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용도(用度)
갈라디아서 2:19~21
서론
20여년쯤 되었는데 중국여행에서 샴푸를 로션으로 알고 얼굴에 발랐다 하루 종일 얼굴이 칙칙해서 애먹었던 일이 있습니다. 한문으로 알린 용도를 제대로 몰라 일어났던 해프닝입니다. 옛날 농촌 우물에 펌프질을 해서 물을 얻었습니다. 안방에서 쓰던 놋요강을 씻으려 나뒀는데 서울에서 온 사람이 그걸로 물을 떠마셨습니다. 요강이 뭔지 제대로 몰라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게 어떤 물건의 용도를 제대로 모르면 엉뚱한 일이 발생합니다. 그릇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용도들이 잘못 쓰여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우리 인생에 어떤 용도로 쓰이는 것입니까? 기독교를 믿어 착하고 선한 삶을 위해서, 내적 평안을 위해, 병에서 고침을 받기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어떤 이들은 부모 때부터 내려오는 종교이기에 대물림을 해서 그냥 믿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용도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십자가를 말합니다.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러니까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 기독교의 용도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악인을 벌하는 형틀입니다. 페르시아, 애굽, 앗수르에서 고문 형틀, 사형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건 좋은 일이지요! 어떤 중범자들은 광장에서, 그것도 죽은 시신으로 2,3일을 전시해 놓음으로 경고장이 됩니다. 십자가에 형틀에는 죄목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죄를 범하면 너도 같은 신세다! 라는 경고장입니다. 이런 경고를 통해 그런 죄를 짓지 않으면 나름대로 좋은 용도입니다.
로마제국이 십자가 형틀을 도입하면서 처형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이걸 사회질서를 위한 처벌보다는 권력에 대한 도전, 특히 로마제국에 반항하는 반역자들을 위한 사형틀이 되었습니다. 처형 형태가 잔인했던 만큼 로마시민에게는 사용하지 않고 이방인 반역자들이나 노예들이 죄를 지었을 때 본보기로 처형하게 되면서 로마제국의 권력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유럽에 들어가면서 악령들을 내쫓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지 않게 하는 부적(符籍)으로 사용했습니다.
현대인들을 대부분 장식품으로 목에 걸고 다닙니다. 그런데 영화… 등에서 보면 조폭이나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목걸이 장식으로 걸고 다닙니다. 특히 왜 그럴까요? 자신들의 죄들을 덮기 위한 장식품일까요, 아니면 내면의 괴로움을 성스런 십자가로 포장하기 위한 행위일까요?
이런 저런 유형의 십자가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의미가 180도 달라집니다. 십자가는 ‘처형’의 개념에서 ‘구원’의 개념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십자가의 용도를 다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알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왜 오셨나요?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천사가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낼 자이니라” 즉 구세주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 ‘죄’는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죄에서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우선, 본질적인 죄에서 구원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 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로마서 1장 29절 이하에는 죄에 대한 21개의 목록이 열거됩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어느 짐승이 이런 죄가 있습니까? 짐승들이 이간질을 합니까? 중상모략을 합니까? 사람을 톱으로 싸고 불러 태웁니까? 동성애가 있습니까? 모함이나 음모를 꾸밉니까? 짐승의 세계에는 약육강식(弱肉强食)만 있을 뿐 추접한 모리배들은 없습니다. 연쇄살인범들을 보면 이보다 더한 죄가 있겠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들은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그 배후에 또 다른 죄의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죄입니다. 그 죄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28절)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가 모든 죄들의 숙주(宿主)입니다. 죄는 여기에서 발생되고 항상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관주에는 ‘마음에’를 ‘지식에’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죄,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죄! 즉 불신의 죄입니다. 마음에 들이지 않는다고 죄가 전부가 아닙니다. 마음에 들이기는 하지만 ‘마음 중심에 두기를 싫어하매’ 교회에 다니면서 내가 늘 결정권의 중심, 선택의 중심에 있다면 그게 바로 본질적인 죄입니다.
이런 죄는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 리스도를 앞세운다 말하지만 내가 주어(主語)가 되고 예수님은 동사(動詞)가 된다면 이건 바로 하나님을 중심에 두기를 싫어하는 죄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믿음생활을 하지만 내 안에서 계속적으로 죄가 발생합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내가 죄인이다, 내 삶의 중심이 죄인이다, 내가 전적으로 주님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죄인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 출발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 그 출발지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현상은 언제나 자기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합니다. 뱃사람으로 단순하게 살았던 베드로가 무슨 죄들을 그리 지었을까요? 예수님 앞에 설 때에 자신의 한없는 죄인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왕족이면서 상당히 괜찮은 인격자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 선명했습니다. 선명한 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았더니 전부 죄덩어리입니다. 그래서 5장에서 무엇무엇 하는 자들은 화있을 진저! 여섯 번을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니 자신의 의는 걸레입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라고 두려움으로 탄식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는 초창기가 아닙니다. 그의 신학이 최고로 오르고 특히 로마에 있는 신자들은 바울을 성자처럼 여기고 있던 때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내랴!”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죄된 본성을 오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인물들의 철저한 죄의식-자기 부정은 윤리적인 죄, 도덕적인 어떤 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다! 하나님 없는 삶이 큰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내 잘못을 뉘우치며 그분의 자비와 긍휼 앞으로 나아가는 회개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이 있는 회개입니다. 이런 죄에서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설 때에 자신의 죄된 부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본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처벌당했지만 죄성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을 제한하고 독버섯이 나오게 합니다. 신자들이 때로는 더 악하고 사기를 치고 독해지는 경우입니다.
밥상에 오른 낙지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꿈틀거립니다. 입안에 달라붙거나 목구멍에 달라 붙어 죽게도 만듭니다. 죄가 그런 것입니다. 죄 자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사함을 받았지만 죄성은 계속 우리를 죄짓게 만듭니다. 십자가로 수염이 자라듯이 매일 방출되는 죄들을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용도입니다.
두 번째 ‘자기의(義)’에서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의(義)는 죄의 반대성향이기에 상급을 받을 믿음입니다. 그러나 ‘자기의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의라면 그건 교만이요 죄가 됩니다.
성경은 자기 죄에서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에서의 구원도 말합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것,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죄입니다. 신앙인들이 범하기 쉬운 죄들입니다. 자기 의(義)는 교만을 가져옵니다. 다른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입니다. 갈라디아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구원의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열렸지만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율법을 행해서 도덕적인 높은 수준에 이를 때 구원이 유지된다,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의(義)로 구원 얻겠다! 행위종교의 기독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19절)고 합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함께 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의로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나를 의롭게 하는 믿음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자기 의를 철저히 부정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의로움을 의지하는 죄에서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었습니다.
우선 서기관입니다. 그들은 골방에서 오직 성경만 연구하고 해석하고 필사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십계명을 613가지로 잘게 잘게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죄를 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십계명 항목들을 얼마나 세분화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율법을 연구하고 구약을 가르치는 일에만 열중한 나머지 삶에는 등한시했습니다. 저들의 목적은 구약을 연구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골방 밖의 삶이 없기에 죄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지식적인 자기의에 빠졌습니다. 자기주장에 맞지 않으면 그건 이단이요 사이비입니다. 그래서 공격하고 비방했습니다.
바리새파는 대문을 걸어 닫아버린 사람들입니다. 세속과 분리를 했고 하자인생들과 모든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처럼 1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지 않거나 하루에 세 번 기도시간을 갖지 않으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들을 정죄했고 자신들은 의로움으로 무장했습니다. 하자인생들에 대한 관용이나 관대함은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수준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죄인 만들기에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쇠고기는 너무 오래 삶거나 구우면 딱딱해지고 질깁니다. 남을 포용하지 못하고 자기들만 똘똘 뭉치니 냉정한 율법주의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자기의가 죄였습니다.
사두개파들은 너무 많이 열어버렸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혼합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유대교가 지닌 가치까지 남을 포용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그러면서 외골수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꼴통보수라 비방했습니다. 그들 역시 자기의에 빠진 사람입니다.
유대교의 세 파를 배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산에서 배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산에서는 필요도 없는 배를 평생 짓고 있습니다. 율법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두개파-배를 바다에 띄웠는데 너무 문을 여러 물이 많이 들어와 가라앉아버렸습니다.
바리새파-너무 문을 걸어잠근 나머지 사람조차 태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다에 배만 떠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입니다. 그리고 자기의를 만들어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자기 죄에 매여있는 사람들의 죄를 십자가에 달려서 해체해 버렸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의(義)를 해체시키는 일을 합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이런 자기 의(義)를 해체시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죄에서 나와 구원을 누리게 합니다.
결론
비행기는 버스처럼 바퀴로 시속 10킬로로 가면서 승객을 이동시키기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수백 킬로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승객을 이동시킵니다, 그게 비행기의 용도입니다. 내 생애에 엄청난 분이 들어왔음에도 예수님의 용도를 몰라 한쪽 켠으로 서 있게 하면서 나는 비리비리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까? 아예 문밖에서 계시도록 하고 필요할 때만 불러들이는 것은 아닙니까?
한국에서의 유교의 용도는 조상제사입니다. 불교의 용도는 생로병사 윤회에서의 해탈입니다. 통일교에서 종교는 사업을 위해 이용하려는 용도입니다. 사이비들은 교주들을 위한 용도입니다.
기독교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사회구원, 봉사… 그보다 앞서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독교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선언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는 살게 하는 것이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구원을 일으키고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용도입니다. 이런 능력으로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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