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종려주일] 예수님께서는 왜 나귀를 타셨을까(마가복음 11:1~10)

갈렙처럼 2025. 3. 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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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예수님께서는 왜 나귀를 타셨을까

마가복음 11장 1~10절

 

 

서론

본문은, 십자가를 한 주 앞둔 날,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입니다. 이번에 올라가신 이후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주님이기에 어느 때보다 비장합니다.

 

1절,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 감람산(올리브산)은 해발 약 800m에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동으로는 요단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을, 남으로는 넓은 유대 광야,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의 주요 통행로(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감람산은 스가랴 14:4에서 메시야 대망과 연관이 됩니다.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그래서 세상 종말 그리스도의 재림이 예언되는 장소로 등장합니다(마24:3).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4Km, 반드시 감람산 너머 산등성이에 형성된 벳바게를 지나가야 합니다. 벳바게는 예루살렘이 시작되는 행정구역입니다. 예수님은 일찍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계획입니다. 이는 스가랴 9장 9절에 근거하여 메시아의 입성을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주가 쓰시겠다!

2절,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나귀를 구해 오라 보냅니다. 제자들이 벳바게로 가보니 나귀새끼가 문 앞에 있고 풀고 가려는데 주인이 “왜 끌고 가느냐?” 묻습니다. 명하심을 받은 대로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자 두말없이 내줍니다(막11:4~6 참조). 생면부지 사이인데 말입니다.

 

유월절은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고조되는 시기입니다. 메시아가 오신다면 유월절 기간이 될 것이며 예루살렘 입성 때는 반드시 나귀를 타고 온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께서 “내가 쓰겠다” 징발하면 유대인에게 영광의 징발이 됩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참존화장품 회장 김광석 장로님의 믿음과 인생을 전해주는 책의 제목입니다. 불교 신도회장이던 저자가 한계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 순종하고 역경을 이겨낸 스토리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참 아름다운 징발이고 “예! 쓰십시오!” 아름다운 순종이며 헌신, 헌물입니다. 한국교회에 이런 전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게서 겸손과 평화를 배워야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자동차는 소유주의 외형적 신분을 보여줍니다. 좋은 차를 타면 성공했다, 작은 차를 타면 능력이 없다 합니다. 호텔에 작은 차를 타고 가면 알아서 파킹하라, 승합차 몰고 가면 구석에 세우라, 고급차 타고가면 직원들이 대행해 줍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큰 차, 대형차를 선호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신다면 어떤 자동차를 타고 다니셨을까?

 

그 당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면 멋진 백마(白馬) 정도는 준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나귀가 지체 높은 자들의 교통수단으로(삿 10:4; 삼상 25:20) 이용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구약예언의 성취를 이룸이며 평화로운 입성을 보여줍니다. 말을 탔다면 로마기병대의 제지를 받았을 것이며 현장에서 체포당하거나 싸우다 죽었을 것입니다. 이에 흥분한 환영인파가 체포를 막으려다 많은 희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면 인류의 구원은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가 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나라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일입니까.

 

바울은 겸손의 모델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일체시지만 우리 구원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빌2:6-8). 영적인 분이 육체가 되고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자기비하(卑下)이고 낮아지심입니까?

 

인간의 죄와 타락은 교만으로 왔습니다. 교만은 우리를 하나님의 왕국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겸손해지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멸망이 교만에서 왔다면 구원은 예수님의 겸손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존 머레이는 <겸손>에서 기독교인들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11:29)

 

겸손은 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실천하는 자기희생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에 대해 편하게 대해줍니다. 겸손은 헌옷처럼 편안함을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새 옷처럼 너무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아닌지요! 겸손한 사람들이 세상에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나귀를 타신 예수님처럼 겸손으로 나가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호감도가 이리도 낮은 것은 교회가 겸손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감사로, 사람들에 대해서는 겸손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적폐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안이 됩니다.

나귀는 예수님 덕분으로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예루살렘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 최고의 명절입니다. 유월절에는 소와 양, 비둘기 등이 제물이 됩니다. 율법에서 나귀는 발굽이 갈라지고 새김질을 못하는 짐승이기에 식용이 금지되었습니다(레 11:2-7). 그래서 성전 제사에서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속죄사역의 제사를 드리고 제물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소나 염소였다면 그 제물로 성전제사를 드렸을 수도 있겠지만 나귀는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성읍으로 들어가려고 어슬렁거리다가는 사람들에게 맞아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셨기에 당당하게 사람들의 숲을 지나 입성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입성했습니다.

 

나귀를 의인화해 보았습니다만, 하늘나라에서 우리 모습이 그렇습니다. 죄인된 우리는 하나님께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의와 노력과 내 힘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떻든지 부정한 음식으로 규정된 나귀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위풍당당하게 입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내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의 이름만을 존귀하게 여겨야 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 앞에 늘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무엇도 그 기쁨보다 능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나귀를 보고 인사 한다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든다고 우쭐했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버리고 스스로 영광을 누리려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당장 쫓겨났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구도 주님보다 영광을 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덕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보다 어떤 직분도 더 사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멍에를 매어본 적이 없어 나귀는 힘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간 나귀는 어린 새끼입니다. 한 번도 멍에를 매어보지 못하고 사람을 태워보지도 못했습니다. 훈련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새끼 나귀가 느닷없이 차출되어 예수님을 태우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2절에,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는 나귀 새끼’로 나옵니다. 한 마리입니다. 누가복음에서도 한 마리입니다. 마태는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마21:2), 두 마리라 했습니다. 히브리 본문에서의 스가랴 9장 9절은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로 표현됩니다. 아마 두 마리가 매어있었는데 새끼나귀만 끌고 온 것인가, 어미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가 순순히 따라오게 하기 위한 용도가 아닌가, 해석해 봅니다.

 

어린 나귀새끼에게는 목수로 다져진 청년의 몸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아무도 태워보지 못한 어린 나귀였기에 힘도 단단하지 못하고 아직은 사람을 태우는 요령도 없습니다.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도 예수님을 태우고 꾸역꾸역 이동하는 그 모습은 마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듯합니다.

 

예수님으로 구원받는 것은 쉬워도 예수님을 따라서 사는 일은 힘들 때가 많습니다. 물론 쉽게 믿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주님을 위한 어떤 희생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등에 타신 예수님을 빌미로 내가 편하고 영광을 받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 부인의 길이요 희생의 길입니다. 이것이 인류 구원의 길입니다. 사단이 일찍부터 주님의 길을 방해하고 나섰습니다(마4:1-11).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40일을 금식하셨을 때 찾아와서 유혹했습니다. 경제적인 유혹, 자기 과시의 유혹, 세상 영광의 유혹…. 이것이 평생 주님에게 있던 유혹입니다. 베드로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좌우편의 영광을 요구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유혹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가장 교회다울 때 교회를 신뢰합니다. 세상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향해 도전할 때는 도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업고 가는 한국교회가 너무 편한 길을 가려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우습게 여깁니다. 그 분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가 이제는 거룩한 부담들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힘겹게 그분과 함께 고통을 분담해야 합니다. 나귀처럼 힘들게 주님을 모시고 가야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부활의 길, 결국은 승리의 길입니다!

 

결론

10절, 예수님이 등장하자 예루살렘 성읍에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일상의 생활을 흔드는 분입니다. 그것은 저쪽 편에서는 자리를 잃을까봐 전전긍긍의 소동이지만 이쪽 편에는 죄의 도성을 흔드는 거룩한 소동입니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소동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거룩한 소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께 바른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 예수님! 그건 아닙니다. ‘선지자 예수’를 열렬히 환영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무리들로 돌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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