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천국에서는 바뀐다!(누가복음 16:19~31)

갈렙처럼 2025. 2. 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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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는 입장이 바뀐다!

누가복음 16:19~31

 

서론

어느 목사님이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진찰하러 온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목사님이라면 죽음에 초연할 줄 알았는데, 그 간절함이 조금 얄미웠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고 싶으세요?” “물론이죠.”

“술 좋아하세요?” “전혀 못합니다.”

“담배는 즐기세요?” "못합니다.”

“도박을 하거나 재미를 보는 젊은 애인이라도 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래요? 그래놓고 무슨 재미로 오래 살려고 합니까?”

 

목사님조차 천국이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 실감 못합니다. 그래서 “말똥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 그 심정이지요! 내세에 대한 준비가 안 된 것이지요! 죽음이란, 신앙 햇수나 신분이 아니라 천국이 친근히 느껴져야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앞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본 목사님이 “천당에 가고 싶은 분들은 앞자리로 나와 앉으세요”라고 말하자 다들 앞으로 나오는데 한 교인은 꼼짝 않고 그냥 앉아 있습니다. 평소에 믿음이 있던 분이라 모두에게 의외입니다.

목사님이 “집사님! 죽은 후에 천당 가기 원치 않으세요?”하고 묻자 그제야 “아! 죽은 다음에요. 물론 원하지요. 나는 저분들은 지금 당장 천당 가고 싶은 사람들인줄 알고…” 하면서 그제야 앞쪽으로 나오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심은 상당히 위기입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던 때는, 천국 설교, 재림 설교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림론 부흥사경회가 열렸고 그런 믿음으로 예배당도 짓고 헌금도 했습니다. 천국과 재림을 대망하면 예배당 건축이나 헌금에 소극적일 것 같은데, 더 열심을 냅니다. 천국과 재림 소망이 있는 분들이 신앙심이 더욱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무너지는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재림론에 대한 부흥이고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스운 것은, 정작 자신은 천국에 별 관심이 없으면서 강아지나 기르던 반려동물이 천국에 갔느냐? 애타게 믿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르던 반려동물이 죽어 천국에 가게 해달라” 추모 예배를 부탁하는 신자들이 늘어 아무개교회는, 목사는 반려동물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교회 규정을 신설하기로 했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나 성당을 대신해 ‘종교 맞춤형 빈소’를 팔기도 합니다. 애견장례업체 ‘꿈애’ 관계자는 “반려견 영정 사진 옆에 십자가, 성모 마리아 상을 두는 맞춤형 빈소를 20만~50만원에 팔고 있다”며 “이용하는 사람이 한 달에 100명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분들이 없겠지만, 동물은 영혼이 없기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강아지가 천국에 간다면 쥐, 고양이, 돼지. 소… 너도나도 천국에 간다고 날뛰면 천국이 뭐가 되겠어요? 굳이 동물을 애호한다면 천국에는 그보다 더 예쁜 강아지들로 넘친다, 생각하세요!

 

본문은, 과거에는 설교본문으로 유명했지만 재림론이 사라지고 천국에 대해 현실성이 없는 지금은 설교자들이 거의 찾지 않는 본문입니다. 저도 이 본문으로 설교해 본 것이 10년이 넘습니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죽으면 어떨까요? 오늘 제목을 읽읍시다!

 

“천국에서는 입장이 바뀐다!”

 

다른 말로 하면, 죽으면 입장이 바뀐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바뀔까요?다

장소가 바뀝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3: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 위(上)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요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인생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획득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신분을 ‘거듭난 자’ 라 합니다. 거듭 난 자는, 위에서! 하늘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전에 하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니 죽어서 당연히 위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에서 살아갈 영생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물에서 살 수 없고 물고기는 육지에서 살 수 없습니다. 거기에 살 수 있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하늘에서 영생할 수 있는 생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위로 올라갑니다. 태어난 곳으로, 생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생 생명으로 위로 올라갈 때,

 

22절, 천사들에게 받들려….

 

최고의 대접이며 영접입니다. 나사로는 세상에서 바닥 인생입니다. 환자로 살았지만 죽어서 땅(下)이 아니라 위(上)로 갔습니다. 천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올라갑니다.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의 나사로가 살아갈 장소는 완전 반대입니다!

 

‘한 부자’는 아래로 내려갑니다.

22절, 부자도 죽어…

 

솔로몬은 짐승의 혼이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 했습니다. 별 사람 없습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영적으로는 짐승의 혼이요, 죽어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거 알면 사람이 지혜자가 됩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부자는 그걸 몰랐습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내세관을 가졌든지 아니면 생각보다 일찍 죽어서 전혀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겠지요. 어떻든 죽었습니다!

23절, 음부에서… 지옥(地獄)의 다른 이름입니다.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았지만 그는 지옥으로 갑니다. 지옥으로 가지 않으려고 죽음 직전 몸부림 쳤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에 주인공이 아내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때 죽음의 사자, 세상 말로는, 시커먼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잡으러 왔는데 주인공이 안 가겠다고 몸부림칩니다. 지옥이 무서워서라기 보다는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죽음은 아래로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만큼 두렵습니다.

 

입관할 때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평안한 얼굴입니다.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으로 오르기 때문입니다. 비신자들이나, 믿어도 욕심 많은 신자들은 얼굴에 죽음의 그늘이 끼어있습니다. 아래로 나려가니 무서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은데 살았다고 죽어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명예와 영광을 누린다고 죽어서도 영광의 자리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자와 거지는 죽어서 자리를 교환했습니다. 대문 앞, 땅바닥에서 살던 거지는 하늘로 오르고 지금 최고의 기쁨, 환희, 영광의 자리에서 감사와 찬송을 하며 영생합니다.

 

부자는 세상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아래로 떨어집니다. 누구나 가고 싶지 않는 지옥! 지하감옥입니다. 그냥 감옥이 아닙니다. 주님은 무저갱이라 했습니다. 바닥이 없는 감옥! 그러니까 창세 이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창1:2), 바로 그런 지하 장소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장소가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잘 살아야 하며 낮은 자리에서 희망을 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뀝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19절 호화롭게 즐기더라…. 얼마나 멋지게 살았습니까? 부자로 잘 살았습니다. 죽으니 하나도 갖고 갈 수가 없습니다. 잘 살았던 세상이기에 상실감은 더 큰 것입니다.

 

거지는 세상에서 형편없이 살았습니다. 그는 거지에다 중병에 걸렸습니다. 개가 화서 헌데를 핥을 정도니 그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그렇지만 나사로는 천국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하나님의 품이요 위로와 치유와 회복과 기쁨이 넘치는 안식의 품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살아생전에 천국을 봅니다. 밧모섬에서 그것도 주일에 천국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주일을 평일처럼 보내면 안 됩니다. 우리 영혼을 성장시키는 시간들로 삼아야 합니다.

 

요한은 계시록 21장에서, 내가 보니… 영안이 열려 보인 것입니다.

3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은 이렇게 아버지의 품, 위로의 품… 안아주는 품… 그러면 “세상 고생 꿈에 본들 잊으리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나사로는 이런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간 부자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정서적 고통. 23절, 멀리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자기네 집 대문에 있던 거지가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습니다. 자기와 비교할 때, 말이 안 됩니다. 미치지요!

 

신체적 고통. 24절,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고문 중에서 최고의 고문인데 쉴 틈이 없습니다.

 

끝없는 절망:영벌(永罰)입니다.

여기에 자식들조차 이런 고통의 장소로 온다는 생각으로 너무 고통스런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모습, 몰골, 심정이 어찌되겠습니까? 그 역시 악마가 되고 사탄부류가 된 것입니다. 나사로와 입장이 바뀐 것입니다. 나사로는 행복하게! 부자는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교환된 것입니다.

3. 이름이 바뀝니다.

여기에서 재미는 일이 벌어집니다. 지옥에 간 부자. 세상에서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아하~ 그 부자? 그만큼 유명한 성공의 아이콘입니다.

 

19절 한 부자. 비록 그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한 부자’라는 것은 벌써 유명인사입니다. 그 동네에서는 이름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아, 그 분~ 그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대통령에게 이름이 왜 필요합니까, 명함이 왜 필요합니까? 대통령!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권세, 힘, 유명세는 이름이 필요치 않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옥에서 부자의 호칭은 “얘”(25절)입니다. 얘는 어린 아이들을 말하고, 어른의 경우 그 사람을 무시하는 호칭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는 많은 업적, 이름을 날렸지만 지옥에서는 그냥 “얘”일 뿐입니다. 이런 “애”를 위해 세상 업적을 남기려 하고 “애”에 불과한 이름을 남기려고 그렇게 바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20절 나사로. 이름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이름이 있었어요.

20절, 나사로라… 누구도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그 거지라고 부릅니다.

20절, 나사로라 이름하는 그 거지….

22절, 그 거지가 죽어…

당당한 이름이 있는데 왜 거지라고 부릅니까?

 

20절, …헌 데 투성이… 21절, 개들이 와서…

개에게서조차 멸시 받으니 그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부를 가치가 없는 이름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 대신에 거지…라고 한 것이지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 공동체라면 이름을 알기에 열심해야 해요! 부모가 정해준 이름에는 그의 명예, 가치,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름조차도 그 사람을 깔봅니다. 그 인간, 그 놈… 외형적인 신체조건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 매부리코~ 대머리~ 꼽실…? 그의 약점을 들어 그 사람을 설명하고 소개하려고 해선 안 됩니다.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고 이름을 모르면 이름보다 더 좋은 설명으로 그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여 성화요 품격입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입장이 바뀐 것입니까? 부자면 아래로 가고 가난하게 살면 천국 갑니까? 두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의역하면 ‘하나님 외에는 나를 도울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름 속에서 신앙적인 그 무언가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부자의 떡 부스러기는 도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내어버리는 부스러기입니다. 쓰레기입니다. 그의 배고픔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신적으로도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헌데가 있었습니다. 피부병입니다. 더운 지방이기에 그 피부병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개를 쫓아줄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는 영광이나 상급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로 올라갔고 아브라함의 품에 언겨 나사로라는 이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어 자리 이동한 것입니다.

 

부자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윤복희나 윤항기의 노래를 빌리지 않아도 “아~ 바보처럼 살았군요!” 바보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

여자는 죽을 때 철이 들고 남자는 죽어서야 철이 든다고, 부자는 음부에서 그만 철이 들어 버립니다. 그러니 지옥이 너무 고생스럽고 아비요 형제였다고 세상자식들, 일가친척들이 생각납니다. 지옥에서도 철이 드니 남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제발 지옥에 오지 말게 해달라”고, 철이든 요청을 하지만 때는 늦은 것입니다. 이런 때는 차라리 절이 들지 않으면 좋은 것입니다.

 

어때요? 죽음 이후에 천국에서 내 이름으로 불리며 살고 싶나요, 지옥에서 무명인으로 영원한 형벌로 고통과 번민 중에서 목이 쉬도록 후회하며 절규하고 싶나요? 그것을 결정하는 무대가 바로 잠시 살다가는 이 세상입니다. 한번 왔다 다시는 기회가 없는 세상에서 천국 입장표를 온 가족이 모두 가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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