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릿이 있어야 갈멜도 있다!
열왕기상 17장 1~7절
서론
이번에(2019년) 우리 교단 부총회장 후보로 새에덴교회 소목사님이 단독 입후보했습니다. 부총회장은 1년 후이면 총회장으로 거의 자동 승계입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은 부총회장을 놓고 경합이 대단했습니다. 이번에는 소목사님으로 단일후보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번 총회에도 대전의 오목사님, 인천의 이목사님이 많은 분들에 의해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았습니다. 모두 부총회장 총회장감으로 손색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두 분이 소목사님에게 양보를 했습니다. 3년마다 한 번 오는 기회를 놓아버린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두 목사님은 자신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목회경력이 떨어지는 목사님에게 양보했을까요? 얼마든지 당선 가능성도 있는데 말입니다.
제 생각에, 그분들은 시대를 읽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생태계는 비상시국입니다. 한국교회를 군소종교로 만들려는 세력들이 결사적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치밀하게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그들 세력이 힘을 얻고 위협적인 것은 ‘프레임’ 전략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레임(frame)은, 자동차, 자전거의 뼈대, ‘틀’을 말합니다.
동성애 프레임, 인권 프레임, 북한 프레임, 페미니즘 프레임… 모든 것을 프레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동성애 등은 죄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 프레임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동성애 인권 등에서는 왜 그리 극성인지…. 사실 이 배후에는 기독교를 공격하고 한국교회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 교인들은 제대로 판세를 읽기 못하고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대놓고 동성애, 북한 인권 등을 설교하지 못합니다. 점잖은 명성에 흠이 갈까봐, 교인들이 떠날까봐, 교회가 시끄러워질까봐… 그래서 침묵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동성애… 등 이런 일에 대해서 설교하지 못합니다. 비겁해서 못하고 교회를 걱정해서 못합니다. 사실은 교회 걱정이 아니라 내 목회 걱정입니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는 세상의 비판과 공격에 떨고 있습니다. 골리앗의 조롱 앞에서 사울 왕과 장수들, 그 병사들이 떨고 있는 것처럼 그런 인본주의 세력들이 교회를 대놓고 조롱하고 공격하는데 한국교회는 명예와 지위를 지켜내려고, 좋은 목사라는 말을 들으려고, 교인들이 떠나갈까봐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목사님은 안 그렇습니다! 그분은 누가 뭐래도 할 말을 합니다. 대놓고 동성애를 강력하게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목사님은 소목사님이 으뜸일 것입니다. 그 분은 스스로를 엿장사 출신이라고 합니다. 무슨 무슨 장사를 했다고 그냥 지난 과거를 말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내려갈 것도, 체면을 차릴 것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살고 있는 그대로 목회를 하기에 남의 눈치를 볼 것 없고 기독교 적대세력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데뽀입니다. 무데뽀(無鐵砲, 無手法)는 일본 말로 ‘일의 앞뒤를 잘 헤아려 깊이 생각하는 신중함이 없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막무가내’, ‘저돌적인 사람’, 한 마디로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점잖을 떨고 자기 인격과 명예를 지키고 부흥을 위해 위로! 위로! 힐링! 힐링! 하는 목회자들이 아니라 죄는 죄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대적한 세력이다! 이렇게 전하고 외치는 야성의 목회자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이런 비상시국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무데뽀’처럼 보이는 소 목사님을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교단이 지금은 이런 분이 필요하기에 단일후보로 내세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목사님이 ‘무데뽀’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데뽀’입니다. 이런 단어가 있겠습니까마는 무데뽀의 반대어로 써본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나 글을 읽으면 날마다 매해마다 성장하고 달라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그냥 막 설교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어느 설교보다도 훌륭한 스토리텔링이고 좋은 글들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소 목사님에게서 엘리야를 봅니다. 엘리야는 사실 지도자로 나설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길르앗 산골에서 제멋대로 살던 사람입니다. 선지자 교육을 받은 적도 정기적으로 성전을 출입하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께서 그를 스카우트하시고 그를 사용하십니까? 그가 살던 시대는 비상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돈의 딸 이세벨이 북왕국 아합 왕과 결혼하면서 이스라엘을 바알종교의 국가로 만들려고 합니다. 가나안은 다신론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왔는지 히브리인들의 유일신교가 들어왔습니다. 정당에서 집단체제가 강하겠습니까, 단일체제가 강하겠습니까? 당연히 단일체제가 구심점이 강합니다. 다신론은 신들이 많기에 종교구심력도 약합니다. 유일신교는 한분의 신이기에 뭉치는 힘이 강합니다. 점차 여호와의 종교가 가나안을 모두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알의 원조격인 시돈왕은 공주를 북왕국 아합과 결혼시켜 종교적인 통합을 꿈꾸었고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들은 모두 죽었고 구금당했고 피했고, 아니면 바울 종교에 협조했습니다. 아합 왕 부부의 우상 숭배 정책이 워낙 강력했기에 누구든 목숨을 걸지 않고는 아합 정권에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제단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선지자들은 숨어버렸고 백성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이중 처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 때는 여호와의 이름을 만방에 알리던 신정국가 이스라엘이었지만 지금은 소수의 무리들만이 주님을 의지하며 예배하고 있었니다. 여호와 종교는 숨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악독한 왕이 우상숭배 죄악을 강요하는 포악을 떨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비상한 방법으로 처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이것저것 따지는 정식 선지자들은 무서워서 못합니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재다가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산 사나이가 느닷없이 선지자로 차출된 것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무식하고 무대뽀적인 지도자도 필요한 것입니다.
아합 정권의 시대가 엘리야를 불러냈고 지금 한국교회가 소목사님을 불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엘리야가 처음부터 능력의 선지자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능력의 선지자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고 3년 6개월 동안 가물었던 땅에 폭우를 초대하는 그 힘은 모세의 능력에 비견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라면 누구나 불의 사자 엘리야의 능력을 부러워하고 꼭 그런 능력은 아니어도 그 10분의 1의 능력이라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갈멜산의 능력만 주목할 뿐이지 이런 능력을 만들어 낸 그릿 시냇가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렇게 능력없는 교회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시국에는 센 사람들과 맞불작전을 펴십니다. 그래서 센 사람을 상대로 올립니다. 하나님께서 내세우는 센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훈련되어 만들어 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무데뽀를 마냥 사용하지 않고 ‘데뽀’로 만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엘리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네 가지의 훈련을 하십니다.
순종에 대한 훈련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불러내시고 세 가지 명령을 내리십니다.
-아합 왕을 찾아가서 3년 6개월의 가뭄을 예고하라! 이건 아합 왕에게는 저주성 발언입니다. 그 자리에서 처형당합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죽었고 피했는데 제 발로 왕궁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릿 시냇가로 가라! 그는 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동적인 활동가입니다. 그는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숨어있으라 하십니다. 순종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르밧으로 가라! 사르밧은 이세벨 왕비의 고향입니다. 바알 숭배가 횡행하고 선지자들이 핍박당하고 있을 때, 이세벨 안마당으로 가라 하십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시돈 지역의 사르밧 마을까지는 대략 140km입니다. 서울과 대전 간의 거리입니다. 아합 정보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엘리야의 종적을 수색하는 상황에서 먼 거리 이동은 쉽게 나설 길이 아닙니다. 순종하기 어려운 명입니다.
어느 것 하나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이런 시험 앞에 어떻게 합니까? 순종합니다!
5절,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아합 왕을 찾아가서 3년 6개월의 가뭄을 예고합니다!
이건 아합 왕에게는 저주성 발언입니다. 그 자리에서 처형당합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죽었고 피했는데 제 발로 왕궁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그릿 시냇가로 갑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사르밧으로 갑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순종의 길을 갑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훈련의 시작입니다.
기다림과 침묵의 훈련
엘리야는 자기중심의 믿음은 강했지만 하나님의 손에 전폭적으로 사로잡힌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명자의 길, 그 자체를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도 급해 일단 엘리야를 불러내어 왕에게 가뭄예언을 선포하라 했지만 싸움은 그걸로 끝이 아니고 이세벨 왕비는 악의 화신입니다. 그런 왕비와 대결하려면 열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믿음과 내공이 필요합니다. 곧 갈멜산에서 바알우상숭배자 450명과 무시무시한 전투를 하고 승리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를 훈련도장으로 삼아 훈련을 받습니다. 우선은 기다리는 훈련입니다. 엘리야는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급한 성질이 그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기다리지 못하여 구원자로 자처했다 살인자가 되어 도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미디안으로 망명해서 40년을 목자로 기다리면서 지도자로 준비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도 같은 훈련을 하십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선지수련생들처럼 변변한 선지자 교육도 받지 않았습니다. 비상시국이 벌어졌기에 하나님께서 일단은 급히 그를 불러내서 아합에게 경고의 나팔수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그건 한 번의 임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죽음을 담보로 치열하게 대결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엘리야도 그에 맞는 내공을 쌓아야 합니다. 그건 훈련으로만 되어질 일입니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적막한 곳에서 고독함과 외로움과 싸워가며 기도하고 묵상하게 만들면서 견디는 법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오래 기다리는 만큼 기다림의 물통에 하나님의 능력은 채워지는 것입니다.
성질을 죽이는 훈련
또한 성질을 죽이는 훈련도 받아야 합니다. 사내대장부에게 피신과 은신이라는 비겁함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는 휘어지며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러져 죽는 쪽을 택하는 강한 남자입니다. 더구나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들이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습니다. 까마귀는 불길한 새입니다. 율법은 까마귀를 부정한 새로 규정하고 식용을 금합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데, 세상에…, 그런 부정한 새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사내대장부가 목숨을 연명하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일이고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참고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은 ‘활동가’가 아니라 ‘훈련생’이 되기를 원하고, ‘외치는 자’가 아니라 ‘침묵’하는 법을 배우라 하십니다.
엘리야는 순종합니다. 이런 순종과 훈련이 하늘에서 불과 물을 불러오는 ‘불의 사자’ ‘물의 사자’ 엘리야를 만들어 냅니다. 그가 제대로 된 선지자로 세워지는 것은 아합 왕궁이 아니라 그릿 시냇가입니다. 그릿 시냇가의 순종과 자기포기가 있었기에 갈멜산의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과 훈련을 통해 엘리야의 믿음은 더욱 강해지고 더욱 강력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그 훈련이 갈멜산에서 불로 물로 나타나게 될 줄은 스스로도 몰랐습니다.
자존심을 죽이는 훈련
그릿 다음의 훈련 장소는 사르밧입니다.
사르밧에서의 훈련은 지독한 것이 아니라 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망인의 마지막 남은 음식을 취하라 명하십니다. 극심한 가뭄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라 염치없는 부탁입니다. 광야에서 아무 거나 먹으며 살아온 산사나이에게 거지처럼 여인에게 먹을 음식을 부탁하다니, 차라리 굶고 죽는 게 나았습니다. 수치스러움을 참고 여인에게 먹을 것을 청하자 여인은,
“집에 남은 것이라곤 항아리 밑바닥에 깔린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뭇가지를 주워 빵을 구운 다음에, 어린 아들과 먹고는 죽을 참입니다.”
엘리야는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궁색한 여인에게서 요기를 해결하라 하시다니, 그건 마지막 남은 양식을 뺏어 먹는 살인강도의 일입니다. 그만큼 자존심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존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먹을 것을 구했고 여인이 순종할 때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계속 생기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다고 훈련을 뿌리쳤으면 기적은 없었고 그냥 단기간 아합 왕에게 3년 가뭄이나 예언하는 1회성 소모품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갈멜산의 엘리야만 주목합니다. 갈멜 산의 엘리야는 모세와 비견될 굉장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능력의 10분의 1만 있어도 어디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물불을 주무르는 엘리야의 능력만 부러워하지 그가 갈멜 산의 능력을 얻기까지, 그에게 주어진 노력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냥 사용화지 않고 처음에는 무데뽀를 불러내지만 이렇게 은밀히, 모질게 엘리야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는 기다림과 보호의 손길을, 사르밧에서는 자존심을 죽이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철저히 해체하는 고난도의 훈련이었습니다.
사르밧은 ‘녹이는 곳’이란 뜻입니다. 엘리야에게 사르밧은 훈련의 마지막 코스입니다. 그는 용광로에 들어가 철저히 부서지고 태워지고 불의 사자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갈멜산의 대결시합장으로 그를 출전시킵니다. 철저히 훈련시킨 챔피언 선수를 내보내신 것입니다. 그만큼 아합과 이세벨은 강적이었습니다. 사단의 세력이 강하면 하나님은 더 강한 세력을 준비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그리고 그의 성공담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엘리야에게서 제대로 배워야 할 점들입니다.
결론
지금 나의 그릿 시냇가는 무엇입니까? 가난, 질병… 실패, 인생이 무너진 것…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막막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야성의 사나이가 숨어 지내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고… 차라리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합에게 나아가 정면으로 대결하다 장렬하게 죽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그릿 시냇가가 있었습니다. 모세에게는 미디안 광야 40년이었고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배신하고 낙향했던 갈릴리바다가 그릿 시냇가입니다. 바울에게는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는 빼지가 아니라 아라비아 사막의 외롭고 침묵하는 3년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외롭고 지치고 힘들고 자존심이 무너졌던 이런 상황에서 다시 주님을 만나고 일어선 사람들이 80이 넘은 모세처럼 떨기나무에 불이 붙고 베드로처럼 성령 충만하여 그 설교로 5천 명씩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바울처럼 가장 복음적인 설교가 신학자 전도자의 생애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그릿 시냇가의 상황이라 해도 갈멜을 기대하며 기다리며 준비하면 다시 쓰임을 받는 날들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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