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이스마엘을 낳았는가?(창세기 16:15, 16)

갈렙처럼 2025. 2. 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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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을 낳았는가?

창세기 16장 15, 16절

 

서론

지난 21일 예루살렘에서 자살 테러가 생겨 6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남자 한 명이 등교 길의 버스에 올라 폭탄을 터트려 자신도 자살하고 학교에 등교하던 학생들과 직장인 중에서 1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48명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모하메드가 살았다면 미스 월드와 결혼했을 것”이라는 기사에 앙심을 품은 이슬람교도 수천 명이 폭동을 일으켜 100여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를 가져왔습니다. 자기 교주가 모독당했다고 생각하는 성난 군중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아 산채로 불에 태워 죽였고 예배당에 들어가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나이지리아에서는 2년 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유혈충돌이 일어나 200여명이 사망한바 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국가에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당하고 선교사들이 처형당하며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참사의 배후에 이런 저런 과격 팔레스타인 단체, 과격한 이슬람단체들이 있지만 그 뿌리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기에? 인류 세상에 유일신 사상을 소개했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찬사와 함께 믿음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아브라함 때문에 지난주간에도 16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황당함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아브라함이 어땠기에? 지난 4천 년 동안 끊임없이 세계에 살상과 분쟁과 방화와 사망을 가져오는 사람이 되었던 것일까요?

 

문제의 발단은 아주 간단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하갈이라는 여종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자라서 민족을 이루고 그 자손 중에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가 나오면서 세계는 수천 년 동안 전쟁과 분쟁에 휩싸여 왔습니다. 민족적으로는 이삭의 자손인 유대인, 이스라엘인-이스마엘의 자손은 아랍인, 중동인,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도들-아브라함의 영적 혈통을 자처하는 기독교인들, 모하메드의 종교를 쫓는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일어났던 분쟁과 전쟁으로 수천만 명, 많게는 수억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의 실수가 오늘 인류 역사에 이렇게 큰 비극을 불러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지만 않았어도 세상은 조용했을 것이며, 지난주간에 죄없는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낳지 말아야 할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욕심 때문에, 야망 때문에, 기질 때문에 이스마엘을 낳으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은 이스마엘이 자랑처럼 느껴지고 성공의 원인이 되었지만 훗날 이스마엘 때문에 누군가 불행해 지고 우리의 명예에 욕이 되는 그런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을까요?

이스마엘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은 기뻐했습니다. 아이는 예쁘게 생겼으며 사랑스럽게 잘 자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마엘은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안에 불화와 분쟁을 가져오는 화근이 되었습니다.

 

우선 사래와 하갈 사이에 시기심을 가져왔습니다. 이스마엘은 여주인의 아들 이삭을 희롱했습니다(21:9). 이스마엘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약속의 아들이 약속이 없는 불신앙의 아들에게 핍박당하고 희롱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인 중동인들에게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아서 기뻐했던 날들은 순간에 불과했고 두고두고 이스마엘은 화근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낳지 말아야 할 것을 낳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짧게는 2002년도 열 한 달을 달려왔습니다. 길게는 20년 30년, 50년 60년, 더 길게는 90의 세월을 달려왔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낳은 이스마엘은 없습니까?

 

이스마엘은 불신앙으로 얻은 모든 것들을 총칭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노엽게 하면서 얻은 것들,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가면서 얻은 것들, 기다려야 하는 데도 기다리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몰라라 하면서 얻은 것들이라면 그것이 명예이든, 물질이든, 사람이든, 어떤 취미생활이든 그것은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이 잠시적으로 기쁨을 누렸고 즐거웠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이스마엘은 가정의 우환이 되었고 언약의 장막 속에 불신을 가져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 이스마엘은 큰 오욕이 되고 만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혹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 아닙니까? 정직하지 못하고 벌어들인 것이라면, 잘못된 방법과 수단으로 얻은 것이라면, 아무리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기쁨과 명예를 가져다 준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약속의 선물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이 없는 이스마엘입니다. 약속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믿을 것인가? 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게 더 중요합니다. 구원도 중요하지만 구원 이후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원칙, 생활의 원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보인다고 해서 다 얻으려 해서는 안 되고 누가 준다고 해서 다 가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하신 것인가?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잘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단이 와서 유혹했습니다. 타협하기만 한다면 세상을 주고 권세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한 종교의 교주가 세상의 영광을 모두 주겠다고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15년 동안만 간직하고 끝날 이스마엘이었던 것입니다.

후에도 사단은 계속 좇아 다니면서 유혹합니다.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우리고 있는 것은 이삭인가, 이스마엘인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가, 나의 수단에서 온 것인가? 늘 자신의 소유물의 출처를 살피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쩌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까?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어찌 그런 실수를 했을까요? 그가 일시적으로 여종과 눈이 맞아 이스마엘을 얻은 것도 아니고 사라와의 사랑에 갈등이 생겨서 이스마엘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충동적인 실수가 아닙니다. 사라의 말을 들었다가 결과가 좋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어쩌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까? 나름대로 하나님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 공감하다보니 이스마엘을 낳고 만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을 돕고 싶었습니다. 남편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을 취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는 것이며 아브라함가에 하나님의 약속이 더 빨리 성취되는 것이라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생각은 좋았지만 방법은 하나님의 약속에 어긋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하나님을 돕는다고 한 것이 이스마엘을 낳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을 도우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우겨서 결행했다면 그 성전은 이스마엘이 되었을 것입니다. 두고두고 그 성전은 강도들의 굴혈이 되었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게 하는 신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 다윗은 아멘! 으로 수용했기에 성군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큰 예배당을 만들고 성도들의 숫자가 늘면 하나님을 돕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정직하지 못하고 단지 큰 교회, 대형교회당만을 만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교회가 바로 이스마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즈음 교회가 대형교회, 성공하는 목회가 되기 위해 별의별 수단과 방법들을 다 동원합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삭일까요? 교회마다 사정이 있고 특성이 있겠지만 글쎄요, 교회가 자꾸 이렇게 나가는 것은 이스마엘을 얻고 잠시 기뻐하며 부흥하며 그 대가로 대형화되는 것은 아닐까요?

 

아브라함은 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를 둔 사람의 말을 듣다가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경수가 끊어지자 하나님의 약속도 멈추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경수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 경수가 끊어지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한계적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한계를 가진 사람의 말을 듣다가 이스마엘을 얻게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까? 영적인 침체에 빠진 사람의 조언을 받았다가 멀쩡한 사람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지만 경수가 끊어지면서 그의 믿음에도 포기와 실망이 왔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남편에게 여종을 취하여 자손을 얻자고 합니다.

 

사라의 말은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고 싶냐? 생선류냐, 고기류냐? 그런 정도의 선택이 아닙니다. 사라의 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무나 얻어서 자손을 이어나갈 것인가? 그런 선택의 갈림길입니다. 나의 계보가 육신으로 흐를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것인가?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애 속에 중요한 기로에 서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에 따랐습니다.

 

사라는 영적인 침체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그녀의 믿음을 일으켜 세우고 약속의 아들을 기다리자고 했다면 지금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살상과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내가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가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마엘을 얻게되는 많은 경우는, 남의 말, 그것도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사람의 말을 듣다가 정말 이삭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이스마엘을 얻으며 잠시 잠깐 동안의 기쁨에 만족해 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이삭을 바라보며 참고 기다립시다.

아브라함과 사라. 그들에게 약속의 것만을 끝까지 붙잡는 믿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롯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땅을 선택했습니다. 그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 땅은 잠시 눈에 보이기에는 좋아도 하나님께서 영원히 허락하신 땅이 아닙니다. 그러나 롯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얻었습니다. 그 땅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멀리 떠나보냅니다. 이삭만이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었고 유일한 혈통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을 통해서 얻어지는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라 그것은 우환이었고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좋은 것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얻으려면 상황을 보지말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특히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성급하지 말고 낙심하지 않고 있으면, 이스마엘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더라도 버리고 주님의 약속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주실 것입니다. 더 큰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웃음으로 왔다가 마음에 근심을 주었습니다. 이삭은 오랜 세월 염려케 했지만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결론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나온 세월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이삭인가, 이스마엘인가? 우리 늘빛교회는 이삭인가? 이스마엘인가? 제가 18년 동안 하고 있는 교사의벗은 이삭인가? 이스마엘인가?

 

내 손에 쥐어준 것은 분명 이삭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수없이 많은 것들, 내 손에 잡혔던 것들이 정말 이삭이었나? 이스마엘이었나? 이스마엘에서는 부끄러움과 회개가, 이삭이라는 확신 가운데서는 분에 넘치게 많은 것을 주신 약속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삭을 낳으며 살았습니까? 이스마엘을 낳으며 살았습니까? 여러분들은 사라로 살았습니까? 하갈로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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