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사도행전 19:1~7)

갈렙처럼 2025. 2. 17.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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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장 1~7절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을 통해서 신약교회가 시작되었으니 오늘은 전세계교회의 창립기념일에 해당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교사주일로도 지키고 있습니다. 성령과 교사,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교회교사로서의 사명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성령이 교사 여러분들에게 충만히 임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1. 믿을 때에 성령이 없이도 믿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예수 믿는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제자”라 함은 12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이고 사도행전에서 “제자”라고 함은 기독교인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뭔가 믿음이 시원치 않아요. 그래서 바울이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 바울의 질문에서 두 가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믿음, 성령이 없이 믿는 믿음입니다.

성령이 없이도 믿는 믿음은 지식적인 믿음, 역사적인 믿음이고 이적적인 믿음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역사적인 인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믿음은 지식적인 믿음으로 전달되고 역사 속의 인물로 예수를 가르칩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것보다는 이적을 체험하는 종교로 열심히 믿습니다. 이런 믿음은 기독교를 윤리종교나 도덕종교로 전락시킵니다.

 

이런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완전한 믿음이고 믿음의 흉내만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심도 있고 지식도 있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아보려는 나름대로의 의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성령의 역사가 들어가지 않기에 내 머리로 이해하게 되고 인간적 열심히 열심을 냅니다.

 

우리나라에 무당들이 많은데 무당들의 90%가 습득무당이라고 합니다. 배워 가지고 하는 무당이지요. 그러니 그게 얼마나 힘들어요. 진짜 무당? 어떻든 진짜 무당은 강신 무당입니다. 신이 내려서 무당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무당이 되어야 굿을 할 때 나름대로 신명나는 굿을 하게됩니다. 나머지 습득무당들은 돈벌이하느라 사람들을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인들도 그렇습니다. 배워서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많아요, 어려서부터 찬송을 배우고 따라 합니다. 신앙생활 자체를 배워서 그냥 따라 다닙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신이 나지 않아요.

 

바로 에베소교회 교인들이 인간의 의지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그렇게 된 것은 아볼로에게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18:24에 보면, 아볼로는 에베소에 와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무엇만 아는 선생인가? 일찍 예수의 도를 배워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라기보다는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요한은 성령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세례를 받을 것을 촉구했습니다. 인간의 어떤 외적인 행동을 더 강조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새 사람이 되고 성령으로 믿고 성령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에베소교회의 신자들은 미완성 교인들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볼로 교사들에게서 배움을 받는 학생들은 역시 같은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다른 부서도 그렇지만 교회 교사들이 성령에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아야 참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2절,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령이라는 것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두 세례는 다 받아야 합니다.

교인들이라면 누구나 물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김재준 목사라고 유명한 신학자가 계셨는데, 예수 믿고 3년을 열심히 믿었는데도 세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세례를 권하면, “저는 마음 속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형식적인 것은 필요 없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은, 설명을 잘 해주었습니다. 남녀가 연애하고 동거할 수는 있지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결혼식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무효라고 했습니다. 이에 감동 받은 김재준 목사가 감동을 받아, “그러면 결혼식을 해야지요!” 하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세례만 받고서는 안 됩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세례는 거듭남을 말합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단순히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체계, 사고의 체계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을 받고 나면 성령은 내 자신 속을 주장합니다. 예수에 대한 지식적 역사적 믿음만 아니라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인격적으로 거하심을 확신하게 되고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에베소교회 교인들은 성령의 세계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요한의 가르침에 동의함을 뜻합니다. 그 이상은 아닙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정죄와 심판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아볼로의 교인들은 반뜻하게 믿기는 했어도 성령의 기쁨과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임하는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엄숙한 종교인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런 종교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런 교사들이 자기와 같은 학생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요?

3. 성령이 임할 때에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교회 교인들은 모범적인 학생들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곧장 수긍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배우려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기를 원했고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때 에베소교회 교인들은 방언과 예언을 했습니다.

방언은 사도행전적 방언과 고린교교회의 방언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대인방언,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대신방언입니다. 대인방언은 설교 때에 사용되는 방언이고 대신방언은 기도할 때에 사용되는 방언입니다.

 

에베소교회 교인들의 방언은 설교할 때 사용되는 방언입니다. 그들은 이제야 복음의 비밀을 말하게 되었고 듣게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의 은사-즉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성령충만하게 되었고 선택받은 기쁨과 감격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을 받으면 이상한 체험을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더 거룩해 집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순수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의 일치를 뜻합니다.

 

성령충만은 자아가 뚜렷해집니다. 나를 바르게 보게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마음인가? 나의 잘못과 추한 것들을 내놓게 합니다. 성령충만을 자기몰두로, 도피처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충만은 현실을 바르게 보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로 맡기게 합니다.

 

성령충만은 죄사함의 은총과 함께 오는 기쁨입니다.

성령충만은 지혜로 나타납니다. 지혜와 지식은 다릅니다. 지식은 아는 것이고 지혜는 지식을 선용하는 실력입니다.

성령충만은 치료입니다. 성령님을 가리켜서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위로의 영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치료받아야 할 병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치료받지 못하기에 교회 안에서도 서로 상처가 됩니다. 성령님께서 치료해 주십니다.

결론

카다콤은 영성이 강하게 살아있던 교회입니다. 카타콤의 로마교회가 망하게 된 것은 중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를 주장하게 되고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자꾸 성령의 역사와 체험을 놓치고 있습니다. 성령을 강조하는 곳에서는 지나치게 신비적인 것으로 몰아가고 성령의 역사를 우습게 아는 이들은 교회를 종교집단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중용이 필요합니다. 중용은 균형감각입니다.

성령충만한 교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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