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비록, 2월 같은 인생이어도(요한복음 9:1~5)

갈렙처럼 2025. 2. 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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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2월 같은 인생이어도

요한복음 9장 1~5절

 

서론

오늘은 2월의 첫 주일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새해라 고향을 찾고 설명절에 세배 한다 야단이었는데 오늘은 2월입니다. 새해 다음 날이 2월? 어리둥절하지요! 2월에 설교제목을 “비록, 2월 같은 인생이어도”로 정했습니다. ‘비록’이라는 말에는 2월에 대한 폄하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요, 2월은 다른 달보다 3일이나 적습니다. 열한 달이 대체로 절반은 31일, 절반은 30일⋯, 하루 차이도 큰데 다른 달보다 3일이 적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월급 받는 직원 들은 3일 부족이 엄청 좋고 월급 주는 사업주는 3일 부족이 크게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계 인구는 75억 정도, 2005~2010년 통계 1초에 4.3명이 출생하고 1.8명이 사망합니다. 1초에 자동차가 한 대씩 생산됩니다. 그러면 2월의 3일 부족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밥금식을 열흘 했는데 하루 먼저 시작한 고장로님이 얼마나 부러운지⋯ 하루 차이가 큽니다.

 

앞의 통계에 근거하면 1초에 대략 5명이 출생하고 2명이 사망합니다. 24시간은 86400초입니다. 하루에 432000명이 출생합니다. 3일동안 1,296,000명이 출생합니다. 3일동안에는 518400명이 사망합니다. 그렇게 대단한 3일 부족의 2월은 열 달을 채우지 못한 칠삭둥이처럼 뭔가 부족함이 있는 달입니다.

 

야곱의 12아들 중 가장 비실비실한 아들이 베냐민입니다. 어머니 라헬이 길바닥에서 낳다 사망합니다. 아버지에게는 이 아들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형 요셉은 동생 때문에 엄마를 잃고 베냐민 자신은 엄마 얼굴도 모른 체 젖동냥으로 살았습니다. 애처로운 인생이지요!

 

베냐민은 계절로 따지만 3일이 모자란 2월 인생입니다. 희망을 주는 1월의 힘에 눌리고 3월의 눈부신 화려함에 눌려 있는둥 마는둥 지나가는 결핍의 2월, 하루라도 보태어 29일이 되려면 4년을 기다려 윤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2월 29일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자기 생일이 없다고 원망도 무지 듣습니다. 금년에 김병구 집사님. 그런 모든 것을 감수하며 사는 것이 2월입니다.

 

사람은 어때요? 우리 모습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 2월과 같은 부족함이 있겠지요. 남들과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느껴지고 부족하고 궁색하고 볼품없는 모습들 말입니다.

 

생일축하노래는 “⋯사랑하는 000, 생일 축하합니다~”, 이런 축하노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일축하 노래를 개사해서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인구도 많은데 왜 태어났니~” 장난 노래였지만 듣기에는 상처가 됩니다. 특히 2월 같이 남들보다 3일이 부족한 신분, 외모, 신장, 학벌이라면⋯ 1월과 3월 사이에 끼어있는 인생이라면 왜 태어났을까? 왜 하필이면 2월 같은 인생으로 태어났을까? 자문하며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그런 2월의 첫 주일에 있습니다.

 

여기 2월 같은 인생이 있습니다. 이름은 몰라도 그에게 일어난 일은 너무 잘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냥 맹인이라 합니다. 시각장애인입니다. 목사님들이 설교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호칭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시각장애인 청년은 2월 중에서도 29일이 있는 2월이 아니라 28일밖에 없는, 모자라도 크게 모자란 인생입니다. 31일이 있는 저 멋진 동창들, 건강한 사람들, 성공한 친구들⋯ 하루가 부족해 30일 인생이라면 은수저 동수저는 되지 않겠어요? 시각장애인 청년은 흙수저, 플라스틱 수저를 갖고 태어난 28일짜리 2월의 인생입니다.

 

2월 같이 볼품없는 인생 앞에서 왜 태어났을까? 아무 것도 보지 못할 인생이라면, 부모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는 인생이라면⋯ 내가 왜 태어났을까? 답이 없는 질문을 평생을 했겠지요?

 

31일짜리 인생들, 혹은 30일짜리 인생들은 28일짜리 2월 청년을 두고 제멋대로 해석합니다.

도덕적 시각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시각장애는 도덕적 질문이 아니라 의학적 질문이어야 합니다. 임산부가 약을 잘못 먹었나? 아이에게 어떤 요소가 부족했는가? 병은 의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제자들은 도덕적 질문을 합니다. 질문이 잘못되니 처방도 잘못 나옵니다.

 

에덴의 뱀은 여자에게 묻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부정적인 질문입니다. 부정적인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을 불러옵니다.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실과는…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절)

인색한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부정적인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이 나온 것입니다.

 

질문을 잘 하는 성도가 되세요! 긍정적인 질문자가 되세요. 내일 날씨가 좋겠지? 그 일이 잘 되겠지? 우리 교회가 좋지? 목사님이 좋지? 긍정적인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물학적 질문을 해야하는데 도덕적 질문을 합니다. 도덕적 질문은 도적적인 결론-인과응보(因果應報)의 결론을 내립니다. 죄 때문에 불행이 온다는 율법적 해석입니다.

 

죄 때문에 병이 왔다… 죄 때문에 가난이 왔다… 죄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물론 죄 때문에 오는 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불행은 죄와 상관없이 끼어듭니다. 이걸 무시하고 모든 불행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면 원망이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시각장애 아기들이 백만 명 당, 5백만 명 당 한 명꼴로 나올 수 있는데 도덕적으로 해석하면 누구의 죄 때문이냐?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고 부부싸움이 됩니다. 남의 아픔에 쉽게 율법으로 진단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종교적 시각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도덕적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종교적 해석을 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니라”(3절)

제자들은 과거적 해석을 합니다. 전생에⋯ 신앙인임에도 전생을 말하고 팔자와 운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미래지향적으로 봅니다. 과거로 본다면 죄 탓이고 누구의 탓이라는 원망이 나오지만 미래지향적으로 보면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고 보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각장애인은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낸 것입니다. 세례요한과 맞먹을 사역입니다.

 

11장에, 나사로의 죽음이 나옵니다. 도덕적 해석이라면 나사로는 죄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종교적인 해답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니라”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 영광을 운운합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성공하고 출세해서⋯ 질병에서 낳아 하나님의 영광⋯ 사업에서 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결론은 무엇입니까?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하나님께 영광,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내가 성공하고 출세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질병에서 낳으면 하나님의 영광,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사업에서 잘 되면 하나님께 영광,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이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그 자체를 죄로 보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제자들의 진단입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려면 누구나 눈을 떠야하고, 성공하는 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헬렌 켈러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눈을 감고 있거나 성공을 못하면 그냥 불쌍합니다.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우리가 세상에 유통시켜야 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까?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할 시각장애인이 얼마나 되며 헬렌 켈러처럼 세계적인 위인으로 성공할 장애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1억명 당 한 명도 십억 명도 한 명도 아닙니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하고 시각장애인으로 평생을 살고 성공하지 못하면 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지 못하는 삶! 그야말로 3일이 부족한 2월의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까?

 

2월은 3일이 짧든, 4년마다 한 번씩 하루가 보태어 29일이 되던⋯ 2월 자체로 소중하고 귀합니다. 2월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태어난 달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 000, 000, 000....(명단 호명)⋯ 이분들이 있어 부모들은 2월이 소중하고 비록 28일밖에 없지만 작은 달이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이분들이 우리 교우요 따듯한 미소, 믿음이 있어 그 자체로 그들을 사랑하고 짧은 2월이지만 매일, 매일에 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께 하시는 일이지 내가 결함을 극복하고 꼭 성공하고 이적을 보여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경기도 농촌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교인 수는 할머니 성도 다섯 분. 3년을 열심히 목회하니 결국은⋯ 세 분의 권사님은 세상을 떠나고 성도가 2명만 남았습니다. 월요일 오전, 목사님은 방안에 혼자 누워 생각합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내가 목회하는 것이 맞나? 이러다가는 교회가 문닫게 되었다’

식구도 없는 방에 TV를 켜놓고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아닌 멍한 상태로 누워있습니다. 스위스 산악구조대의 모습을 담은 다큐프로그램인데 구조견과 열심히 훈련하는 구조대원의 역동적인 모습과 아름다운 스위스의 이극적인 풍광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한국인 리포터가 산악구조대원에 질문했습니다.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교사로 일하다 퇴직하고 우리 부부가 구조대원이 된지가 7년째입니다.”

“7년 동안 몇 사람을 구조했나요?”

“아직 한 명도 없습니다. 언제라도 한 명만 구조해도 우리 인생은 의미가 있습니다!”

 

농촌교회 목사님은 망치로 뻥!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이 왔습니다.

“저 사람은 7년 동안 한 사람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는데 여전히 힘을 내고 저렇게 준비하고 있구나. 나는 세 분을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지금도 아직 두 분의 성도가 있지⋯”

 

그 길로 짐을 싸서 기도원으로 올라가 한 생명에 대한 소중함으로 목회하게 해 달라, 기도하며 새 힘을 얻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결론은 뻔합니다. 이후로 성령이 충만하여 농촌교회에 성도들이 많이 출석하고 대부훙을 이루었다~ 하면 된다~ 그렇습니까? 그래야만 축복입니까?

 

오늘 이야기는 그런 결론이 아닙니다. 목사님은 여전히 초라한 목회성적표를 보였습니다. 2월 같은 목회~ 31일의 성공을 누리는 동창생보다 3일이 작은 28일, 2월의 인생! 수만 명이 태어나고 수만 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3일이 적은 2월의 초라한 인생, 그러나 그 목사님은 이후 매일 매일의 삶에서, 자기의 모자란 28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 그걸 목격하며 행복한 목회자로 살았다면 훌륭합니다. 리처드 로어는 말합니다.

 

“해답을 가졌다는 것이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해답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주인공 다니엘은 연필세대의 사람이고 목수이고 선량하고 평범한 이웃입니다. 목수 일로 제 한 몸 건사하면서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찾아온 심장병 때문에 일을 쉬어야 하는데 사회보장제도의 질병수당신청의 과정이 너무 어렵습니다.

전화로 신청하라, 인터넷으로 예약 신청하라, 규정대로 하라⋯. 여러 달을 애먹입니다.

 

너무 화가 난 블레이크는 끝내 포기하고 공무원들에게 소리칩니다.

“다 필요 없소! 사람이 자존심 잃으면 다 잃은거요! 당신들은 날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소!”

자신의 상황을 포기한 다니엘은 같은 처지의 케이티를 만납니다. 그녀는 솔로맘인데 10분 늦었다는 이유로 신청자체가 거부당합니다. 런던 지리를 몰라 늦었다 했지만 쫓겨납니다. 케이티의 집으로 간 다니엘, 자기보다 더 못한 생활에 주머니의 돈을 털어주고 돌아옵니다.

 

영화는 컴퓨터라고는 모르는 목수 다니엘이 손으로 쓴 마지막 글로 막을 내립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나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의 2월이 있는 것이지요!

 

결론

시장에 강아지 노점이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예쁘고 건강한 강아지를 놔두고 한쪽 구석에 있는 강아지를 사겠다, 했습니다. 건강한 강아지들 틈에 끼어 밀리고 밟히고 잘 보이지 않는 존재감 없는 그 강아지, 더군다나 한쪽 다리가 성하지 못한 강아지를 택한 것입니다. 주인이 같은 값에 건강한 강아지를 준다고 했더니 소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에요! 내게는 이 강아지가 필요해요! 나도 몸이 건강하지 못하니 내가 더 잘 돌볼 수 있을 거예요!”

남들보다 몸이 성하지 못하여 남들보다 부족하여 2월의 인생을 사는 아이의 눈에는 2월과 같은 성하지 못하고 모자란 강아지가 눈에 보인 것이지요! 그 강아지를 사랑하면서 그 강아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행복할 수 있는가? 보여줄 거예요! 그건 자기 인생이니까요!

 

요한복음 9장을 읽다 문득 하나님이 그런 분이실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월도 하나님이 만드신 달입니다. 비록 다른 달보다 3일이 짧지만 대한민국의 2월은 대통령 취임일이 있는 달입니다. 13대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해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달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달을 3일이 모자라다고 이틀이 모자라다고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작은 게 문제가 아니라 ‘작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짧은 생각’이 문제입니다. 젊을 때에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렇게나 그냥 살다 간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3일이 모자란 2월에도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달이 아닌 것이 없듯이 비록 2월 같이 모자란 사람이어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2월 같은 내 인생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을 느끼며 보이며 유통시키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2월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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