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고난의 이유는 묻는 게 아니다!(시편 22:1, 2)

갈렙처럼 2025. 2. 6. 15:04
반응형

고난의 이유는 묻는 게 아니다!

시편 22편 1, 2절

 

 

서론

코로나 기간에 목회의 무기력감을 이겨보려, ‘고난’과 ‘기도’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고난을 다룬 책은 곧 두란노에서 출판됩니다. 지난 1년에 우리교회에 5명의 성도님과 지역교회 두 목사님이 암환자가 된 것이 더 빨리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제목은 세 개가 후보로 올라 있어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대충 “하나님, 내게 왜 이러세요?” 정도이고 1장 제목은, “왜 내 인생에만 돌풍이 불까?”입니다. 힘든 일이 생길 때 고통의 원인을 묻는 것입니다.

나에게 왜 고통이 오는 것일까. 고통의 원인에 대한 해석과 반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 인과응보(因果應報)형: “그런 일을 당한 것은 당연하다!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이리 된 것은 네 탓이렸다!” 하는 원죄론입니다.

 

지금도 인과응보에 근거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늘 하나님 앞에 당당했고 열심을 내지 못하면 벌을 받지 않을까, 무서웠습니다. 내가 할 만큼 했으니 내가 복을 심어 복을 받았다, 당연시했고 어려움을 당하면 내 탓이려니 하고 자책감으로 하나님을 대할 때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는 관계없이 내 행동에 연연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유형입니다.

 

㈁ 반발형: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내가 왜 이런 당해?”

친구들의 정죄에 욥이 내놓은 논리입니다. 불행을 당했을 때 친구들이 정죄하자 욥은 끝까지 “나는 억울하다”, “나는 죄와 무관하다!”를 반복합니다. 누구나 고난을 당하게 되면 인생이 왜 이리 나에게만 가혹하냐고, 인생이 왜 이리 부당하냐고 항의를 반복합니다.

 

버지니아대학 정신과 임상교수이며 죽음학의 권위자 엘리자베스 퀴불러 로스는 말기환자 6백 명을 상담하여 ‘죽음의 순간’을 저술합니다. 책에서 환자들은 5단계의 과정을 보입니다.

 

1단계, 부정: “내가 죽다니 말도 안 된다” “우리 엄마가 죽다니 말이 안 돼!”

2단계, 분노: “죽어야 할 사람이 많은데 왜 하필 내가?” 이건 도무지 인정할 수 없어!“

3단계, 타협: “어떻게 하면 더 살 수 있을까?”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거래를 제시합니다.

4단계, 우울: “다 끝났어…” 병이 깊어지고 가망이 없으면 우울증이 옵니다.

5단계, 수용: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천국을 받아들입니다.

 

‘반발’형은 바로 2단계에 속합니다. “고통이 왜 내게 해당되어야 하냐”, “나보다 더 악한 놈들이 많잖아?” 반발하며 반항합니다. 반발은 주변에서 시작되어 아무개 때문에 내가 이리되었다, 분노하고 의사를 거쳐 결국에는 신에게까지 이릅니다. 무신론자도 죽음 앞에 이르면 최종적 반발 상대는 신입니다. 모두 밉고 만나기조차 싫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 운명론(運命論): “도무지 모르겠다! 내 팔자겠지…”

팔자소관입니다. 팔자소관은 내게 생기는 불행이 어떤 목적 없이 우연히 일어납니다. 비행기에 탑승했다 추락해서 사망하고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로 죽고 인생에서 낙방하고… 목적이 없습니다. 그냥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재수 없다거나 내 운명이려니, 합니다. 그래서 꾹꾹 참으며 팔자가 펴질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유형입니다.

 

㈃ 하나님 동정론: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

유대인 랍비 쿠쉬너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로증에 걸린 아들이 14년을 살다 죽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 동정론으로 자신의 불행에 대해 관대해지려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선하기는 하지만, 전능하지는 않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심합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이 이 지독한 불행을 왜 그냥 지켜만 보실까? 쿠쉬너는 차라리 그 고난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속이 편하다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그 무정함을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아들을 보내놓고 “이건 불공평해”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하나님을 이해하자고 합니다. 하나님도 내게 잘해주고 싶었는데 안 되는 일도 있지 않냐, 내 불행은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기에 ‘전능하지 못하신’ 하나님도 내 불행에 가슴 아파하니, 나도 하나님에게 불행의 이유를 알려 달라, 너무 가혹하게 밀어붙이지 말자, 는 것입니다.

가장 마음에 와 닿는 해석이면서도 신학 중에서 가장 나쁜 교리입니다.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는 네 해석 중에 어느 쪽이 옳을까요?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인과응보형? 반발형? 팔자론? 하나님 동정론입니까?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당할까? 유대교 랍비 조셉 솔로베이치크는 몇 가지 해석을 내놓습니다.

-개인의 품성을 높이기 위해 고통이 온다! 고통을 통해 인격 그릇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교만을 제거하려 고통을 주신다! 교만의 청각장애인들에게는 고통의 확성기가 필요하답니다,

 

-구체적 믿음으로 나가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신다! 전에는 형식적으로 믿던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통해서 믿음을 바로 세우고 체험적인 신앙으로 성장하는 것을 봅니다.

 

-시야를 넓히려고 고통을 주신다!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막상 고통을 당해보니 주변의 고통을 돌아보게 되고 이해되더라는 것입니다.

 

솔로베이치크가 말하는 고통의 최종목적은, 한 마디로 ‘인격 결함을 수리함’입니다. 고통을 통해 바르게 세운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들이 모두에게 맞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은 인격이요 신앙자인 욥에게 품성을 높이려, 교만을 제거하려고, 구체적 믿음으로 나가게 하려고, 시야를 넓히려고 고통을 주셨다는 것은 억지에 해당됩니다.

 

착한 사람들이 왜 고통당할까? 여기에 대한 이번 단행본의 대답이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고난의 이유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싱거운 대답 같지만, 그게 또 해답입니다. 인생이라는 운동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용납할 수 없는 일들도 벌어집니다. 열 명이 암(癌)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문병했습니다. 병원에 온 김에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딱 걸렸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등교 길이었기에 학생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1분만 일찍 버스가 왔어도 죽지 않을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우리 아이에게? 군대에서 동료들을 무자비하게 난사하는 사건이 터졌을 때, 몇 십분 전에 자리를 바꿔치기했습니다. 죽어야 할 아이는 살고 살아야 할 무고한 아이는 자리를 바꾼 일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왜 하필 나에게?”라고 부르짖습니다. 비신자들도 왜 하나님께 질문을 할까요? 결국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아들을 잃고 상실의 6단계에서 세 번째 ‘몸부림’ 단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답은 얻지 못하겠지만, 질문하는 것 자체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믿음의 시험대가 됩니다.”

 

너무 깊게 그리고 오래도록 왜냐? 는 질문에 매달리지 말라, 그러다 오히려 시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는 것입니다. 내게 벌어지는 삶의 곤경에 대해 일일이 하나님께 해석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석해 주지도 않고 해석해 주셔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합했다는 다윗의 부르짖음에도 침묵하시던 분입니다.

1절, “내 하나님이여…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2절,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3년간 망명생활을 하면서 억울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하나님께 이유를 묻고 도움을 구합니다. 어찌…어찌… 응답이 없습니다. 얼마나 이유를 물었는지 15절, 혀가 입천장에 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여기 질문자체가 응답이 됩니다.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2절, “내 하나님이여…”

응답이 없지만 부르짖음의 대상 하나님이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해 해주지는 않았지만 존재 자체가 응답입니다. 28절, 모든 나라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일의 주재자입니다!

 

그래요! 내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해답입니다! 원망하면서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의 침묵이 때로는 고난의 이유를 묻는 우리에게 해답이 됩니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인턴 과정을 마치고 마취과를 택한 장성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후 하나님께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절규하면서 원망하다 결국은 화해하고 이리 고백합니다.

 

<…일 년 전, 내가 그렇게 고통하고 신음할 때, 수없이 되 물었던 질문, 하느님, 한 말씀만 하시옵소서. 그러나, 하느님은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 고통의 순간을 지나올 때, 내가 그렇게도 원망할 하느님이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의 원망을 받아줄 하느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에 수많은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질 때, 그 많은 원망을 고스란히 들어주셨던 하느님 그분의 침묵은 더 많은 원망을 듣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우리가 사사건건 고난의 이유를 알려달라고 매달리다보면 오히려 원망만 늘어납니다. 보금자리가 어지럽히게 되었을 때 그냥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내 보금자리를 어지럽힐 때에는 분명 어떤 섭리가 있겠거니, 하면서 고통의 자리에서 견디며 파득거리는 법을 연마해야 합니다. 고난은 견디는 것이지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잃은 이동원 목사는 친지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아들을 불러 가신 이유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고, 영원히 찾지 못할 듯하다. 그래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말합니다.

 

세상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습니다. “왜 그러셨어요. 하나님?” 언제부터인가, 그런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리처드 로어의 “해답을 가졌다는 것이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해답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라는 말을 마음에 품고 삽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만이 인생의 고난에서 어떤 해답을 듣지 못하면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삶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고난의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 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은 딱 하나입니다!

 

“그런 질문은 하는 것이 아니란다.”

 

왜 그러실까. 어차피 세상에서 얻어지는 답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고 어떤 답이 이해가 될까요? 그러니 차라리 그냥 안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체가 답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입니다. 하나님은 참 오묘하게 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품에 머리를 묻고 살면 됩니다. 제 책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김재익씨의 책 제목으로 이 글을 마친다. 딩동! “오늘의 위로가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위로의 하나님을 전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3~5)

 

코로나시대 생업이 무너진 여러분에게, 병을 얻은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라는 처방전을 써드립니다. 그 처방약이 틀림없이 효과를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막 도착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