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정금으로 덮인 나무(출애굽기 25:10~14)

갈렙처럼 2025. 4. 2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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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으로 덮인 나무

출애굽기 25:10~14

 

서론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링컨은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노예제도는 인류가 저지른 죄악 중 가장 큰 것이고 노예제도를 철폐시켰다는 것은 업적 중의 업적입니다.

미국인들이 링컨을 존경하는 것은 단지 노예해방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실천, 그리고 그의 인격입니다. 대통령이라고 권위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소탈했으며 동네 아저씨와 같은 친근한 태도로 누구의 친구도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최고의 존경과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찬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링컨의 생애는 실패와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초등학교 중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아내의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통령이었고 노예를 해방시킨 화려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내면은 상처로 가득 찼습니다.

 

어디 링컨만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은 마음 속 어딘가에 상처와 흉터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것을 미소와 화장과 옷으로 감추고 있을 뿐 저마다 나름대로 아픈 과거와 상처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지난 세월의 연약한 것들을 감추어지게 하시고 오늘 이만한 행복과 영광으로 씌워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하지 모릅니다.

 

본문에 나오는 법궤를 볼 때면 겉으로 드러난 영광 속에 감추어진 내면의 연약함과 아픔을 봅니다.

1. 보잘 것 없는 가시나무에 황금이 입혔습니다.

하나님은 성막 건립을 지시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성막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곳을 지성소라고 하는 데 지성소 안에는 궤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법궤입니다. 제사장들은 이 법궤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해 있는 것으로 알고 떨었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법궤, 사실은 그 재료가 매우 값싼 나무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자라나는 가시나무로 천하게 사용되는 재료입니다.

성지순례를 하다보니 이 나무가 드믄드믄 광야에 있습니다. 참 보잘것없는 나무입니다. 열매도 없고 잎사귀도 많지 않고 광야의 비바람에 시달려 나무는 비뚤어졌고 곧은 게 없습니다. 아무 것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쓸모없는 나무가 궤짝으로 짜여졌고 그 겉은 황금으로 입혔고 하나님의 성소에 안치했습니다. 그 궤짝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모든 나무 중에 가장 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생은 싯딤나무에 불과합니다. 동물과 같은 흙덩이입니다. 흙덩이는 부서지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좋은 질항아리라 할지라도 부서지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인간의 흙덩이는 생령이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세상의 모든 영광이 들의 꽃 같은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덧입혀주시면 사람은 누구나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쓰임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는 바로 그런 사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잘 난 사람들을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이 사용합니다. 세상을 위해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자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 유능하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보다는 자기 자신의 실력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덜 나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광의 금을 덧입히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며 자신의 소견을 좇아 살아갑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영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들에게 능력과 실력과 영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싯딤으로 법궤를 만드신 하나님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초라한 존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쓸모없는 가시나무에 불과합니다. 구부러지고 쓸모없고 연약한 자들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적으로 좋은 옷을 입혔다 해도 세월은 그 옷을 낡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직분을 가졌다 해도 남들에게 칭찬을 듣는다 해도 우리의 근본은 형편없는 싯딤나무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입혀주신 그 직분의 옷 때문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찬송가에도 있지 않습니까?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오니 주 예수 힘 주사 굳세게 하소서"

우리는 안 넘어질 사람처럼 행동하지 마세요. 지나간 날 안 넘어졌던 사람처럼 행세하지 마세요. 옷에 묻은 흙을 툴툴 털었다고 해서 그 쓰라린 실패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늘 약한 존재인 줄 알고 넘어진 자들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마십시오. 지난 세월의 나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할 때 우리에게서 성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귀한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2. 가시나무는 진액으로 희생하고 황금으로 입혀졌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 좋은 나무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귀한 나무들-백향목 상수리나무, 잣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만드셨을 때는 잣나무를 사용하셨습니다. 잣나무는 매우 견고하고 곧은 나무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가장 귀한 성물(聖物)을 만들면서 귀한 나무가 아닌 아카시아 나무를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그 나무가 갖고 있는 성질 때문이 아닐까요?

 

가시나무에는 많은 진액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꺾이면서 진액을 내고 그 진액은 아라비아인들의 약품이 되었습니다.

싯딤나무는 그냥 있으면 가시에 불과합니다. 그 가시는 남을 찌르고 상처를 내고 피를 내고 고통을 줍니다. 싯딤나무가 꺾이면 그곳에서 진액이 흘러나옵니다.

 

싯딤나무는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고쳐주는 진액이 됩니다. 이제까지는 남을 아프게 괴롭게 하는 자였지만 사람의 손에 꺽일 때 그 가시가 꺾일 때 그는 무한한 아픔을 느낍니다. 그 아픔 속에서 진액이 흘러나옵니다.

그것은 곧 아픈 자, 병든 자, 상처 당한 자를 치료해주는 귀한 진액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정금으로 덮어주시고 성소 가장 안쪽에 자리잡게 하십니다.

 

싯딤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사막의 마른땅에서 자라난 싯딤나무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시켰습니다. 그분은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에게 죄의 치료제가 되셨고 영생케 하는 몰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신이 꺾여진 자, 가시가 되었던 자들, 그들이 꺾여지면서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되었고 성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 프란시스… 등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기희생을 통하여 성자가 되었습니다. 죄인이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진액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성자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자기희생이 없으면 남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찢어지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함께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고래는 바다에서 왕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래가 병이 든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병든 고래 기름에서 엠버그리스라는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기가 추출됩니다.

 

오늘 우리가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찢는 기회로 선용하십시오. 자신의 가시가 꺾여지는 영적 체험을 하십시오. 그 체험은 하나님의 다듬어 가는 손길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황금으로 우리를 덮여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욥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욥은 연단을 통하여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가시나무는 말씀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법궤를 만들라 하셨습니다. 법궤 속에 시내 산에서 받은 돌비를 넣었습니다. 십계명이 새겨져 있는 돌비는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신 것입니다.

싯딤나무로 만들어진 사과궤짝과 같은 나무 상자, 그러나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물 때문에 그는 참으로 귀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돌비 자체는 사라질 것이고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의 말씀은 영원히 남아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할 것이며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며 우리의 영혼을 밝혀줄 것입니다.

그 귀한 말씀이 담겨져 있는 궤이기에 싯딤나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가장 귀한 상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가장 연약한 육체 속에 넣으셔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가장 연약한 그릇으로 세상을 살다 가셨습니다. 가난했고 부모의 후광도 입지 못했고 남들의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늘상 버림받았고 배척 당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속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항상 만족하셨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분은 가시나무처럼 볼품없었지만 하나님은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의 자리라는 영광의 금으로 입혀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만족하지 못한 육신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육체가 너무 힘들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가정환경이 너무 힘들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재주가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의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무엇이 담겨있느냐에 있습니다. 그릇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무리 보기 좋은 그릇이라 해도 그곳에 독약이 들어있으면 내다버릴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외모가 아주 못생긴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굉장히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랍비의 명성을 듣고 로마 황제의 황제가 만나기를 요청했습니다. 만나고 보니 못생겨도 유분수지 너무 못생겼어요. 왕녀가 혼자 소리로 탄식했습니다.

 

"뛰어난 총명이 너무 못생긴 그릇에 담겼구나!"

랍비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왕궁 안에 술이 있습니까?"

"있지요"

"어떤 그릇에 들어있습니까?"

"보통 항아리든가 술병 같은 그릇에 들어있어요"

"그게 말이나 되는가? 당장 금 그릇에 담으시오"

 

금 그릇에 담았더니 술맛이 완전히 가셔버렸습니다. 황제가 노발대발했습니다. 황녀가 랍비에게 항의했습니다.

 

"왜 이런 짓을 시켰는가?"

"나는 단지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싸구려 항아리에 넣어두는 쪽이 더 좋을 경우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을 뿐이오."

 

아름다운 얼굴과 멋있는 육체 속에만 좋은 게 담기는 것은 아닙니다. 못생긴 그릇 속에 더 아름다운 영혼이 숨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이 내면을 보는 눈들이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투시카메라가 있답니다. 속을 다 들여다본다는 거예요. 그러니 투시카메라가 찍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옷이 나왔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내면을 들여다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겉이 아닌 내면의 참 가치를 볼 수 있는 눈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썩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속에 있습니다. 법궤가 성막의 지성소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자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금으로 영광으로 옷 입혀주실 것입니다.

 

결론

법궤의 재료는 싯딤나무,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아카시아, 들판에 서 있는 아카시아, 하나님은 아카시아를 다듬고 정금으로 입혀서 가장 소중한 장소에 보관시켰습니다.

우리는 쓸모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실력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교회의 이 모양 저 모양의 자리에, 가장 귀한 장소에 세워주셨습니다. 웬 영광이요 웬 사랑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족 여러분, 지금은 거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싯딤나무처럼 외롭고 초라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띄고 다듬고, 그래서 좋은 법궤가 되어 지성소에 보관될 그 영광의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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