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너도, 갈릴리로 가라!(마태복음 28:1~10)

갈렙처럼 2025. 2. 2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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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바다

너도, 갈릴리로 가라!

마태복음 28장 1~10절

 

서론

예수님께서는 인류역사에 유일하게 부활하신 인물입니다. 죽음을 이기다, 굉장합니다. 누구는 부활을 비과학이라 해요. 당연하지요! 하나님과 하나님께 하시는 일은 모두 비과학, 초과학입니다. 모든 일이 증명되고 이해된다면 종교의 가치가 있을까요? 종교의 가치는 신비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비함이지만 부활 이후의 역사는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살아생전의 영향력보다 죽은 이후 영향력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살아생전에는 3년 사역에 5백 명 남짓의 신자를 얻었지만 죽음 이후에는 세계의 절반을 얻습니다. 살아생전에는 12제자에게 버림받았지만 죽은 이후에는 유다를 제외하고는 순교의 충성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부활이 증명되고 스승의 인격이 진실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살아있을 때, 직분을 행세할 때 눈앞에서나 영향력을 남길 것입니까, 내가 떠난 자리에서, 은퇴이후에도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는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까? 예수님의 인간경영법을 배우면 죽음 이후에, 은퇴 이후에도 더 큰 영향력을 남기는 진실된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이렇게 명하십니다.

10절,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와 만나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베들레헴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눅 24장).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왜 갈릴리로 가라하십니까? 여기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다루는 법, 즉 인간경영법의 원리가 있습니다.

 

갈릴리로 가라! 이 명령에는..

갈릴리, 나는 누구인가?(정체성)

갈릴리는 이스라엘 북쪽 변방입니다. 정통 유대인에게 갈릴리인들은 비정통, 비주류, 순혈이 아니라고 괄시를 받았습니다. 그만큼 버림받은 땅, 하찮게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지만 나사렛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갈릴리인이 되고 ‘나사렛 예수’가 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났고 3년을 훈련시킵니다.

 

3년이 지난 지금,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배신자들이 되고 맙니다. 교만 때문이지요. 주님을 쫓아다니면서 갈릴리어부 출신들이 영광을 많이 받았습니다. 3년의 제자훈련은 누가 크냐? 로 신경전을 벌이는 막다른 데까지 왔습니다. 훈련의 한계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야지 교육만으로는 안 됩니다. 교육은 아는 것은 많게 하지만 인격과 성품 변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훈련의 한계입니다. 제자훈련으로도 유명하고 싸움박질로 유명한 어느 교회가 증명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의 환영에서 자부심이 하늘까지 높아졌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보시는가?” 에 관심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러니 자신들 역시 군중들이 만들어줄 지위와 명예와 영광에 눈이 멀게 됩니다. 강도 높게 훈련받았던 세상 영광과의 ‘거리넓히기’는 순식간에 좁혀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지, 소명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를 택했을까? 탁월한 능력 때문에? 조직력? 통솔력? 웅변력 때문에? 아니지요! 갈릴리 촌 동네의 순수함, 거칠기는 하지만 선장이나 선주들에게 보여주던 절대 복종, 거센 파도에 맞서 몸을 사리지 않는 어부들의 열정과 투지, 그들에게는 스승의 손에 쉽게 휘어지는 겸손함까지 있었습니다.

 

교회공동체는 섬김, 겸손의 공동체입니다. 제자들은 이걸 상실한 겁니다. 군중들이 그들을 우쭐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그룹은 하나님나라의 희망대안 세력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공동체가 섬김과 겸손의 공동체가 되려면 원점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불러주시기까지는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자신들, 그 때의 겸손함과 소박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느새 교만해져 버린 마음을 갈릴리에서 털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로 모이도록 한 것입니다. 결코 네 근본을 잊지 말라! 네 직분이 12제자라고 그걸 특권으로 지위로 계급으로 생각하지 말라~ 너는 본래 촌구석의 어부였느니라! 그걸 상기시키려 하심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누가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가, 나를 힘들게 하는 최고의 상대는 거울 속에 들어있습니다. 거울 속에서 보여지는 ‘나’입니다. 그 ‘나’는 바로 자존심입니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로, 표정 하나로 내 자존심이 구겨지고 상처를 받을 때 목회자로서 힘듭니다.

 

자존심은 겸손을 놓친 데서 나옵니다. 내가 누구였나? 40년 전의 나! 알량한 자존심조차 없는, 자신감 결여 신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를 오늘의 나로 세우셨습니다. 여러분에게서 부당한 대접이나 평가를 받을 때가 있습니까마는 그래도 언짢을 때면 옛날의 나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초라하고 형편없었던가? 그 마음이 내가 돌아가야 할 ‘나의 갈릴리’입니다.

 

인도선교사 윌리엄 케리는 본래 구두수선공입니다. 누가 “당신은 옛날에 구두를 만드는 사람에 불과했다” 평가절하하자 그는 “아닙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지 못하고 겨우 수선이나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하게 정정했습니다. 그 인격 앞에 다시는 그를 폄하하지 못했습니다.

 

겸손은 성도들에게 최고의 힘이요 무기입니다. 베드로와 갈릴리어부들은 겸손이라는 무기를 놓아버리고 무장해제 당합니다. 제자들에게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겸손의 무기를 손에 쥐어 주려 주님께서는 갈릴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내가 돌아가야 할 겸손의 자리입니다.

갈릴리, 왜 실패했는가?(자기성찰)

제자들은 엄청난 실패를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실패야 원래부터 헌금을 도둑질하던 사람이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베드로,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했고 요한은 줄행랑을 쳤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오십보백보입니다. 상황이 그렇다 해도 부끄럽게 처신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부르십니다. 그들을 부르시는 것은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후고구려의 왕 궁예는 아들이 작전에 실패하자 죽음으로 그들을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초대하심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는 과정을 통해서 실패의 멍에, 부끄러움의 멍에를 벗겨주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패를 반성하느냐, 합리화하느냐? 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반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자신들 처신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님에 대한 죄송함으로 어쩔 줄을 몰랐겠지요! 이런 자기 성찰이 없이 성령이 임했다면 그들의 인격은 너무 더디게 변화되었겠지요. 갈릴리행(行)은 부끄러움과 반성하는 법을 강하게 인지시켜 주었고 수치심을 털어 버리게 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그런 과정이 없었기에 실패로 끝납니다.

 

세계 최대 기업 IBM의 설립자 톰 왓슨의 성공비결은 사람을 최고의 자산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부사장이 모험적인 신제품 개발계획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신제품이 나가고 회사에 1천만 달러 손해를 끼쳤습니다. 부사장이 찾아 이실직고(以實直告)합니다.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책임을 느껴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자네를 교육하는 데 무려 1천만 달러를 들였어. 다시 시작하게”

 

그에 부사장은 용기를 얻어 신제품을 성공시켰고 IBM을 세계 최대그룹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세계는 이런 멋진 인간경영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재기의 발판을 삼았고 땅속에 파묻혀 버릴 보석들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이런 인간경영은 이미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 한 것은 빨리 실패를 털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신 주님의 ‘인간경영’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의 그늘에, 수하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성공자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눈물과 감동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일본의 인간경영론을 대표하는 3인-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의 인간경영은 기다림.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오다 노부나가는 카리스마 경영.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한다”.

3인 중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천부적인 인재 활용술로 경쟁자를 제압하며 패권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어느 방법입니까? 우리에게는 원수 같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입니다. 울 때까지 기다린다! 도쿠가와는 울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만 주님께서 그가 울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끝까지 기다리시는 방법을 택하십니다.

 

저도 기다림의 목회입니다. 카리스마 목회는 목사는 편한데 교인들이 힘듭니다. 기다림의 목회는 교인들은 편한데 목사는 힘듭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의 목회를 아는 이들은 기다려줌에서 자신들을 성찰합니다. 그러면서 봄눈이 녹듯 서서히 변화가 되면서 든든한 동역자가 됩니다.

 

갈릴리, 나랑 밥 먹자!(은혜 회복)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제자들을 왜 갈릴리로 초대할까요? 예루살렘에서 부활 몸을 얼른 보여주고 부활했다! 하면 될 텐데 왜 보여주지 않고 뜸들이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는 대략 150km, 여기서 대전시청까지 141km이니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그 거리를 도보로 갑니다. 하루 길의 시간은 아닙니다. 이틀 이상 걸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로 가는 그 도보여행에 주님의 마음을 몰라 제자들의 마음도 오락가락합니다.

 

‘왜 우리를 갈릴리로 오라 했을까?’ ‘배신을 야단치러 부르시는 것일까?’

우리도 궁금합니다. 그 먼 거리를 왜 부르셨을까? 책망하려고? 그럴 거면 여기 예루살렘에서 해도 되잖아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는 예루살렘으로 되돌리시더니 제자들에게는 150km나 되는 그 먼 갈릴리에서 왜 만나자 하실까요? 그 생각으로 먼 거리가 착착합니다.

배신했던 스승을 만나러 가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스승에 대한 감격도 벅차겠지만 먼 거리에서 만나자는 스승의 마음을 몰랐기에 두려움이 반이요 희망이 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책망도 없으신채 고기를 잡게 하신 다음에 숯불에 구워서 조반을 먹자~(요21:12) 하십니다. 그건 어떤 책망보다도 그들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고 용서이고 위로입니다.

 

마크 러틀랜드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세 가지 말을⋯ ‘너를 사랑해’ ‘용서해줄게’ ‘밥 먹자’로 정의합니다. 모두 은혜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그리워합니다. 교회 안에서 은혜의 말을 듣고 싶어하고⋯ 은혜로운 표정을 보고 싶어하고⋯ 은혜로운 복음을 듣고 싶어합니다.

이런 은혜의 체험이 있기에 베드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 5:10), 바울은 “내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왜 갈릴리로 부르실까요? 은혜 체험입니다. 그들은 실패자요 깨어진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3년 전의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장소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십니다. 스스로 실패자임을 자인하게 자각하게 하고⋯ 조반을 먹자! 은혜의 체험으로 다시 제자로 세우십니다.

 

주님께서 은혜의 과정이 없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지도자로 삼아 초대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종교권력 집단이 되어버리고 상명하달 명령 집단이 되어버립니다. 베드로는 살아생전에 교황이 되고 제자들은 갈릴리감독, 사마리아 감독, 가이사랴 감독⋯ 등 감투 쓰고 종교 권세자로 행세 할 것입니다. 유대교가 그런 올무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린 체제는 주님께서 세우시려는 교회공동체가 아닙니다. 철저히 실패를 자인한 사람들이 실패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시는 은혜의 손에 붙들릴 때 그때 제대로 된 사명자들이 됩니다.

 

다윗에게 찾아왔던 사람들은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삼상 22:2). 그 사회의 비주류, 일명 마이너리그입니다. 이들은 깨어진 자, 실패자들입니다. 철저히 자기 실패를 아는 인생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윗이 거두었고 메시아왕국의 비전을 주었기에 그 은혜에 죽기 살기 충성해서 무일푼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데 파트너가 된 것입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사람을 채용할 때 분명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너무 일찍 출세한 사람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채용을 꺼렸습니다. 너무 쉽게 출세한 사람은 독선적이며 실패 경험이 없는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이들도 한 번도 깨어진 적이 없는 사람들, 실패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깨어져 보고, 실패해 보고⋯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야 남을 이해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섬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자들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려면 그를 깨뜨리시고 그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더 깨어지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깨신다 하실 때에 더 자신을 깨트리십시오! 더 자존심을 죽이시고 더 낮아지십시오! 갈릴리로 찾아오신 주님께서 내게 찾아오셔서 재기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다시 갈릴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

오스왈드 샌더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 두 명을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합니다. 베드로와 도마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도마는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충동적이고 도마의 의심은 만성적입니다. 충동적인 기질이나 의심병 환자나 모두 실패자가 됩니다. 지도자로서는 적합하지 못한 기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처참하게 무너진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베드로에게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내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도마에게는, 손과 옆구리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기 전에는 내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며? 넣어보라! 마리아에게는 만지지 말라! 하셨는데 도마에게는 넣어보라! 하십니다.(요 20:27)

그 일을 위해 갈릴리로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만나라~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구원의 즐거움과 자원하는 심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았던 그 갈릴리~ 언제 잃어버렸습니까? 지금 당신은 어디에서~ 왜! 그 갈릴리를 잃었습니까? 릭 그레이는 말합니다.

 

“내 삶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떠나 행복을 찾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사실이 놀랍고도 서글프다!”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부활 이후의 예수님, 내 인생을 초대하십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갈릴리 알지? 은혜를 받았던 곳! 이제 은혜를 회복해야지~ 은혜의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조반을 먹던 베드로 심정으로 2017년 부활절 이후를 다시 출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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