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의 여인 사랑
요한복음 4장 7~15절
서론
가수 윤복희씨 아시지요? 다섯 살부터 아버지가 만든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가수가 되었고 미8군부대에서 노래했습니다. 60년대, 미국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이자 가수인 루이 암스트롱의 모창을 기가 막히게 해냈습니다. 그 소문이 암스트롱의 귀에 들어갔고 세계적인 가수 암스트롱이 내한했을 때 워커힐에서 합동공연을 합니다. 열여섯 살짜리가 너무 노래를 잘 하는 거예요. 다음 해에 미국시장으로 진출합니다. 당시에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윤복희씨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국내에 미니스커트 열풍을 일으키면서 대스타가 되었지만 동료가수 유주용과 남진과의 결혼과 이혼으로 아픔을 겪었습니다. 1976년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뻔 합니다. 80년대에는 3분만 늦었으면 하나님이 데려갈 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교통사고 이후 윤복희는 성령을 받습니다. 이후 목사오빠와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하며 간증하고 다닙니다. 히트곡이 “여러분~”이며 간증콘서트의 제목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친구이자 노래이며 기쁨이다”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간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구절로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을 전했습니다. 윤복희의 일생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윤복희를 이처럼 사랑하사…”이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노래로 “여러분~” 콘서트를 열며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윤복희씨보다 훨씬 더 버림받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윤복희씨를 ‘이처럼 사랑하사’의 삼위(三位)사랑이 수가성 무명의 여인에게는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줍니다.
1. 성부(聖父)의 ‘이처럼 사랑하사’-여인을 찾아오시는 사랑입니다.
여인은 한마디로 실패한 인생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의 특징이 자아상이 낮았습니다. 자아상은 ‘내가 생각하는 나’입니다. 자기만족도가 높으면 긍정적인 자아상이고 자신을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높은 자아상은 수용능력, 이해능력이 큽니다. 여간한 일도 받아들이고 넘어갑니다. 낮은 자아상을 갖고 있으면 이해능력 수용능력의 용량이 작기에 쉽게 분노하고 목숨을 겁니다. 어려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윤복희씨도 자존감이 없었기에 막 산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지역적인 피해의식자입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이인데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하면서 앗수르 정부의 혼합정책으로 잡혼하면서 혼혈아가 되고 무시당합니다.
여인은 성별의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생산도구였을 뿐 인권이 없습니다. 부인이 싫으면 ‘휴서’라는 것을 주고 보내면 그만입니다. 여인은 이런 남자들에게 당한 것입니다.
여인은 사회적인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품행이 나쁩니다. 6절에 물을 길러 나왔는데 6시, 우리 시간으로 정오 12시입니다. 모두가 쉬는 뜨거운 시간에 물을 길러 나온 것은 동네 여자들을 피해서입니다, 사연이 있는 여인 여인이지요. 그래서 물을 청하니 짜증을 부립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남자로서… 여자인 내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남자에게 매달립니다. 막장인생이지요.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여인을 목적 삼아 오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유대에서 갈릴리로 돌아 갈 때 사마리아를 피해 갔겠지요.
이것이 죄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갈아 네가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것이 ‘이처럼’의 사랑입니다.
<낮은울타리>라는 월간지에 간증이 실렸습니다. 전도사가 부임했는데 찬양대 자매가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거예요. 필이 꽂혔어요. 혼자된 권사님의 무남독녀입니다. 두 사람은 교제하고 결혼한 후에 미국유학을 갑니다. 오래 전이니까 자매가 영어를 알아요, 한인들이 있었겠어요? 한국 방송이 나와요? 신학생 남편은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늦게 돌아옵니다.
자매는 너무 무료해서 커피숍에 차를 마시려 다녔는데 잘 생긴 흑인이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마음을 열어버렸습니다. 영어도 배우고 커피에서 맥주로, 마약으로…, 끝내 가출해 버렸습니다. 수소문하니 슬럼가에서 마약쟁이가 된 것입니다. 마약과 세상맛에 들리니 예쁘고 순결했던 자매가 나오지를 못합니다. 찾아오면 가출하고… 현대판 호세아와 고멜입니다,
나중에는 아예 종적을 감추어버렸습니다. 장모 권사님에게 찾아갔더니, “나도 내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찾지 마라! 자네는 목사가 될 사람인데 내 딸로 족하지 어찌 자네까지 인생을 망치고 사역을 접겠느냐?”라며 오히려 사위를 위로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윤복희의 삶이 그런 것이잖아요. 윤복희는 이런 사람들에게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행복을 알게 하셨는데 여러분~ 여러분도 그런 하나님에게 놀러오세요~” 간증하려고 콘서트를 여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얼마나 고마운 사랑입니까? 그 사랑을 알면 잘못된 사랑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여인이 그랬습니다. 인간 사랑으로 허기진 사랑을 메우는 것은 중증상처에 사랑 반창고 붙이는 일입니다. 땜질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2. 성자(聖子)의 ‘이처럼 사랑하사’-여인을 위해 죽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오에 여인을 찾아오셨습니다. 동네 여자들 입방아를 피해 우물에 나온 여인을 책망하려고 오셨다면 심술궂습니다. 목이 말라도 눈길을 피해 나온 여인이 있으면 피해주는 것도 배려입니다. 길을 가다 담배 피우는 집사님 보면 내가 도망가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물을 길러 오는 시간과 습관을 알고 있습니다. 여인이 누구이며 어떤 심정이며 동네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여인은 축구경기로 말하면, 오프사이드(off-side) 반칙인생입니다. 공격선수가 상대편 진영에서 공보다 앞쪽에 있을 때, 골라인과의 중간에 상대팀 선수가 2명 이상 없으면 오프사이드 위치이며, 내 편으로부터 패스를 받으면 반칙이 됩니다. 골을 넣어도 노 꼴! 입니다.
오프사이드는 결국 위치의 문제입니다. 지금 그 장소에 있으면 안 됩니다. 여인은 지금 그 위치에 있습니다. 잘못된 위치에서 이 남자 저 남자 만나 사랑과 결혼이라는 공을 넣었지만 다섯 번이나 오프사이드입니다, 노꼴입니다. 지금의 남자와도 오프사이드 위치입니다. 아무리 알콩달콩 재미있다 해도 그 남자와의 인생도 노꼴입니다. 또 떠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프사이드에 있는 여자를 찾아오셨습니다. 남자들에게 버림 받은 여자, 잘못된 사랑에 중독된 오프사이드의 인생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죄는 위치의 문제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거기에 없는 것이 죄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천사장은 자기자리를 이탈했습니다. 하나님과 견주는 자리입니다. 오프사이드 천사입니다. 그는 성공하지 못하고 악한 천사가 되었습니다.
아담이 위치를 이탈했습니다. 그는 관리자의 자리였는데 창조자의 포지션을 노린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었지만 노꼴! 입니다. 오프사이드에서 걷어찼기 때문입니다. 따 먹는 순간 오프사이드 반칙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불러 내셨습니다. 무화과로 가리고 숨는다고 되냐? 나와라! 아담의 위치는 숨은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입니다. 관리자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해 입히고 그의 벌거벗음을 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치를 이탈한 죄인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원래 위치로 돌려놓으시고 교제를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아담에게 됐다! 없던 일로 하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를 위해 짐승을 죽이고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 피가 바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독생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오랜 세월 후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이 마른 여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여인은 위치를 이탈한 인생입니다. 부모들이 그렇게 딸을 키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고 결혼하고 자식들을 낳고… 이웃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서로 인정하고 존경받으면서 그런 위치에서 공을 넣는 성공적인 삶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어쩌다 막장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여인은 위치를 이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거절합니다. 다윗의 우물은 100피트, 미터로는 30.48m 약 31m입니다. 얼마나 깊은 우물입니까? 날씨는 더운데… 사람들이 나오기 올 텐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생수를 알았다면 네가 오히려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 자리에서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나의 피니라!” 죄를 사(赦)하는 십자가의 피를 말합니다. 희생적인 대속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그 피는 자리를 이탈한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 잡아주시던 어린양의 피입니다. 사람들로 목마른 여인을 위해 대신 모욕당하고 죄성으로 오프사이드 인생을 살아가는 여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내버리고… 예수님은 오신 것입니다.
여인이 뭐 그리 대단한 존재입니까? 그런 여자는 거리에 쌓였습니다. 그럼에도 여인에게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형상이 있습니다.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사단에 메여있는 여인을 찾기 위해 정오에 수가성에 오신 것입니다.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제자리에 있습니까? 장로의 자리에 있습니까? 권사의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하지만, 오프사이드의 자리가 아닙니까? 원위치 시켜주려 오신 예수님, 내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시려 오신 예수님에게 겸손하게 나아가십시오! 십자가의 보혈에 적시세요! 우리도 여인처럼 생수를 얻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성령(聖靈)의 ‘이처럼 사랑하사’-여인을 성화시키는 사랑입니다.
여인은 처음에 예수님을 유대 남자로 알았습니다. 9절 “당신은 유대 남자로서” 유대남자는 밥맛없는 남자들입니다. 가식덩어리들이고 위선자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유대 남자들은 다 이 모양입니다. 남자들에 대한 왜곡된 자아상 때문에 모두에게 적대적입니다.
브리짓드 바르도라는 프랑스의 유명한 모델이 있습니다. 동물애호가인데 사람들, 특히 남자 혐오증, 남성 기피증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출도 하지 않는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람이 싫어졌어요. 인간 알레르기에 걸렸어요. 남자는 모두 미워요"
수가성 여인도 인간 알레르기에 걸린 여인입니다. 이런 여자에게서 변화와 새사람이 되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습니다.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을 기대하는 일입니다.
이런 여인에게 성령이 개입하십니다. 여인에게 마음을 열고 수용능력을 넓힙니다. 그러자 남자라는 호칭에서 주여!(11절)로 바뀝니다. 주여, 는 선생님 존칭어입니다. 다시 선지자로 바뀝니다(19절). 끝내는 29절,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이 성공한 것입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에 가득했습니다. 무가치한 땅, 무가치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아충족자이지만 자기형상을 닮은 생명체를 갖고 싶으셨습니다. 성령은 흙덩이를 품었습니다. 흙덩이에 생명이 생기라고… 흙덩이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지라고…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성령이 만물을 품었습니다. 무가치한 것들에서 최고의 선(善), 하나님의 형상이 태어났습니다.
미국에서 타락했던 찬양대의 그 자매, 전도사님의 그 아름다웠던 아내! 뒷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막장인생. 그 정도라면 더 이상 해피앤딩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여기에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면 얼마든지 해피앤딩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성령이 품으면 옛날의 찬양대의 얼굴로 돌아올 것입니다. 권사장모님에게 사위는 말했습니다. 내가 한 여인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한다면 내거 어떻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설교하는 목사가 됩니까? 호세아 성경은 어떻게 설교합니까? 성령의 ‘이렇게 사랑하사’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을 대하는 성부하나님의 찾아오시는 사랑, 성자하나님의 피를 흘려 죄를 사해주시고 목마르지 않는 새로운 생애를 살게 하시는 자기희생적인 사랑, 성령하나님의 암탉이 품어서 생명을 회복시키는 사랑! 그런 사랑이 바로 이 여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결론
헨리 브란트는 세계가 주목하는 저술가, 강연가이며 결혼과 가정상담자입니다, 결혼과 가정 상담자라면 좋은 아내와 해로하며 훌륭한 가정을 갖고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본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의 인생과거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아내와의 사별로 세 번을 결혼했습니다. 본인은 파킨슨병에 걸렸습니다. 참 힘든 세월이지요.
그러나 브란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처럼’의 사랑 앞에서 높은 자존감을 누렸습니다. 성자의 ‘이처럼’의 사랑에서 이해와 희생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자기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만지고 고치며 회복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이처럼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상담경험을 책으로 냈습니다. 책 제목이 <고친만큼 아름답다>. 너무 멋진 제목이 아닙니까?
요한복음은 ‘이처럼 사랑하사’의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이 누구에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하는 복음입니다. 3장에는 니고데모, 4장에는 왕의 신하, 5장에는 베데스다 38년 된 병자… 등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대상들이 나옵니다.
누가 가장 아름답습니까? 수가성 여인입니다. 고침 받은 바가 컸기 때문입니다.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고장이 났다는 것, 아닙니까? 망가졌다는 것 아닙니까? 오프사이드 자리에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랬던 사람이 성공하면 더 아름답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죄를 버리며 더 성스러워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공을 넣으면 더 열광합니다. 그래서 고친만큼 아름답다는 제목이 나오는 것입니다. 고친만큼-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의 사랑입니다.
수가성 여인의 18번 찬송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었네, 주 예수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호산나 호산나 죽음 당한 어린이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이 찬송이 그 때 있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애창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하고 자존감이 높은 생애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일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도 맛있다] 포도주가 떨어지니 진짜 포도주가 나왔다!(요한복음 2:1~11) (0) | 2025.02.07 |
---|---|
[설교도 맛있다] 3백년 간의 동행(창세기 5:21~24) (0) | 2025.02.07 |
[설교도 맛있다] ‘이처럼’의 하나님 사랑(요한복음 3:16, 17) (1) | 2025.02.06 |
[설교도 맛있다] 고난의 이유는 묻는 게 아니다!(시편 22:1, 2) (0) | 2025.02.06 |
[설교도 맛있다] 이스마엘을 낳았는가?(창세기 16:15, 16) (0) | 2025.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