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기간 중 강제 예배중지명령 앞에서 했던 설교입니다.]
내성적인 이삭은 이류(二流)믿음이 아니다!
창세기 24장 63~67절
서론
교회 여름방학(?) 잘 지내고 있습니까? 살다보니 별 말을 다 만들어 봅니다. 교회에 몇 달 나오지 못한 분들에게 “교회 방학했나요?” 장기결석자들에게는 “교회 휴학하셨나요?” 농담처럼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담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현실로 나타날지 누가 알았겠어요?
우리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예배중지라는 행정명령을 당해 2주 동안 예배방학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방역하고 모이는 곳이 없건만 예배 중지명령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서울지방법원과 수원지방법원이 대면예배 금지명령이 종교 예배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조건부로 교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조건부라는 것은, 20명 미만 참석허용입니다.
어떻든 앞으로 두 주 방학이 끝나고, 아니지요! 두 주일이 끝나도 현재의 확산세로 보면 연장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코로나 방학이 계속되면 성도님들의 믿음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겁니다. 우선 ‘가나안교인’이 될 거예요. 교회 졸업은 아니지만 휴학생입니다. 교회로 돌아갈 생각은 거의 없는 분들입니다. ‘궐석교인’도 될 거예요. 교회 등록교인으로 남아있어 교회와 연결은 되지만 예배 출석은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코로나방학이 끝나 돌아오지만 열정은 떼어두고 오는 ‘김빠진교인’이 됩니다. 열심으로 예배하고 봉사하고 기도하던 열정은 많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치 부부이지만 데면데면 살아가는 그런 교회생활입니다.
어떤 이들은 두 주간 방학이 있든 코로나가 장기화가 되던 교회가 정상화가 되면 다시 변함없는 충성과 열심으로 섬길 것입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교회의 소중성과 성도간 교제의 필요성을 알고 더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발 이런 교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코로나 이후에도 이전 교회, 이전 믿음으로 돌아가려면 교회 방학(?) 기간에 자신을 성찰해보고 생각의 활동량이 많아야 합니다. 생각도 다양합니다. 명상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요, 감상(感傷)은 하찮은 일에도 쓸쓸하고 슬퍼져서 마음이 상함입니다. 공상(空想)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보는 생각. 망상(妄想)은 헛된 생각입니다. 무념무상은 생각자체를 없애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묵상입니다. 묵상(默想)은, ‘마음속으로 묵묵히 기도함’, ‘정신을 모아 잠잠히 그리고 깊이 생각함’입니다. 묵상은 예배나 영적 재충전, 영혼의 만족과 즐거움, 명철과 형통함,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매우 유익한 신앙행위입니다. 성경을 통해 모든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비워내고 내적 관심을 온통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합니다. 이성(理性)과 상황을 말씀 안에 가두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시간을 드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열심은 있는데 묵상이 없습니다. 묵상이 없는 열심은 하나님께서 활동하는 공간은 작고 내 활동 공간은 큽니다. 그러다보니 상황에 너무 휘둘리어 믿음의 길에서 허둥대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묵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깊은 묵상의 믿음으로 신앙체질을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이삭, 위대한 아버지 그늘에 가려지다
성경인물 중 묵상에 강한 사람이 이삭입니다. 그는 상당히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진취적인 족장감으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화이트(R.E.O. White)는 이삭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선구자적 인생행로와 하나님과 나누었던 교제를 비교할 때 이삭의 삶은 보다 덜 종교적이다. 그의 삶은 두려움, 묵묵한 순종, 그리고 위대한 사건에 대한 기억 등으로 뒤섞인, 간접적인 동시에 이류(二流)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류믿음이라는 말을 들을만큼 이삭은 인생이 걸린 자기 문제에서조차 주도적이지 못합니다.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쳐질 때 수동적입니다(창22장).
결혼 문제에서도 주도적인 자세가 아닙니다(창24장). 주인공이 한편으로 비켜서 있습니다.
이삭이 왜 이렇게 매사에 수동적이었을까요? 오스왈드 샌더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삭은, 위대한 아버지와 정도(正道)를 벗어나긴 했지만 빼어난 아들 야곱 때문에 왜소화된 불운한 사람이다. 그러한 불행으로 인해 이삭의 성격은 상처를 입었다. 이삭은 지도자라기보다는 추종자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지도하에 40년을 살았기 때문에 성숙한 개인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완전히 독립된 인격을 개발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위대하였다는 바로 그 요인 때문에 이삭의 성장은 부진하였고 조금은 개성이 없는 성격이 되었다.”
샌더스의 평가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이삭입니다. 아버지가 주도력이 너무 강하다 보니 착한 아들에게는 추종자 기질, 의존적인 기질이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면서도 자기 개성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이삭의 수동적인 성격 형성은 이름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삭은 ‘기쁨, 웃음’이라는 뜻입니다(창21:3, 6). 늘 부모에게 기쁨이 되려다 보니 정작 자신의 캐릭터(개성)는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아버지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고 추정해 봅니다.
이삭, 묵상으로 2인자의 슬픔을 견디다
이삭의 주변은 모두 강한 사람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진취적이고 기상(氣像)이 넘치는 모험가입니다. 시날 왕 아므라벨 동맹군의 포로된 롯을 구출하기 위해 318명의 사병과 출정하여 승리했다는 것은 대단한 위인입니다.
부인 리브가는 기(氣)가 센 여인입니다. 자기 주도성이 아주 강합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천만인의 어머니’(창24:60)가 되기 위해서는 눈먼 남편을 속이고 장남과 차남의 순서를 바꿔치기도 하는 맹렬한 여인입니다. 이런 엄처시하(嚴妻侍下)에서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지요.
아들 야곱은 대찬 남자로 사막에서도 혼자 살아남을 만큼 경쟁력이 강합니다. 그만큼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아버지의 연약함을 이용합니다. 이런 아들의 속임수에 안 넘어갈 수 있을까요?
이런 구성원들 사이에서 내성적인 성격 이삭이 견디어 낼 수 있었던 힘은 묵상입니다. 자신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부모의 기쁨이 되기 위해 기본적인 권리조차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표현 못함’이 우울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자기의 강력한 세계를 구축해 갑니다.
63절,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성경에 나오는 묵상의 시간은 정오(왕상 18:27), 저물 때(창 24:63), 밤중(시 119:148)이나 밤낮으로(시 1:2), 종일(시 119:27)… 시간에 구애됨이 없습니다. 이삭은 남들에게는 없는 묵상의 은사가 있습니다. 환경이 묵상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보다 어머니 사라의 기질을 이어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에 비해 동적(動的)이 아니라 정적(靜的)입니다. 어머니 사라는 남편이 제 부인이 아니라 누이라고 발뺌할 때도 수동적으로 처신했던 여인입니다. 앞날에 대해 보장받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남편을 신뢰함에서 나온 순종심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처럼 주도적으로 무엇을 쟁취하기 보다는 어머니를 닮아 온유함으로 한없이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그의 강점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묵상의 은사는 ‘인내’와 ‘기다림’으로 나타납니다. 이건 목적을 이루는데 큰 자산입니다. 그냥 말수가 적고 잘 참고 기다린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반드시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삭은 그런 사람입니다.
이삭, 묵상으로 최상의 것을 얻다
이삭은 40세, 제 앞가림은 해야 하는 나이입니다. 아버지가 충직한 종에게 신붓감을 찾아오라는 미션을 줄 때 그건 자기 문제이기에 본인이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요구 대신에 묵상의 길을 택합니다. 모친 사후(死後), 고요한 저녁 무렵 들판에 나가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나 봅니다. 어머니가 떠나고 여주인이 공백 상황이고 이 공백을 메꾸려고 아저씨가 자기 신붓감을 구하려 길을 떠난 것을 알았기에 더 깊이 묵상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이삭이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최고, 최상의 것을 주셨습니다. 수동적인 그에게 활달한 여성 리브가로 내조하게 주신 것입니다. 내가 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일하도록 하시는 것, 그것이 묵상의 열매입니다. 아내 리브가와 차남 야곱에게 속임 당했을 때, 장남 에서가 제 몫을 잃고 대성통곡할 때, 에서가 원주민 여인들과 제멋대로 결혼해서 반항심을 보일 때, 야곱과 긴 생이별에도 이삭이 견디고 그의 삶이 만족스럽게 된 것은 묵상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이삭은 묵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영향력 있는 생애로 끌어올렸습니다. 동족을 살리고 씨족(氏族)을 큰 민족으로 일으킨 요셉 총리의 멘토는 아브라함도 야곱도 아니고 할아버지 이삭입니다. 이삭의 인내와 기다림이 총리 요셉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또한 모리아산에서의 순종과 우물을 순순히 원주민들에 넘겨주고 화평을 구하는 온유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1세대 신앙인, 이삭과 같은 2세대 신앙인일 수도 있습니다. 1세대 신앙인은 자기 주도적이고 2세대 모태신앙은 부모에게 의존적입니다. 각자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삭은 자신의 기질과 주변 환경으로 항상 2인자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묵상과 묵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고의 것을 얻게 됩니다. 묵상기도는 이삭의 힘이었습니다. 아버지 사후에 한 해에 백배의 결실을 보는 당당한 거부, 1류가 되었습니다(창26:12, 13). 조용한 리더십, 묵상기도의 힘이 만들어 낸 성공입니다. 그래서 묵상기도는 힘이 셉니다!
조용한 책벌레 소녀였던 수전 케인은 프린스턴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기업과 대학에서 협상기법을 가르치는 변호사가 됩니다. 하지만 내성적인 자신의 성격이 직업에 맞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그녀는 내성적 기질을 탓하는 경향이 궁금했습니다.
‘왜 세상은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하고, 내향적인 사람은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원래의 성격을 감추려 하는 걸까?’
케인은 자신과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내향성이 얼마나 위대한 기질인지 스스로 증명해보기로 했습니다. 성공이 보장되는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세계를 떠나 은근한 끈기와 탐구로 7년 만에 ‘콰이어트’라는 책을 내놓습니다. ‘콰이어트’는 (소리가 거의 없이) ‘조용한’ ‘고요’ 등을 뜻합니다. 내용은, 세상은 행동하는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내성적인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제가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케인은 내성적 인물로, 아인슈타인 간디 고흐…등을 듭니다. 그들은 내성적이었기에 위대한 과학자, 정치가, 화가가 된 것입니다. 특히 아인슈타인은 “외로운 사람이 되어라. 의심하고 진리를 탐구할 시간이 주어지리니 거룩한 호기심을 가지라. 당신의 삶을 살만하게 만들라” 권합니다.
수전 케인은 이후 ‘세계 지식의 축제’인 TED 콘퍼런스 개막식에서 대미를 장식할 강연을 했는데, 1,500여 청중의 기립 박수뿐 아니라, TED의 여러 강연 중 가장 짧은 기간에 조회 수 100만을 돌파한 기록을 세우며, 전 세계 네티즌들의 찬사를 받습니다.
케인은 이처럼 내성적인 자신의 성공을 들어 ‘자신감이 없는가? 소심한가? 순종적인가? 절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에 묵상하면서 생각의 힘을 키우고 자신을 계발해 낸다면 세상을 조용하게 움직이는 진짜 성공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삭, 이류(二流) 믿음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던 사람! 내성적 성격 때문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기준으로 보면 흥부의 전형에 가깝습니다. 사윗감으로는 착하고 괜찮지만, 신랑감으로는 현대 여성들에게 인기남(男)은 아닙니다. 요즘은 착한 콩쥐보다 영악한 팥쥐가, ‘착한 남자’ 흥부보다는 ‘나쁜 남자’ 놀부 성향을 선호하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삭이 이류믿음 이류인생이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삭은 매사에 수동적으로 보이고 자신감이 없는 남자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묵상이라는 숨겨진 영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영성으로는 그는 한 해에 100배의 이윤을 남기는 성공CEO가 된 것입니다. 이삭은 결코 이류믿음이 아닙니다! 묵상으로 그는 1류가 됩니다.
우리도 코로나 아둘람굴에서 묵상이 있으면 1류(一流)믿음 다윗이 되는 것이요 묵상이 없으면 3류(三流) 믿음 사울이 되는 것입니다. 3류(三流)로 시작했지만 1류(一流)믿음이 되어야지 1류(一流)로 시작했다가 3류(三流) 믿음으로 떨어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타고난 성품이 내성적이든 외향적이든 코로나 아둘람 굴에서 묵상을 통해 모두가 1류(一流)믿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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