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3백년 간의 동행(창세기 5:21~24)

갈렙처럼 2025. 2. 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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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년 간의 동행

창세기 5:21~24

 

 

서론

요즈음 교회에 결혼식이 풍년입니다. 결혼은 평생을 같이 동행하겠다는 약속이요 첫 출발입니다. 결혼을 잘 하는 사람은 훨훨 나는 두 날개를 얻은 격이지만 결혼을 잘 못한 사람은 오히려 무거운 죽지를 얻은 격이 됩니다.

이번에 결혼하는 분들이 좋은 동행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축하도 하고 축하 금도 내는 것입니다. 허구한 날 서로 “이 웬수야!” 하면서 싸우는 동행을 하라고 부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곧 동행입니다. 신앙의 길에 입문하는 것은 하나님과 결합, 인간적인 용어로는 결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결합이지요.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잘 동행해야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아무리 사람들과 호흡이 맞고 손발이 맞아도 하나님과 다이얼이 맞지 않으면 항상 잡음만 냅니다.

 

이제 금년 한해도 한달 남짓 남았습니다. 우리의 남은 날 수는 계수 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남아있는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늘부터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바르게 걸어가야겠다는 결심과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에녹은 우리들에게 실제적인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1. 에녹은 60여 년을 형식적으로 만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처음부터 신실한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그는 셋의 자손이었기에 여호와 신앙이 있었습니다. 셋의 자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4:25, 26). 그들은 공동체적으로 여호와 신앙을 높였습니다.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 에녹이 포함되어 있기는 해도 그는 형식적이었고 피동적이었습니다. 그는 집회에 참석했고 일정한 액수의 부담감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교우들과 모여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그에게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최고의 결정권자는 스스로였습니다.

 

우리 중에 오랜 세월을 하나님과 동행은 하면서도 하나되는 동행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출석하고 형식적으로 나오지만 실상은 주님과 깊은 교통이 없습니다.

 

왜 즐거운 동행을 할 수 없을까요?

 

1) 시대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문명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문화요 문명입니다. 앞에 보면 가인의 자손들이 나오는 데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불신문화, 인본주의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지난날에는 예수 믿기 참 좋았습니다. 학교만 끝나면 교회 가서 놀았습니다. 교회가 제일 그리웠고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사회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죄는 무서움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인기 없는 일이요 재미없는 일입니다.

 

2)  우리 본성이 세상을 따르려고 합니다.

우리 본성은 흙에서 나왔습니다. 흙의 성질이 있습니다. 흙은 세상입니다. 세상으로 자꾸 기울어집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요즈음에는 “이”자 돌림이 있습니다.

“이럴 수가!”

“이번만!”

“이 정도야!”

“이왕 이렇게 된거!”

“이판사판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의 동행을 포기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교회는 점점 커져가고 대형화되어 갑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이 꼭 하나님과의 동행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의 교회는 엄청 큽니다. 유럽의 교회는 국교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교회,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교회, 보혈의 피가 흐르지 않는 종교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에녹이 65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기차를 타고 가는 데 원 청년과 함께 동승하게 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굉장한 분이시다!”

“그는 망나니였다!”

그러나 앞에 계신 분이 이기풍 목사님이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동행은 하고 있었지만 그분과의 교통은 없었습니다. 에녹의 생애가 그렇습니다.

2. 에녹은 3백년을 동행했습니다.

에녹의 생애 속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가 65세쯤 되었을 때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은, “그가 죽을 때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대홍수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당시는 죄가 관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에녹에게 대심판을 계시하셨습니다. 심판을 알게되었을 때 에녹은 화들짝 놀랍니다. 그에게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에 겨운 일입니다. 에녹은 날마다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복종시킴으로 3백년을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사실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밭에 가면 참 힘들어요. 아버지는 걸음이 빠르십니다. 벌써 저만치 걸어가십니다. 천천히 가자고 해도 그냥 가십니다. 내 걸움과 보조를 맞추시면 좋을텐데 내 사정은 봐주지 않습니다. 당신의 걸음과 보조를 맞추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신앙 생활하는 게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실만도 한데 하나님은 자신의 수준을 낮추지 않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만나 주시기 위해 자기 기준을 낮추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 기준에 이르도록 능력을 주실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기쁘게 포기하는 자들에게 교제를 허락하시며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자기 포기와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마이어 박사는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히말야 산 꼭대기의 공기만큼이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희박하고 숨쉬기가 힘이 든다. 잠깐만 있어도 인간의 발은 지쳐버린다. 지탱하기가 힘이 들어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려는 노력을 포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3백 년 동안 에녹도 그런 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해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성실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루하루 성실하게 동행했습니다. 하루는 죽을 둥 살 둥 동행하다가 다음 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 홀로!” 변덕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주일은 동행하다가 평일 날은 “나 홀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이 좋으면 동행했다가 기분이 나쁘면 “나 홀로!” 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날씨만 궂어도 동행하지 않습니다.

 

에녹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주일 중심으로 동행한 게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동행했습니다. 내 기분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동행합니다.

 

에녹의 성실성을 봅니다. 그는 그렇게 3백년을 동행했습니다.

누구나 순간적인 헌신은 할 수 있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 받았다고 한 달은 잘 갑니다. 우리의 결심으로 1주일은 새벽기도를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헌신은 쉬운 게 아닙니다. 희생적인 자기 포기와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결혼 생활은 사랑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취미와 관습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을 죽이고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동행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런 이들과의 동행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실한 자들, 자기를 포기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지 않고는 누구든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에녹은 자기의 고집이 나왔을 것이고 본성이 나왔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동행을 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머물려고 힘써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들을 완고하고 완악한 마음 가운데 놓아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 버리면 신앙 인들처럼 고집이 세고 비상식적인 사람들도 없습니다. 불신자들보다 더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도록, 그래서 하나님과의 동행이 가능하도록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며 세리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우리에겐 은혜를 주시고 동행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3.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유발은 악기를 만들어 문명에 공헌했고 두발가인은 기계를 만들어 문명의 새 길을 열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찬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업적을 남기려 애씁니다. 업적을 남김으로 상을 받으려 하고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업적 배후에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많습니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며 만민 평등사상을 외쳤지만 사실 그는 자기의 자녀를 엄청 학대했습니다.

 

에녹은 기록상으로는 아무 것도 남긴 게 없습니다. 그는 3백년을 살면서 큰 업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살기에 힘썼습니다. 그는 평범하게 살면서 날마다 즐거운 동행을 했습니다. 그는 큰 기록이 없으나 동행 그 자체로 기쁨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셨기에 그는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그는 4백 명의 군사들로 막강한 사울의 정규 군대를 이겼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 가든지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밧세바와의 관계에서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를 책망할 때 다윗은 그냥 그 자리에 엎드려 버렸습니다. 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갈까봐. 하나님의 신이 떠나간 사울이 얼마나 짐승 같이 살아가는 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 엎드리며 여호와의 신이 떠나가지 마시기를, 자원하는 심령을 주시기를,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기를 침상을 적시도록 울며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업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자신의 사람을 통회자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어떤 일을 했는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늘빛교회를 위해서 내가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게 해드리는가, 지금! 그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가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동행이 아니라 하나님과 계속 싸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

성자(聖者)라고 칭송 받던 프리스톤이 임종하면서, 침대 주변에서 울고 있는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게나. 나는 내 위치를 바꾸러 가는 것이지 친구를 바꾸려는 게 아닐세. 나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해 왔고 이제 그분께서 하늘에서 동행하게 하기 위해 다 나를 부르고 계시다네!”

 

이번에 결혼하는 분들이 서로 간의 아름다운 부부의 동반자적인 동행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동행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보다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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