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진실한 신앙, 고백과 간증(마태복음 16:13~20)

갈렙처럼 2025. 2. 2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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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신앙, 고백과 간증

마태복음 16장 13~20절

서론

오늘의 제목을 ‘진실한 신앙, 고백과 간증’이라고 했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과 예수님을 증거하는 간증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제목입니다. 한국교회가 전래된 지 130년이 지나 신앙이 무르익을 때가 되었지만 신앙심이 무르익음이 아니라 벌써 늙어가고 있습니다. 이거 안 좋은 징조, 이런 말을 써도 될는지, 한국교회 망조(亡兆)입니다.

 

유럽교회와 영국교회는 비록 쇠해가는 중이지만 그 교회들은 천년 이상을 버텼습니다. 그러다 지금은 인본주의, 진화론, 세속화, 인권, 무신론주의가 워낙 강세가 되다보니 견디지 못하고 시대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유럽교회가 신앙심이 무르익었으면 왜 못 이기겠어요? 신앙이 늙어가다 보니 싸울 힘이 사라지고 신앙 근력이 받쳐주지 못하니 인본주의에 손든 것입니다.

 

사람도 그러지 않나요? 나이가 들면서 늙어가는 사람, 익어가는 사람, 다릅니다. 늙어가는 사람은 나이를 먹는 사람이고 익어가는 사람은 지혜가 쌓여가는 사람입니다. 나이를 먹고 있나요, 나이가 들고 있나요? 잘못 먹어 탈이 나는 것이 어찌 음식이나 영화나 책이나 사상만 있겠습니까? 나이도 잘못 먹으면 탈이 납니다. 우리 교우님들은 늙어가는 분들입니까, 조금씩 익어가는 중입니까? 인생이 늙지 않고 익어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신앙심이 늙어가는 것은 두 가지가 없거나 약해졌을 때 나타납니다. 신앙고백과 간증입니다. 주님에 대한 절절한 신앙고백과 기독교인의 삶의 현장이 없으면 신앙심은 서서히 늙어갑니다. 늙으면 무력해지고 세속화됩니다. 교회건 개인이건 세속화로 가면 끝납니다. 유럽교회가 세속화를 극복하지 못해 무너졌고 한국교회는 겨우 130여년에 유럽교회를 따라잡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다릅니다. 교주 무함마드는 주후 570년에 출생했습니다. 그로부터 1000년, 이슬람이 시작되기 약 4세기 동안, 중동과 북부아프리카는 95%가 교회출석하는 비잔틴 기독교제국이었으나 지금은 이슬람권입니다. 현재 세계인구는 약 75억명, 지구상에 살고 있는 5명 중의 한 명은 무슬림인 셈입니다. 현재까지는 기독교가 최대 종교지만, 2070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이 비슷해지고, 2100년 이슬람이 최대 종교가 된다는 예측을 미국의 조사기관 <퓨 리서치센터>가 전망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그러면 기독교는 왜 갈수록 약화되고 이슬람은 강세가 됩니까? 이슬람을 믿는 아랍국가만 해도 22개국입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기독교는 신앙고백과 간증이 갈수록 약화되고, 번영신학으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어떻게 하면 성공하고 번영할 것인가, 여기에 관심이 쏠리지만 이슬람에게는 굉장히 쎈 신앙고백과 간증이 있습니다.

 

무슬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의무 5개, 이를 오주(五柱)라 합니다.

 

① 증언-고백:“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한다. 또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한다”를 입으로 암송합니다.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합니다.

 

② 예배:일정한 시각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로 하루에 다섯 번 일출·정오·하오·일몰·심야에,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 예배하는데 반드시 메카 방향 향해 절합니다.

 

③ 희사-천과(天課):일종의 헌금입니다.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입니다.

 

④ 단식: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月間:제9월) 주간(晝間)에 음식·흡연·향료·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코란을 독송합니다. 음식은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됩니다.

 

⑤ 순례:무슬림은 매년 하주의 달(이슬람력 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大祭)에 일생에 한 번 이상은 참가의무가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합니다. 이슬람법(샤리아)입니다. 무슬림은 출생에서 사망까지 이슬람법에 따라 생활하도록 요구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알라의 계시를 암송하고 공부하고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에 열심 냅니다. 이를 의무적으로 자식에게 전승합니다. 이슬람신앙이 생활이요, 생활자체가 종교입니다. 그러니 이슬람 신앙의 대(代)가 끊길 염려가 없지요.

 

기독교가 원래 그런 종교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요 죽음을 불사합니다. 초대 기독교 성도들, 유럽의 성도들은 두 가지가 분명했습니다.

 

첫째, 신앙고백입니다.

이슬람은 코란에 바탕을 둡니다. 그래서 3신(信) 5주(五柱)가 있습니다.

 

불교. 불자들 보살의 목표는 성불(成佛)이요 그것을 위해서시주하고, 계율을 지키고, 고난을 참고, 불도를 실천하고, 명상으로 정신을 통일하고, 깨달음을 완성시키는 수행을 실천합니다.

 

유교는 충효(忠孝)사상입니다. 충효는 충성과 효도를 아우르는 말로 왕을 성심(誠心)으로 받들고 부모를 지성(至誠)으로 모시는 덕목(德目)입니다.

 

이 모든 것은 교주와는 관계가 없어요. 교주가 먼저 깨달은 진리를 제자신도들이 잘 지켜 수행하고 어느 수준에 오르면 천국에 이르거나 해탈하여 열반극락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교주 인격에 대한 신앙고백이 필요 없습니다. 교주는 누구의 아들이요 이치를 먼저 깨달은 사람일 뿐입니다. 계율을 수행하는 것은 결국 내가 할 일입니다. 교주에 대한 신앙고백보다는 교주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와 깨달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불교는 이런 쎈 수행을 출가한 승려 중심으로 하니 그들이 어디로 가요? 가정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 시중에 영향력이 없고 불교신심의 대물림은 형식에 불과합니다.

유교는 어때요? 충효사상이 정치와 연결되어 기득권층이 되어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조상제사는 대물림은 되는데 요즘처럼 편의주의(便宜主義) 시대에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이슬람은 어때요? 강력한 유일신 종교를 만들어냈고 생활종교를 만들어냈지만 반(半) 강제적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세뇌는 되지만 감동과 감격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에 훌륭한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보훈은 인도의 간디까지도 감탄합니다. 마태복음 7:12,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기독교윤리의 황금률입니다. 얼마나 좋은 윤리요 교훈입니까?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고 살아야 할 생활윤리이지 그걸 배워 지켜 나 자신을 구원시키는 진리의 말씀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믿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윤리이전에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착한 사람이 되고 반듯한 ‘바른생활표’ 신자가 되었다 해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없으면 거듭난 그리스도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고백의 모범입니다.

 

1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왕, 선지자 등 하나님께 구별된 일꾼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신앙을 고백합니까?

 

“당신은 나의 선지자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제사장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그러기에 삼중직이 되시는 당신은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실 구세주~ 누구는 모세라 예레미야라 세례요한이라⋯ 하는데 베드로는 3중직분의 구세주 자격을 갖춘 나의 구세주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그리스도라 밝힌 바 있습니다(요 4:26). 베드로는 이어서 고백합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본체되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흡족해 하셨습니다. 17절,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00점 만점의 훌륭한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로마가톨릭교회와 개혁주의교회가 달라집니다. 로마가톨릭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다 합니다. 베드로는 1대교황이요 지금 프란체스코 교황을 266대 베드로 후계자라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교회는 베드로 위에 교회 터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웠다 합니다. 규모가 크고 반듯한 사람들로 채워진 교회라 해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하나님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건 종교기독교이지 복음 기독교교회는 아닙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 의사, 사상가, 신학자, 음악가, 적도(赤道) 아프리카(가봉)의 선교사로 인류애를 실천한 사람입니다.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는데,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세웠습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를 내세우지 못합니다. 아쉽게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없습니다. 동정녀 탄생,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속죄사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도덕과 윤리, 인류애⋯ 그걸 높이 샀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인류를 사랑하며 살면 그 정신이 남들에게 이어지고 그것이 부활이요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 가르침만을 따르는 종교라면 훌륭한 신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앙고백을 우선합니다. 슈바이처는 좋은 의사와 예술가는 될 수 있어도 좋은 선교사는 아닙니다. 간증은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나요?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십니까? 나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하심으로 내 죄를 사해주셨다! 이런 고백이 있나요?

 

“당신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도마가 했던 신앙고백입니다.

 

두 신앙고백이 있어야 진실한 믿음이요 구원을 얻는 믿음입니다.

둘째, 간증입니다.

신앙고백은 믿음의 대상과 내용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하나님이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간증은 무엇인가? 나에게 일어난 구원사건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행해주신 크고 소소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증거해서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간증입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한다.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한다”를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간증합니다. 그러면 세뇌가 됩니다.

 

간증은 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 역사를 증거하면서 신앙고백이 자랍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에게는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증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등에 업고 섬김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모두 배교하고 배신하고 부인하고⋯ 도망을 가 버립니다. 십자가 앞에서 간증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간증은 고백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고백이 지식이요 마음이라면 간증은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는 자기희생이요 포기요 죽음입니다. 이게 없으니 간증이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신앙고백은 멋들어지게 잘 했습니다. 이건 입술의 고백입니다. 돈이 들지 않고 자기희생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공짜로 구원을 받고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니, 누군들 혹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신앙고백을 했으면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왕으로,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내가 주인노릇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어(主語)가 되고 나는 그분의 동사가 되어야 합니다. 동사(動詞)는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종의 자세입니다. 내가 예수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번영신학은 내가 주어이고 하나님이 동사입니다.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내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내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선택권 결정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심히 믿고 예배합니다. 중동의 우상종교들이 이 모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냥 종교우상에 중독되지 않았습니다. 우상은 나를 위해 존재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우상이 몽땅 갖다 줍니다. 우상이 나의 동사가 됩니다. 그만큼 메리트가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번영신학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우상종교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목적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여호와 종교는 아무리 선민이라 해도 ‘디메리트’, 매력 없는 하나님이 됩니다. 그래서 얻어터지면서도 우상종교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신앙고백은 아주 잘 합니다. 수고하지 않고 돈 들이지 않고 자기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간증의 삶은 없습니다. 말로는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 하면서도 내가 주인입니다. 내 감정이 주인이요 내 기분이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내가 주인노릇으로 종교심만 키우니 쇠고집이고 내놓을 간증이 없습니다. 간증이라고 해봐야 맨날 예수 믿어서 돈 벌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자녀들 잘 되었다는 것! 그런 간증은 일반종교에서 쌓이고 쌓였습니다.

 

주님께서 주어가 되고 내가 동사가 되어 일어났던 하나님의 역사-그런 간증이 진짜 간증입니다. 이런 간증을 만들어 낼 때 신앙고백도 함께 성장하고 인정을 받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세상은 기독교가 두 개입니다. 구교 신교 구분이 아닙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여호와 하나님 기독교! 종교기독교는 내가 주어, 하나님이 동사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리고 조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기독교! 하나님이 주어이고 나는 동사입니다. 나는 주님의 종이요 하인입니다. 그분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고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을 간증하며 삽니다. 그래서 주여~ 하면서도 속으로는 여봐라! 주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여~ 주인이여~ 주어로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나의 선택권을 드리며 사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고백과 간증! 두 가지가 제대로 있을 때에 기독교는 다음세기에도 능력 있는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거룩한 여호와종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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