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넘은 사람들의 성공스토리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서론
우리교회 <홈피>를 보려고 인터넷을 열었더니, “김사랑 드라마 인기에 과거사진 들통났네!”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미스코리아 출신 김사랑은 우리교회 권사님들이 잘 아는 집사님 딸이어서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별게 아니에요. 김사랑의 빼어난 S라인 몸매, 완벽한 외모와는 달리 지금의 얼굴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과거사진에 “믿을 수 없다” “성형을 했다”는 글들입니다. 한마디로 얼굴을 뜯어고쳤다는 것이지요.
여성들이 성형을 한 것이 뭐가 그리 흥미거리가 되는지… 교양을 위해 독서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쌓는 여성들처럼, 또 다른 유형의 여성들은 자기 얼굴을 다듬고… 다듬어서 안 되면 성형을 좀 했기로서니 뭐 그리 대단한 잘못입니까? 자기 얼굴에 만족하지 못하고 살 바에는 좀 다듬어서 자신감 넘치게 살면 좋지요! 성형 하는데 보태준 것도 없이 왜 그리 남을 헐뜯는지… 오죽했으면 성형미녀의 삶을 그린, “미녀는 괴로워”라는 영화가 나왔겠습니까?
얼굴은 세월이 지나면서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손 좀 본 게 성형입니다. 성형도 어떻게 보면 자신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기외모에 만족할 수 없으니까 얼굴에 칼을 대는 것입니다. 용기입니다. 성형미인은 용기를 가진 여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처럼 성공한 사람들에게서는, “넘어서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인종과 국경을 넘어서라… 게으름을 넘어서라… 장애물을 넘어서라… 대학을 넘어서라… 한계를 넘어서라! 케이블 티브이는 어떨까요? 지상파를 넘어서라! 글로벌세대에게는 한국을 넘어서라!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 자신을 넘어서야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1. 성경은 자기를 넘은 사람들의 기록부입니다.
㈀ 기드온은 낮은 자존감으로 비리비리한 사람입니다. 오죽했으면 미디안의 습격이 무서워서 밀 타작을 포도주 틀에서 몰래 하고 있습니까? 비리비리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는 큰 용사라고 합니다(삿 6:12). 방안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노는 어른에게 너는 앞으로 세계적인 사이클 선수가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낮은 자아상의 기드온은 믿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현상을 통해 아멘! 하고 받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강국을 물리치는 용사가 됩니다. 농사군 기드온이 용사 기드온이 될 줄은 자기도 몰랐습니다. 기드온은 패배적인 자기자아상을 넘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 모세. 40년 처가살이를 하면서 양을 치던 목자입니다. 광야에서 무명으로 지내기를 40, 이제 나이가 80입니다. 목자로 생을 마감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라는 것입니다. 400년 동안 애급에서 살던 200만 명을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두려웠고 거절도 했지만 믿음으로 아멘! 하며 순종했습니다. 모세는 실패자라는 자기를 넘은 사람이 됩니다.
㈂ 베드로는 갈릴리호수의 자갈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아멘! 했습니다. 베드로도 자기가 자기를 넘은 반석(磐石)이 됩니다.
세 사람의 특징은 “나”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나”는 어떤 나입니까? 낮은 자존감의 “나”왜곡된 자아상을 가진 “나”입니다. 이랬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힘으로 자기의 신분, 실력, 외모, 나이, 직업을 뛰어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넘기를 기대하십니다. 대학을 뛰어넘고 집안을 뛰어넘고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자신의 성품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바울은 무엇을 뛰어넘습니까?
바울은 10절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1인칭이 둘이 나옵니다. “내”가 “나”된 것은…. 앞의 “내”는 누구이고 뒤의 “나”는 누구입니까? 같은 바울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두 유형의 바울입니다.
“내가 나 된 것”-앞에 “내”는 예수 믿기 전 “나” 바울, 바리새인 “나” 바울, 교만한 “나” 바울입니다. 그랬던 내가 “나 된 것은”-제대로 된 나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나입니다. 겸손한 나, 순종하는 나, 능력을 받고 성령 충만한 나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내”를 뛰어넘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 바울이 된 것입니다.
부활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내”가 이제는 그 부활믿음으로 사는 부활전도사 “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바울은 절대로 자기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바울은 자기를 뛰어넘고 세기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뛰어넘어야 합니다! 장애물도 뛰어넘고 신분도 뛰어넘고 신분의 벽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자신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박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언제나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육신 “내”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영으로서의 “나”가 나옵니다.
㈀ 바울은 자력(自力) 구원관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바울은 율법을 통한 구원관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행위를 통한 구원관, 열심히 노력하며 수고하면 그 행위가 조건이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관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종교적인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인간의 죄를 알았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선(善)이 거하지 않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알았습니다. 선하게 살려는 한쪽에서는 악하게 살고자 하는 본성도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의로움의 문제를 전적으로 위탁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 의로움을 자기행위에 두지 않았습니다. 자기행위로 구원 받고 의로움을 얻으려고 했던 “내”에서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나”로 변화됩니다. 그는 자기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 바울은 신분을 뛰어넘습니다. 과거의 “나” 바울은 정통파 유대인입니다.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이방인은 유대인들이 살아갈 천국의 아랫목을 데워줄 땔감으로 창조했다고 여길 정도로 선민의식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은 “자기 의(義)”입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을 비판하고 무시했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입니다.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무식한 자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들을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야만인으로 취급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로마시민권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 보증수표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예수 믿기 전의 “나”입니다. 대단한 사람으로 자처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의 “나 된” 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이 모든 특권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똥”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나-자기의 특권 신분을 뛰어넘었습니다.
㈂ 바울은 자기성품을 뛰어넘습니다. 바울은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입니다. 이런 원칙론 때문에 마가의 일로 바나바와 다툼이 벌어집니다. 마가가 1차 전도여행에서 포기하고 2차에 따라나서려니까 반대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성품이 온화하고 마가는 생질입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서로 심히 크게” 다투었다고 합니다(행 15:39). 얼마나 다투었으면 갈라설 정도입니까? 나중에 바울이 이 일을 후회합니다. 그래서 순교를 목전에 두고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 저가 나의 일에 크게 유익하니라”(딤후 3:11)고 합니다.
바울은 원칙론에서… 엄격주의에서… 온화하고 용서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는 것은 그가 편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이 모두를 종합해서 “내가 나 된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행위의 구원관을 뛰어넘었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었다! 성품의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내”가 오늘의 “나”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고백입니다!
믿음은 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오랫동안 “나”에게 고정된 뭔가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 고정된 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왜 필요합니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를 뛰어넘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뛰어넘을 대상을 밖에서 찾습니다. 이것이 경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자기의 가장 큰 적이 자기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최고의 상대는 “내”입니다. “내”를 뛰어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제대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어떻게 하면 나를 넘을 수 있을까요?
아마존 강(江)에 사는 피라니아 물고기는 이빨이 얼마나 강하고 날카로운지, 사람이나 동물을 뼈째 잡아먹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군가 피라니아를 잡아 수조에 넣고 가운데 유리판을 세우는 실험을 했습니다. 피라니아는 수족 속을 헤엄치다 유리판에 박치기를 합니다. 수십 수백 번 반복하면, 나중에는 유리판이 없어져도 피라니아가 그 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유리판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한계입니다. 우리는 몇 번 시도하다가 안 되면 "안 된다!" 믿어버립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더 이상 시도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 이상을 넘을 수 없어… 그렇게 낙심하고 맙니다. “나”라는 한계를 넘어야 합니다.
㈀ 반복된 훈련으로 넘을 수 있습니다. 훈련은 수없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훈련은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고 내가 나를 이길 때 넘어서는 놀라운 사건이 됩니다.
이스라엘 성전시대 누구는 다섯 손가락 사이에 펜 4개를 끼워 각각 다른 글씨를 쓸 수 있었답니다. 놀랍게도 한꺼번에 네 글자씩 써나가는 것입니다. 훈련의 힘입니다.
제주도에 여행 갔다가 중국인들의 오토바이 서커스를 구경했습니다. 작은 통속에서 네 명의 선수들이 무한질주를 합니다. 대각선으로, 원으로, 눈이 핑핑 돌 정도입니다. 그들은 훈련으로 자기를 넘어선 것입니다.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눅 22:39). 그 힘으로 자기를 넘어서서 십자가를 질 수가 있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을 뛰어 넘어야 함을 알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피 터지게 자신과 싸워서 변화되는 예수 믿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구원 이후”에서 내가 나와 싸워 나를 이겨야 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런 야성(野性)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 성령으로 넘을 수 있습니다(행 1:8).
성령은 능력의 영입니다. 성령께 의지하면 나는 나를 넘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나를 주장하면서 힘을 공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너무 강하기에 내 성질을 변화시켜 버립니다. 내 기질을 변화시켜 버립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의 삶이 변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므로”M 그게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때 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얌전한 사람이 강력하고 카리스마를 보이게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내심을 보일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사명감으로 넘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계복음화라는 사명을 위해서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고 결연한 의지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굽니까? 죽기로 달려드는 사람입니다. 부부싸움에서 왜 아내가 항상 이깁니까? 죽기살기로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집니다. 남자들은 부부싸움을 죽기살기의 전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강 하고 끝나려 합니다. 이기려는 사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부부싸움에 목숨을 겁니다. 그것은 여성의 자존심 문제요 시댁 식구들에게서 친정을 지키려는 결연한 전쟁입니다. 그래서 죽기살기로 대듭니다. 그러니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여성사명감입니다.
우리가 일에 대한 사명감으로 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이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 이런 마음이 사명감이 되고 이런 사명감이 우리를 넘어서게 만듭니다.
결론
이한상 전(前) 삼풍백화점 사장이 참사 16년 만에 첫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삼풍백화점 참사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지상 5층, 지하 4층의 삼풍백화점 건물이 붕괴된 사고로 501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다쳤으며 6명이 실종됐습니다. 백화점 이한상 사장(당시 52세)은 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생활을 했습니다.
16년이 지난 지금, 그는 몽골 선교사로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고 직후에는 엄청난 충격으로 폐인이 됩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21장 15절 말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물음은 그의 심장을 때렸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던 모든 게 없어진 뒤 하나님은 제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한 말은 “왜 나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신앙심으로 평정을 회복하고 출소한 뒤 아는 선교사를 만나러 몽골에 갔다가 선교사의 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는 인터뷰 내내 웃음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사고로 상처받은 분들을 생각하면 웃을 수 없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니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도 아니기에 무표정이 된 사람, 하지만 믿음으로 비극적 생애를 넘어선 사람이 됩니다.
그래요!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성공스토리는 어떤 내용입니까? 자신을 넘어선 이야기입니다. 장애를 넘어선 이야기, 신분을 넘어선 이야기, 학벌을 넘어선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은 그 어떤 스토리보다 감동적입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넘어선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으로 살다갔습니다. 만삭되지 못해서 난 것처럼 사도들 중에서 꼴찌로 자처하는 사람, 부활신앙을 전하는 사도의 반열에 설 수 있는 오늘의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넘어선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는 “가장 큰 행복은 한 해의 마지막에서 지난해의 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년 초의 나와 연말의 나를 비교해보고 “나의 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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