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
요한복음 10:14~16
서론
양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동물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온순하고 상서로운 동물로 여겼습니다. 꿈에 양이 나타나면 길몽입니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꿈을 꾸었습니다. 양을 잡으러 갔는데 뿔과 꼬리가 몽땅 떨어져 놀라 꿈에서 깼습니다. 무학대사에게 꿈풀이를 부탁했습니다.
“왕이 될 징조로군요. 양(羊) 자에서 뿔에 해당되는 ‘ ’자와 꼬리에 해당되는 1자를 빼면 왕자가 되니 말입니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전통사회에서도 양띠 해에는 며느리가 딸을 낳아도 구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온순하고 순박한 양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도 양에 관한 언급이 500회 이상이 나옵니다. 그만큼 양은 인간과 친근한 동물이고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가교 역할을 해주는 짐승이기도 합니다.
지난주간에 처음으로 병원신세를 졌습니다. 병원 시트에 누워, 수술대 위에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여기에 눕게 하시나?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히시고…” 푸른 초장에 눕고 싶었는데. 푸른 초장에 눕고 싶었는데. 예배당도 주셨고 더 씩씩하게 목회를 하고 싶었는데… 왜 나를 여기에 눕히실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좋은 곳에 눕히시려고 무던히 애쓰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양들에게는 묘한 습성이 있는데 그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눕지 않습니다.
㉠ 양들은 본래 겁이 많은 동물인지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푸른 초장이라 해도 누으려 하지 않습니다.
양들은 한 마리가 무엇에 놀라서 달아나면 무엇인가? 알아보지도 않고 도망질합니다. 그러기에 여간해서는 누우려 하지 않습니다. 양은 언제 겁이 사라지는가? 목자가 보이면 안심해서 눕습니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목자를 신뢰합니다.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목자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언제 무엇이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알지 못하는 방면에서 재난과 위험과 고통이 들이닥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모험과 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한 예감 속에서 살아 가든가, 아니면 평온한 안식 속에서 살아 가든가 어느 한 편에 속해 살게됩니다.
저는 이번에 불안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고 나중에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푸른 초장이 아니라 가시밭길이었고 비탈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수술대 위에서도 평안히 눕게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사역은 은혜로우신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께서는 조용히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처한 궁지를 익히 알고 계시며 우리와 함께 그것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이런 확신은 제게 위로와 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시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4:8) 그러자 수술대 위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푸른 초장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또 한번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 양들은 집단생활을 하기에 저희들 간에 수도 없이 싸우고 저희들 간에 싸움이 그치지 않으면 푸른 초장이 있어도 눕지 않습니다.
동물 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이 있습니다. 닭들 사회에서는 쪼는 순위, 소와 염소들은 뿔로 받는 순위, 양들은 몸으로 밀어 부치는 순위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순한 양들 사회에서도 적대 의식이 있습니다. 긴장, 경쟁, 알력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있는 한 아무리 푸른 초장이 주어져도 편안히 눕지 않습니다. 누워있어도 자기의 초장을 지키기 위해서 눈을 부라리고 누군가 자기의 땅으로 들어오면 언제라도 몸으로 밀어내려고 긴장을 늦추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눕지 못합니다.
이런 일로 양떼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긴장하게 되며 불만이 쌓이게 되고 안정을 취할 수 없게됩니다. 그 결과 체중이 줄고 신경이 예민하고 암양들은 사산합니다.
이런 양들이 목자만 나타나면 신기하게도 경쟁의식을 버립니다. 목자가 내 터전을 지켜준다는 확신으로 편안히 눕게됩니다.
어떤 사업체, 사무실, 심지어는 교회에서조차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이 계속됩니다. 대부분 우리는 우두머리 양이 되기 위해 긴장하고 있습니다. 앞서기 위해, 돋보이기 위해, 들이받고 경쟁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많은 질투가 일어나게 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입니다. 사소한 미움이 끔찍한 증오로 변하는 것이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목자가 나타나면 그들은 모든 싸움을 그치고 편안히 눕습니다. 결국 긴장과 경쟁을 종식시켜 주는 것은 목자의 등장입니다.
우리의 생애 속에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민감하게 의식하게 되면, 우리의 어리석고 이기적인 속물근성과 적대의식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밀접하고도 친밀한 친교를 누리게 된다면 조용하고 만족스럽게 행하는 겸손을 갖게될 것입니다.
나의 눈이 주님만을 바라 볼 때 주위에 있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이것이 바로 평안의 처소가 되며 어떤 지위에서건 어떤 역할이건 편안히 눕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들과 싸워서 얻어지는 지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쪽을 택하게 될 것입니다.
수술대 위에서 바라보는 주님, 병상에서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할 때 그곳이 바로 푸른 초장이 되었습니다.
㉢ 양들은 기생충으로 괴로움을 받는 동안 눕지 못합니다.
여름에 양들에게는 말라리, 쇠파리, 진드기 등의 해충으로 시달립니다. 이러한 해충에 시달릴 때에는 아무리 푸른 초장, 맑은 시냇가로 인도함을 받아도 누워있지 못합니다. 양들은 일어나서 발을 구르며 머리를 흔들어대며 해충들을 자기 몸에서 떼어내게 하려고 덤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오직 양떼 하나하나를 보살피는 선한 목자의 손이 여러 종류의 구충제들을 이용해서 모든 해충들을 없애줄 때 비로소 양들은 눕게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도 초조하게 만드는 사소한 일들이 있습니다. 불안, 염려, 불쾌감, 자존심의 상처… 구충제가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여유있는 환경을 만났다 해도 우리의 삶은 늘 쉼이 없습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돌보심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구충제가 있다! 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성령께서는 내 안에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께서 나의 고통과 상처들을 치료하고 계심을 믿게 해주십니다. 그때 우리의 분노가 풀리고 감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내가 목회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번의 쉼을 통해서 힘써도 애써도 안 되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셔야만 하는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곳이 바로 푸른 초장아 되었습니다. 환경에서 눈을 돌리고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랄 볼 때 누울 수 있는 푸른 초장이 되었습니다.
㉣양은 배부르게 꼴을 먹어야 눕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을 만났을 지라도 양들은 배가 부르기 전에는 눕지 않습니다. 배가 만족해야 눕는다는 것입니다. 배가 만족하려면 목장이 푸르러야 합니다.
세계에서 목축업을 크게 하는 나라일수록 건조하고 비가 적게 오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양들이 이러한 지대에서 번식을 잘합니다. 그러나 이런 땅은 목초지가 푸르지 못합니다. 다윗이 양을 쳤던 베들레헴도 황무지가 많습니다.
푸른 초장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목자의 수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물을 끌어들이며 꼴들을 정성스럽게 관리했기에 푸른 초장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수고로 편안히 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양들이 울고 있다면, 어린애가 울고 있다면 배가 고프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양들에게 목자는 하나라도 더 주어야 합니다.
아! 이것이 내 목회의 비결이구나! 목회를 하다보면 모두가 만족할 수 없고 내가 낳은 아이들도 내 마음에 차지 않을 때가 많은데 4백여 명의 가족들이 모두 내 성에 차겠습니까? 토라지는 사람들, 불평하는 사람들! 아하! 말씀이 부족해서 우는구나! 사랑이 부족해서 우는구나! 그래야 평안히 눕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목자는 이렇게 푸른 초장을 만들어 놓고 양떼들이 푸른 꼴을 마음대로 먹고 배가 불러서 누워 쉬면서 되새김질을 하며 살이 오르는 것을 보며 목자들은 크게 기쁨을 누립니다.
결론
한문으로 양은 아름답고(美) 착하며(善) 옳고(義) 상서로운(祥) 이라는 한문에 들어갑니다. 중국인들은 양을 이처럼 좋은 동물로 생각했습니다.
성경의 양이 그렇습니다. 성경의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말해줍니다. 여기에 하나 더 붙일 게 있습니다. 희생의 양입니다.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죽어가는 양의 삶은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며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희생의 양-희생적인 삶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금년에도 하나님의 양으로서 목자 되신 그분을 크게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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