에 교회도 세상도 사랑의 기갈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위대한 사랑의 근원, 부어주시는 사랑을 받았을 때 비로소 이웃을 향해 사랑의 저수지문을 열수 있습니다.
2. 이웃 사랑-나에게서 이웃에게로 흘러가는 사랑입니다.
십계명의 둘째 부분 6~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원리, 섬김의 방법을 말합니다.
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이웃의 육체를 보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이웃의 정조를 보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8계명,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이웃의 재산을 보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9계명,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이웃의 명예를 보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10계명,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이웃의 가정을 보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배계명과 이웃사랑 계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5계명 부모공경입니다. 1~4계명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효도요, 6~10계명은 땅의 부모를 효도하는 방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웃사랑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 주님도 계명을 요약하면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두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40절)-중심 가르침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사랑을 가두는 웅덩이가 아니라 이웃으로 사랑을 흘러 보냅니다.
하나님 사랑의 속성은 하나님 중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나눔과 베풂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면 저절로 사랑의 대상을 찾아 마음 문이 열리게 됩니다. 이게 하나님사랑과 우상사랑의 차이점입니다. 우상들은 자기에게 중독시킵니다. 하나님 사랑은 그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값지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성장시키고 인격을 성장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발견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함수(函數) 관계입니다.
요한일서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사랑을 알았으니 이제는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랑 중에 가장 고상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희생입니다. 자기포기요, 자기를 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이타성(利他性)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오는 이타적인 사랑만이 사랑을 영원하게 만들고 사랑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갑니다.
바울은 사랑의 속성 15개를 말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5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7절). 어떻게 참을 수 있나요? 어떻게 견딜 수 있나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니까 참는 일을… 견디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는 미혼의 아가씨가 한센병 마을에서 평생 그들의 고름을 짜주며 봉사하는 것을 보고 누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억만금을 주어도 못합니다.”
그러자 아가씨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도 억만금을 받아도 못해요. 하나님의 사랑의 나를 강권하시기에 이 일을 해요!”
그래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사랑이 저수지의 발전기가 될 때 우리 사랑은 이웃에 대해 오래 참으며 견디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발전기에서 작동하는 사랑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되고 불륜이 되고 목마른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받을 사랑, 내 이익을 쫓는 사랑이 사랑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사랑의 오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국교회는 많은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 사랑의 흉내를 내고… 교회부흥을 위해 아파트정문을 쓸고… 교회부흥을 위해 쌀가마니를 내놓고… 교회 부흥을 위해 장학금을 내놓고… 그런 것이 눈에 이기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말입니다.
바울은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말합니다. 사랑은 내 식대로, 내 좋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 배려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대통령과 영부인, 야당대표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단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은 다윗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며 감동의 사진입니까? 그러나 신문에 무릎을 꿇은 대통령을 보는 순간, 리처드 마우가 쓴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대통령은 장로님이기 전에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며 국가원수(元帥)입니다.
기도회 인도자가 느닷없이 모두 무릎을 꿇자고 했을 때 대통령은 순간 머뭇거렸다고 합니다. 영부인이 먼저 무릎을 꿇으며 옷을 잡아당겼답니다. 그제야 무릎을 꿇고… 이 무슨 어색한 광경입니까? 기도 인도자는 전혀 국가의 원수를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조찬기도회는 대한민국을 향한 애국기도회입니다. 애국은 나라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번 기도회는 나라사랑의 표현법이 서툴렀습니다. 대통령을 곤혹하게 만들고 세상이 한국교회를 향해 오만하다 돌 던지게 하는 것이 어떻게 나라사랑입니까? 내 중심적인 애정표현이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이웃사랑입니다. 그래서 무례한 기독교입니다.
요한1서 3:16은 말합니다. 이런 사랑을 알았으니…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목숨을 버리는 사랑… 이타적인 사랑…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이웃사랑이 내 식(式)대로, 내 원하는 대로 일방적인 사랑은 아닌지… 우리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나며 세상이 감동을 받습니다.
결론
예수님에게서 3년을 배운 제자 요한! 예수님의 총애를 받았던 사도 요한! 그 요한이 사랑의 중심에 서서 세상을 향해 외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사랑으로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안으로 빨리 들어와야 합니다.
요한1서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웃들에게 자기희생적인 마음으로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환하게 웃을 것이며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래로 흘러내리는 수직적인 하나님 사랑! 옆으로 흘러가는 수평적인 이웃사랑! 십자가의 정신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다시 결심하고 힘을 모읍시다!
(제목은, 김종원 목사님 설교제목에서 빌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