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야 노올자] 가경을 성경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요한계시록 22:18,19)
가경을 성경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
성경은 구세주이신 ‘한 인물’(신약)과 구세주를 태동시킨 ‘한 민족’(구약)에 관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안에는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어떻게 일으키셨고, 그들에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계시하고 있는가 하는 내용에 집중합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오해했습니다. 성경이 단지 이스라엘 역사요, 율법에 관한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즉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록해 놓은 책이 구약성경이고, 유대인은 율법을 잘 지켜 구원 받을 수 있기에 구세주라는 예수는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 배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구원의 방법을 말씀해 주신 적이 없으며, 율법(계명-행위)으로 천국입성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무기력과 인간 본성의 내면적 부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죄인된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은 율법을 통해 의로워지려 했으니 이것이 그들 실수였으며, 예수님을 배격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성경 도처에는 여러 모형과 상징으로 그리스도를 숨겨놓았습니다. 창세기의 ‘여자의 후손’(3:15), ‘가죽옷’(3:21), ‘수양’(22:13), 출애굽기의 ‘유월절의 어린양’(12장), 레위기의 ‘대제사장’(8장 이하), ‘염소’, 민수기의 ‘반석과 샘물’(20:11), 신명기의 ‘도피성’(19장),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형들입니다.
구약성도의 수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나님께서 몸을 입어 육신이 되신다는 사실이 가당치도 않았기에 대신에 여러 상징과 모형으로 알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복음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고, 신약에는 나타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로 계속 이루어졌고, 신약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어느 한 쪽에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과 신약은 본질에 있어 같은 것이고, 다만 그 시대에 적합한 계시의 방법만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루터는 “신구약 성경은 성도의 영적 성장의 두 유방이다. 이 두 유방 중에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원만한 성장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약이나 신약 어느 한 부분만 좋아하지 말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요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요, 구약과 신약 66권 모두의 내용에 하나님의 감동이 있기 때문에 골고루 읽어야 합니다.
성경-로마가톨릭과 왜 다른가?
로마 가톨릭과 기독교(개신교)의 연합과 통일을 시도하는 일이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양자의 통합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 서로의 성경관에서 너무도 입장차가 큽니다. 성경관의 차이는 서로간의 교리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교리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그 교단의 중심입니다. 만약에 그 교리를 포기하게 된다면 교단의 존재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교황제도가 없습니다. 성경만을 주장하는 기독교와 전통(傳統)을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이 서로 통합되기 위해서 가톨릭이 교황제도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포기하면 그들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립니다. 지금 로마 교황청이 그 어느 시대보다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데 개신교와 통합하기 위해 성경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엄청난 기득권-교황제도를 포기하면서까지 교회의 일치를 이루려고 하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일보다는 차라리 지금의 여당과 야당의 통합이 쉬울 것입니다.
어떤 전통이나 교회의 권위보다 성경을 우위에 세우는 기독교(개혁교회)와 전통을 더 중시하는 로마 가톨릭을 영원히 다른 종교로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관입니다. 그만큼 기독교의 성경관과 로마 가톨릭의 성경관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개혁교회는 성경 66권을 정경(正經)으로 인정합니다. 그것은 개혁교회가 그렇게 제도화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부터 66권을 정경으로 인정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주후 3세기 경 로마교회가 세계 그리스도 교회의 중심이 되면서 빠르게 세속화(世俗化)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와 로마의 국교(國敎)처럼 되었던 바벨론종교가 자연스레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종교의 정치화로 나가는 초석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에도 없는 교리,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교황제도, 고해성사제도, 사제 독신제도, 마리아 부활과 승천, 성모 숭배사상… 이런 교리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대부분 바벨론 종교에 있었던 교리들입니다.
중세기에 들어가면서 종교와 정치의 균형이 한 쪽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교황이 황제보다 우위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황제는 황금과 군대를 가졌지만 교황은 황금과 민심(民心)을 갖게 되었습니다. 민심을 얻는 데는 바벨론 종교 제도가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1500년 동안 내려오던 정경 66권에 몇 권의 가경 등을 정경으로 편입시켜 버린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30년 정도 지난 1546년 트랜트 교회 회의를 통해서 11권에 이르는 가경을 제2정경으로 만들고 그중에서 7권을 정경화했습니다. 토비트, 유딧, 솔로몬의 지혜서, 집회서, 바룩(예레미야 서신 포함), 마카비 상․하, 에스터 첨가서, 수산나, 세 젊은이의 노래, 벨과 벨 등으로 이 책들은 B. C 250년경부터 그리스도교 시대 초엽까지의 기간 동안 쓰인 것으로 히브리 정경에 들지 못하던 유대의 문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책들을 가경(假經)이라고 해서 정경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황청은 1천년 이상이나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던 책들을 갑자기 성경에 편입시켜서 정경으로 둔갑을 시켜놓았습니다.
(아이고, 66권도 힘든데 80권 이상으로 늘어나다니,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그걸 다 읽을 생각을 하니 얼마나 부담스러워했을까요?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예 성경의 권위를 교황보다 낮게 생각하기에 별로 읽는 일도 없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분들에게 66권이 된들 660권이 된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성경 66권이 어느 날 갑자기 80권 이상으로 늘어나도 아무 말이 없이 수용하고 따라갔겠지 우리처럼 성경 중심의 교단이라면 원시시대도 아니고 중세기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교회가 회의를 통해서 결론을 내렸다고 해도 어떻게 전 교인들이 군말 없이 수용하겠습니까?)
가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로마 가톨릭이 아무리 가경을 정경으로 삽입하고 정경화해도 기독교는 66권 외에는 인정하지 않고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성경은 외경(外經)으로 평가 절하해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이 구약 39권은 정경으로 인정하면서도 구약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집필된 15권의 가경은 성경으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경의 권위를 규정할 때 정경을 기록한 예언적시대(성경시대)를 정하였습니다. 예언적 시대는 모세로부터 아닥사스다 왕 때까지였습니다. 로마 교회의 가경은 아닥사스다 때보다 훨씬 후에 기록된 것이므로 정경으로 받아들일 하등의 근거가 없습니다.
둘째, 신약성경에서도 가경을 전혀 인용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 39권에서는 즐겨 인용하였으나 15권의 가경에서는 단 한 줄도 인용한 적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에도 이미 가경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했다는 사실은 가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가경의 내용에 오류(誤謬)가 많다는 점입니다. 역사적․지리적 오류는 물론이고 신학적으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오류들이 있습니다. 가경인 <토비트>에는 죽은 자를 구제 사업으로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며(12:9, 4:10) <바룩>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벌써 세 번째의 이유에서, 왜 로마 가톨릭이 외경을 성경으로 편입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 드러나고 있지요? 교황청이 서둘러 가경을 정경으로 편입시키고 있는 것은 그들의 교리-이를테면 고해성사제도, 교황제도, 사제 독신제도, 마리아 부활 승천 내용 등이 정경에게는 없기에 그 교리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억지로 편입시켰을 뿐입니다. 때는 30년 전에 마르틴 루터, 죤 칼빈의 종교개혁이 군주와 일반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으며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교황청의 고압적인 자세에 짓눌려 있던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을 들고 나왔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이런 주장은 결국 성경에 없는 제도들은 과감히 버리자는 것입니다. 개혁가들이 처음부터 교황제도를 반대하거나 독신제도의 부당함을 들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결론이 어디로 갈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로마 교황청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이러다가는 교황청이 몰락할 지경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운동이 번지고 있는 그 와중에,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지도자들이 다 빠져 나가버린 사이에 1546년 트랜트 회의를 열고 가경을 정경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입니다. 가경이 정경이 되어야 교황청의 제도를 성경에서 가져왔다고 소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66권외에는 그 어떤 책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22장)에서 이런 경고를 합니다.
18절,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절,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무서운 경고입니다.
결론
종교개혁의 본산지 독일 교회 신자들은 성경을 주 1회 100명 중 3명(독일 인구의 1.6%)만이 하루에 한 번 성경을 읽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매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불과 3%에 그쳤습니다. 매주 성경을 읽는 사람은 3.2%, '1년에 한 번 성경을 읽는다'고 밝힌 독일인은 30%를 차지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다수(80%)의 신자들은 대부분 성경의 주제가 '개인 생활과 관련이 없다'고 느꼈다거 답했습니다. 성경은 읽지 않지만 여전히 성경이 '사회의 핵심 규범과 가치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한 사람은 63%였습니다.
반면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답한 사람은 1.6%로, 그것조차 2014년(3.1%)보다 2배 감소한 수치입니다. (데일리 굿뉴스 박애리 기자 2023.07.10.)
성경을 읽어도 역사가 나타나기가 쉽지 않는데 성경을 놓고 사니 무슨 능력이 일어나겠습니까?
미국의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경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 자녀들이 성경읽기를 시작하는 시기가 빠를수록 그들이 국가의 유용한 시민이자 존경 받는 사회의 구성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더욱 확실히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성경을 더 가까이 하고 성경에서 더 많은 은혜들을 발견하고 은혜의 길로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