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끼 탕자와 집토끼 탕자
누가복음 15장 11~14절
서론
난센스 퀴즈로 시작합니다. 산토끼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IQ 30은 산토끼 반대말을 “끼토산”, IQ 60은 산토끼의 반대를 “집토끼”, IQ 80은 “죽은 토끼”, IQ 100은 산토끼의 반대말을 바다토끼, IQ 150은 산토끼, 사왔다, 의 반대말로 판토끼, IQ 200이 생각하는 산(성)토끼의 반대말은? 알카리토끼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아이큐 테스트를 합니다. 집토끼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집을 나가 산으로 갔으니 산토끼입니다. 오늘 설교는 집 떠난 둘째아들 산토끼와 집지키는 큰아들 집토끼이야기입니다.
1. 둘째아들 - 불신앙 속에 신앙
창조주 하나님을 공격하는 사상은 계속 진화해왔습니다. 만물에 신의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불가지론-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무신론-하나님을 죽이겠다는 공산주의-무신론이 진화되어 하나님은 죽었다는 사신(死神)철학까지 왔습니다. 신은 죽었다, 는 사신신학에서 진화된 것이 ‘만들어진 신’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신화처럼 고안된 종교 창작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상들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할까요? 영적으로 철이 들지 않아서? 영혼이 화인(火印) 맞아서? 옳은 말입니다. 죄성으로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는 영적 DNA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내면에는 이런 무신론사상 사신론사상 불신사상이 박혀있습니다. 이런 사상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 인본주의.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신을 믿으면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대표하는 인물이 본문의 둘째아들입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설정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구속하고 내 자유를 속박한다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기주관이 뚜렷합니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좋으면 남들이 뭐래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보건말건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충고도 듣지 않습니다. 당신 뭔데 그래? 당신이나 나나 누가 옳은데? 누가 틀린데? 그러다보니 사회원로들이 쓴 소리를 못합니다. 무명 인터넷 논객의 선동 한마디는 일파만파 대한민국을 뒤집어놓는데 원로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훈계를 하면 벌 떼같이 달려들어 공격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바른 말을 했다가 곤욕을 치렀습니다. 어른이 없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집나간 산토끼들, 그게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 무책임한 자기주장. 현대인들은 자기주장을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둘째아들은 재산을 요구합니다. 12절,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소서…. 둘째아들의 요구가 아주 경우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21:17에 나오는 재산상속의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율법의 재산상속법은 장자에게 2/3를,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줄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에게 결함이 있습니다. 둘째아들 요구는 정당한 것 같은데 재산상속은 아버지 임종(臨終)이 임박할 때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 관습입니다. 둘째아들은 자기입장에서만 자기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이기주의 인본주의입니다.
㈂ 현대인들은 자기 기준대로 행동합니다. 그는 13절,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성공하겠다, 견문을 배우겠다, 그게 아닙니다. 그냥 내 마음대로 행동하겠다는 것입니다.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곳, 부모의 신앙강요도 없는 곳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며 살겠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기세계에서 신을 몰아내고 창작품이라고 비하합니다.
㈃ 현대인들의 익명성입니다. 작은 아들은 먼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아는 이가 없습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동생이라는 신분이 없기에 마음대로 행동하고 살아갑니다. 전혀 자기명예에 대한 책임이나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막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터넷 댓글들이 이루어지고 이들은 대한민국의 통합을 해치는 공적 1호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집토끼입니다. 집을 떠난 토끼가 행복했을까요? 자기 몫을 주장했고 펑펑 쓰면서 성공했을까요? 집을 떠나면 무슨 고생? 그래요, 개고생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둘째아들은 13절, 허랑방탕했습니다. 거친 삶입니다. 거칠게 살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14절, 비로소 궁핍한지라, 인생의 공허함입니다.
16절, 돼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돼지처럼 사는 것입니다. 돼지는 생전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 없습니다. 주둥이로 종일 두엄이나 헤치고 땅이나 팝니다. 그러고 도살장으로 끌려갑니다.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지도 모릅니다, 평생을 땅을 파헤치고 먹이는 주면 먹고 배부르면 눕고⋯ 그러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이것이 교회 밖에 있는 현대인의 공허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생각으로 거칠게 살았던 인생의 마지막,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의 말로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그리워하고 어린 시절의 교회 추억을 기억하며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오히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너무 힘들어서, 허전함에 빠져서 문득 찬양대의 찬양을 그리워합니다. 설교가 듣고 싶어집니다. 목사가 보고 싶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불신앙 속의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아들은 눈에 보이게 자기 위치를 떠났습니다. 그 아들은 육신적으로는 아버지의 마음을 떠났지만 마음으로는 아버지와 집을 그리워합니다. 아버지… 17절 이하로만 아버지라는 단어는 11번이나 나옵니다.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속에는 형도 있고 종들도 있고 아버지에 관계된 모든 것이 그리움이고 사랑스러움입니다, 집을 나가 개고생을 해보니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록 육체적인 위치는 잘못되었지만 마음의 위치는 제대로 제 자리에 들어선 것입니다. 불신앙의 신앙입니다!
2. 큰아들-신앙인의 불신앙
둘째아들이 출가한 산토끼라면 큰아들은 집토끼입니다. 집을 지키는 큰아들은 얼마나 기특합니까? 아버지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버지가 재산의 몫을 떼어줄 때까지 고분고분 기다립니다. 동생이 재산을 들고 집을 떠났지만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동생이 집을 떠나 산토끼가 되어 허랑방탕할 때 큰아들은 대놓고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 가출하고 싶고 동생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집안에 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희망을 품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랫동안 아버지 집에 있었으니 그러려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탕하게 살 자신이 없어 그냥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관심입니다. 집에는 있되 집이 어떻게 되는지, 아버지가 동생 때문에 잠을 이루는지 마는지…‧ 무관심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아들이 돌아오던 그 날도 보세요! 25절, 맡아들은 밭에 있다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도 감사도 동생안부에 대한 걱정도 없이 그냥 무심하게 일이나 합니다. 아버지와 교제가 없습니다. 종일 일을 하다 집에 와보니 집에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26절, ‘무슨 일인가 물은대’- 계속해서 물었다는 뜻입니다. 조사, 심문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여기서 의문점은 축하연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축하연이 빨리 진행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맏아들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疎遠)하였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 동생에 대한 적개심이 보입니다.
동생이 돌아와 환영잔치가 열렸다는 말에 뚜껑열립니다. ‘저가 노하여’. '콧구멍을 벌름거리다'는 뜻입니다. 일시적으로 격양(激昻)이 아니라 쌓였던 분노와 노여움이 폭발한 것입니다.
형은 28절, 축하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거절합니다. 동생의 돌아옴을 거부하는 행위이자 아버지에 대한 거역입니다. 그것이 큰아들의 숨겨진 불신이자 불효입니다. 겉으로는 모범생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겉과 속은 달랐습니다. 가출하지 않는 것은 3분의 2의 몫이라는 재산 때문입니다. 속에는 분노로 가득 찹니다. 자기도 사실은 아버지를 사랑해서있는 것은 아닌데 재산을 지키려고 있는 것인데, 재산을 탕진한 동생에게 화를 내는 이중적인 모습이 큰아들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라는 말을 29, 30에서 3번 합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그리움과 사랑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공격적이고 섭섭하고 원망하고 항의하는 모습입니다, 나갔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20절, 아버지가 달려 나가 아들이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회개와 용서와 눈물의 관계, 이어서 풍악과 춤을 추는 페스티벌입니다.
정작 집에 있고 큰 허물이 없는 큰아들은 28절, 아들은 들어가려 하지 않고 아버지는 끌어당기고 옥신각신하는 콩가루집안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자칭 의인이라고 하나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람과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나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하는 자"가 있다합니다. 이어루터는 "우리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고 했습니다.
두 수도사가 순례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강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사정합니다. 순례행진의 수도사들은 여인을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고민하던 한 수도사가 여인을 업었습니다. 다른 수도사가 너무 부럽고 질투가 났습니다. 내가 업어줘야 하는데… 찬스를 놓친 것입니다. 자꾸 묻습니다. 느낌이 어땠냐고… 천사를 업은 것 같은 느낌이더냐고… 그리고 비난 합니다. 순례행진 중에 여인을 가까이 했다고! 그때 수도사는 대답합니다.
"나는 이미 여인을 등에서 내려놓았는데 너는 왜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악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드러난 행동(惡)만을 문제 삼으며 그런 사람들일 수록 의인인 체 합니다. 이것이 큰아들의 잘못입니다. 집을 나간 산토끼동생이 개고생을 했다면 집에 있는 집토끼 큰아들은 헛고생을 한 것입니다. 개고생을 한 것이나 헛고생을 한 것이나 인생을 허비하고 낭비한 불효, 불신앙은 마찬가지입니다.
큰아들이 더 불쌍합니다. 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주일을 지키느라 교회 봉사하랴… 이것저것 가리며 살아왔는데 큰아들 모양새가 얼마나 우습게 되었습니까? 이해심도 없고 아버지 마음도 몰라주고… 아버지 집을 지킨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큰아들에게서 집토끼들인 우리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킵니다. 주일을 성수하고 주초(酒草)를 하지 않고 예배하며 헌금합니다. 외적으로는 완벽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는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없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는 헤아림이 없습니다.
탕자들, 죄인들의 과거를 용납하지 않는 곳이 교회입니다. 지난날의 잘잘못을 묻어둘 수도 있는데, 사랑의 관대함으로 페스티벌에 참여할 수도 있는데 큰아들처럼 아버지의 살림을 탕진해 버린 동생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 화를 냅니다. 말씀과 행동이 함께 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감동이 없고⋯ 감사함이 없고⋯ 불평하고 질투하고 반대합니다.
교회 안의 불신앙들입니다. 위선은 아닙니다. 훈련이 안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집을 떠난 적이 없다고, 교회를 떠난 적이 없다고 자위합니다. 이것을 덜어내고 없애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아들답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동생을 용납하는 이해능력 수용능력이 높게 되고 아버지 기쁨에 동참하는 효자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3. 두 아들-모두 사랑한다!
본문 15장, 그 유명한 탕자 비유가 왜 나왔는가, 1절 이하가 배경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죄인들을 가리지 않고 식사해 오던 중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듣는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립니다. 수군거림. 이게 안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군거림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 받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비유를 든 것입니다. 이방인과 세리, 창기, 여인들은 둘째아들로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기뻐서 식사하며 천국의 새가족을 환영한 것입니다. 불신앙 중의 신앙입니다.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큰아들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며 하루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감사나 사랑은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눈에 들지 않으면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집을 떠났던 죄인들-이방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의 심보입니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와의 관계설정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재산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누구를 더 많이 사랑하느냐, 재어보고 따져보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 고마움의 관계, 섬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둘째아들은 아버지 구속을 받지 않는 삶을,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 탕자비유에서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아버지입니다. 두 아들은 조연(助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허물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보이려는 것입니다.
탕자를 돌아오게 한 것은 누구입니까? 아버지입니다. 20절,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알아보았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20절, ‘측은히 여겨’라고 표현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 아들이 죄악에서도 돌아올 수 있었던 동기는 측은히 여겨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공자는 “모든 종교는 측은지심에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도랑에 빠진 아이를 보고 ‘불쌍하다 구해주어야지’ 해서 입은 옷 그대로 도랑물에 들어가 구해내는 마음, 이것이 측은지심입니다. 측은지심은 하늘의 마음이고 종교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측은하신 마음’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측은지심을 말합니다(렘 21:20) 예레미야가 말하는 “축은”은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 단장(斷腸)의 고통입니다. 단장의 고통은 창자가 꼬이는 아픔으로 칼로 아랫배를 도려내는 아픔입니다.
둘째아들이 거역하고 방탕할 때도 걱정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측은지심입니다. 어디서 잘 지내고 있나? 밥은 먹고 있나? 개고생하지 말고 빨리 돌아 오거라, 아들아⋯ 집을 떠난 아들을 밤에도 낮에도 불쌍히 여기며 기다리는 마음이 아버지는 창자가 끊어집니다.
큰아들이 동생의 페스티벌에 참석하지 않으려 할 때도 아버지의 마음은 측은지심입니다. 큰아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큰애가 섭섭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달랩니다. 31절, 내 것이 다 네 것이잖니? 네 수고를 내가 왜 모르겠니? 달랩니다. 이 마음 역시 측은지심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목사를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집토끼입니까? 아니면 집을 나간 산토끼입니까? 어느 쪽에 기울어져 있나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사랑하는 이들 가운데는 없나요? 우리 믿음이 형식적인 것은 아닌가요? 사랑은 식어버린 상태에서 하나님 집에 머물고 있는 큰아들은 아닌가요? 그러면서 눈에 거슬리는 둘째아들의 행태에 분노하는 것은 아닌가요? 아버지 집을 떠난 아들보다 아버지의 집을 지킨 큰아들은 얼마나 행운입니까? 그것을 더 아름답게 사용하고 기쁨으로 섬길 수는 없는가요? 하늘아버지는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산토끼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합니다. 집토끼들은 아버지의 품으로 가야 합니다. 그럴 때 아버지의 유업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형제들의 우정과 성공의 삶이 됩니다. 이런 삶을 기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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