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살아가는 기술(技術)(요한일서 2:12~14)

갈렙처럼 2025. 2. 1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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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기술(技術)

요한일서 2장 12~14절

 

서론

누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 정신병원 앞에서 바퀴가 덜커덩거려 내렸는데 볼트 하나가 달랑~ 거립니다. 볼트를 뽑아 바퀴를 고정시키려다 그만 놓치고 하수도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낭패입니다. 정신병 환자가 울타리 너머로 빠꼼이 쳐다보고 있다 다른 바퀴 볼트에서 하나를 뽑아 바퀴를 고정하고 얼른 카센터에 가라 합니다. 너무 정확해서 정신병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똑똑한데 왜 정신병원에 있냐?”

“나는 미쳐서 여기에 있고 너는 미련해서 고생하고 있어~”

누가 나은 사람입니까? 이런 난처한 처지에서는 차라리 미친 쪽이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미련하게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이, 배움, 신분에 관계가 없이 어리석게 행동합니다. 이런 경우를 철이 없다, 철딱서니가 없다… 라고 합니다.

 

‘철이 없다’, ‘철부지’를 말합니다. ‘철부지’의 ‘철’은 원래 계절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역(周易)의 영향을 받은 동양권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뜻하는 ‘철’을 ‘지혜’를 나타내는 말로 썼습니다. 여기에 ‘알지 못한다’는 한자 ‘부지’(不知)가 합해져 ‘철부지’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철부지’는 옳고 그름을 헤아릴 줄 모르는 어린애, 사리 분별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추운 겨울에 짚신 신고 마을을 싸돌아다녀서 어른들이 사리 분별할 능력이 없다는 철모른다, 철없다…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웃음 받을 일, 욕먹을 일을 하는 처신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 ‘네이버’에 질문을 올렸습니다. 남자의 단점, 여성의 단점 다섯 개만 알려주세요! 누가 답을 올렸는데, 다섯 개씩 올릴 것이 뭐가 있나? 한가지면 된다! 철딱서니가 없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평할 때 참 철딱서니가 없다! 하면 최악의 평입니다.

 

철부지가 아니라 철이 든 사람, 철딱서니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철딱서니 있게 처신하는 사람…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욥,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다섯 권을 지혜서라 합니다. 성경에서 지혜라고 할 때 그것은 ‘살아가는 기술’을 말합니다. 살아가는 기술이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데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연예의 기술, 싸움의 기술, 돈 버는 기술… 이런 기술들이 있어야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는 데도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가는 기술을 터득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창조하셨나, 그 구성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창조했다고 합니다(창1:26, 27). 하나님은 삼위로 복수이면서 단수입니다. 삼위의 고유한 특성들이 인간 창조에 레코딩된 것입니다.

 

성부-아버지의 속성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속성은 성숙, 권위, 위엄, 존경입니다.

성자-청년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에서도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성령-장식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모습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행복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사람의 성품을 이렇게 다양성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요한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2절, 자녀들아… 13절, 청년들아… 13절, 아비들아…

14절에서는 동시에 나옵니다. 자녀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

13절, 아비들아…

 

세 연령대를 말하지만, 우리 속에 있는 세 모양을 말한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주님의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을 말할 때…

어린아이들은, 12절, 죄사함에 대한 실제적인 효과가 큽니다.

청년들은 13절 하반절, 죄사함에서 더 나아가 죄와 싸워 이기는 용기와 열정이 있습니다.

아비들은 13절,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 선재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단계가 다릅니다. 어린이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하나님을 알고, 청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아 힘차게 일하고 어른들은 하나님과 즐거운 친교를 나눕니다.

 

14절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알고

청년들은 아버지가 공급해 주는 힘으로 승리하고

어른들은 지적 수준이 높아 선재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이런 영적 지식과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을 가지게 될 때 세상과 대적해서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계속적으로 신자들을 유혹하고 공격하고 미혹합니다.

 

16절을 봅시다.

육신의 정욕:청년이 받을 수 있는 세상 유혹입니다. 청년들은 육적인 힘이

안목의 정욕: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세상 유혹입니다.

이생의 자랑: 어른들이 받을 수 있는 세상 유혹입니다.

 

이런 유혹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하려면 상황에 따라 우리에게 있는 성부의 특성, 성자의 특성, 성령의 특성이 나와야 합니다. 성부는 권위가 있는 어른이요 성자는 일하는 청년이요 성령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랑스런 면이 있습니다. 3요소가 균형있게 작동하고 역사할 때 세상을 ㅅ랑하지 않고 이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가는 기술이 있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자 토마스 하리스는, 인간의 속성을 세 영역으로 분류, 분석했습니다.

‘P’(Parent 부모)의 영역

‘A’(Adult 청년)의 영역

‘C’(Child 아이)의 영역

 

이렇게 사람은 부모, 청년, 아이들이라는 영역이 삼각형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아직도 전혀 나이가 들지 않는 것은 어린이라는 ‘C’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세 가지의 부분에 어떻게 적당하게 입력을 시켜놓는가? 하는 과정입니다. P칸에는 어른으로서의 품위, 존경 등을 레코딩 시키고, A칸에는 청년의 용기와 열정, C칸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입력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하면서 적재적소, 적시에 아버지의 품성이 나가야 할 때는 아버지가, 청년이 나가야 할 때는 청년의 품성이, 어린아이 품성이 나가야 할 때는 어린아이의 솔직함과 사랑스러움이 나가도록 하는 게 교육입니다. 그런데 지금 학교에서는 성적 위조 교육으로 이런 균형 잡힌 인격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교육을 받는 우리들은 세 영역이 삼각형처럼 균형있게 작동해야 합니다.

“아비들아”-성숙하고 권위 있고 존경받는 자아입니다. 아이를 바라볼 때 부모들이 든든하고 젖을 물리는 엄마의 마음이 든든합니다. 아이에게 P의 부분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잃은 부모가 아이를 의지하는 것은 그 아이에게 P의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아”-씩씩하고 합리적이고 의지적이고 용기 있는, 그리고 설레는 청춘의 자아가 있습니다. 권사님들이 옷을 갈아입는 데 내가 문을 열었습니다! 권사님들이 기겁했습니다. 보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래도 기겁을 하는 것은 권사님들 속에 A 부분-청년의 부분, 아가씨의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아”-친근하고 사랑스럽고 순진하고 천사 같은 자아가 있습니다.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야외로 나가보면 장로님들이 재미있게 잘 어울리십니다. 저는 그런 게 참 고맙게 여겨집니다. 그것은 그분들 속에 어린이의 요소-C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좋은 균형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지(知) 정(情) 의(意)라고 합니다. 지-지식, 정-감정, 의-의지입니다. 이 세 부분에 좋은 것들로 입력되어야 합니다.

 

지(知)-좋은 지식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 보면 쓸데없는 지식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좋지 않는 것들만 잘 압니다. 이것은 P부분에 나쁜 P를 입력시키는 것입니다.

 

정(情)-감정이 풍부해야 하는데 감정이 너무 식어있습니다. 심술로 차 있습니다. 사람이 멋을 알아야 하고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 빡빡합니다. 멋이 없습니다.

 

의(意)-사람이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아니라 뭔가 꾸준함이 있어야 합니다. 변덕이 심한 것은 A부분에 잘못된 의지가 입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부모나 변덕이 심한 사람들에게서부터 자기도 모르게 심한 변덕이 입력되었을 것입니다.

 

지정의(知情意)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언제, 어떤 경우에 세 가지가 잘 표현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적재적소에 잘 활용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나와야 할 때 부모가 나오고 청년이 나와야 할 때 청년이 나와야 하고 아이가 나와야 할 때 아이가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면 맛이 간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총동원주일-여 집사가 앞집 아저씨를 데려왔습니다. 할 수 없이 나온 초신자이기에 재미가 있을 리 없습니다! 재미없으니 주보를 보다 이름이 낯익어서 주보 보고 얼굴 보고… 누구더라? 필름이 돌아갔습니다. 초등학교 친구입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저 새끼가 목사 되고 웃긴다…’. 반갑고 대견하고 열심히 쳐다보니 이번에는 목사가 설교에 방해를 받습니다. 너무 다르게 나오니까.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이 나와 인사하는데 맨 나중에 나오면서 반갑게 웃습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야! 나 발산초등학교 아무개야” 했습니다.

 

그때 목사가 “아, 그러시군요. 근황이 어떠십니까?” 이러면 됩니까? “에이, 강아지 새끼!” 화를 내면서 친구는 가버립니다. 이럴 때는 뭐가 나와야 합니까? 아이, C가 나와야 합니다. “이 강아지 새끼 어디 있다 왔어? 우리 집에 가자” 그래야 균형이 잡힌 인간입니다.

 

인간은 다양하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 활용되어야 합니다. 적응하지 못하면 불균형을 이루게 되고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맛이 가버린 사람이 됩니다.

 

“맛 갔어!”-치명적인 욕입니다. “목사가 맛이 갔어!” 목사는 목사 맛이 나와야 하는데 맛이 가버렸다면 얼마나 치명적입니까? “저 여자 맛 갔어!” 여자는 여자 맛이 나야 합니다. 얼마나 치명적입니까? 아이들에게는 아이 맛이 나와야 합니다. 아버지가 붕어빵을 사왔는데, 어른들처럼 “아버지, 이런 것은 왜 사오십니까? 경기도 어려우신데! 아버지나 잡수세요! 나는 앞으로 먹을 날이 많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P가 나온 것입니다. 이런때는 C-이들이 나와야 합니다. 맛이 간 아이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적재적소에 나와야 할 것들이 나와야 합니다. 아버지, P가 나와야 할 때 아이-C가 나와버리고 청년-A가 나와야 할 때 아버지-P가 나와버립니다.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이 문제를 크게 일으키는 것은 처신들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적재적소에 맞게 처신하는 맛깔스러운 그리스도인들로 채워진다면 상식이 통하는 교회가 되고 그만큼 교회는 물 흐르듯 흘러가는 생명의 물 ‘아쿠어’ 교회가 될 것입니다. 맛을 잃고 맛이 가버린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기 시작하면 교회 역시도 맛이 가버린 꽉 막힌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교회를 원하세요? 세 영역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부의 부분, 성자의 부분, 성령의 부분으로 우리를 균형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균형이 깨어지고 잘못된 교육과 잘못된 경험들로 속성은 크게 일그러지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처신들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교육입니다. 좋은 것들로 새로운 입력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P부분-아버지의 부분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들을 담아야 합니다.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지적인 성숙함과 권위적인 자아-넓은 마음과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A부분, 청년의 부분-이것을 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일하셨고 일하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공중에 나는 새-일하는 새입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제자 택할 때, 허다한 사람이 아침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좋아하는 팬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지금은 남들이 앉아있을 때 그물을 다듬고 있는 어부들-일하는 어부들을 택하셨습니다. 팬이 아니라 일꾼들을 택하셨습니다. 지식이 있고 일하지 않는 서기관들보다는 지식은 없지만 열심이 있는, 정열이 있는 일꾼들을 원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실력 있는 서기관이나 사두개인들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요즘 교회가 점점 대형화되어 갑니다. 설교가 좋고 교육시스템이 좋고 성경공부 시스템이 좋으니 몰립니다. 이들에게는 A부분이 개발되지 않습니다. 아이들 부분-C부분만이 높아집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금방 시험에 들고 넘어집니다. 성경을 아무리 배워도, 그래서 C부분이 발달해도 일하지 않는다면, 수고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일하지 않는 교인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제자가 될 것입니까?

 

“청년들아!”-일하는 사람들. 청년들입니다. 청년의 자질이 개발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청년들이 많아야 교회가 건강하고 든든히 세워집니다. 작은 예수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C부분-아이들 영역이 더 발달해야 합니다. 아이들 부분은 성령의 부분입니다. 성령은 감동을 줍니다. 말씀을 읽을 때 감동을 주고 눈물을 줍니다. 성령은 즐거움을 줍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우리에게 아이들 영역이 더 많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감동이 풍부하고 사랑스러운 자아들. 감동을 주는 자아들이 넘쳐야 합니다. 웃는 행복은 아이들의 것입니다. 우리 속에 아이들 부분의 분량만큼 행복의 지수가 있습니다.

결론

성경교육은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P-아버지 부분, A-청년의 부분, C-아이들 부분이 고루고루 갖추어진 균형잡힌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베다니 나사로 3남매 집을 자주 찾으셨습니다.

세 남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가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스런 동생 역할이 되었습니다. 세 남매들도 예수님에게서 아버지를 느끼고 친구를 느끼고 오라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했고 좋아했습니다. 예수님도 지상생활을 하실 때 유일하게 허물없이 오며가며 들리는 친숙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상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독생자, 성령의 영이 있는 균형 잡힌 분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강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셨습니다. 주님을 닮아 균형 잡힌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철든 사람들, 살아가는 기술이 아주 좋은 성숙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채워지는 부흥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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