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하나님의 자녀됨, 예수님의 제자됨(창세기 28:16~22)

갈렙처럼 2025. 2. 2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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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빛교회 20주년 행사

하나님의 자녀됨, 예수님의 제자됨

창세기 28장 16~22절

 

서론

이번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야곱의 130년의 방황과 17년의 성화를 다룬 ‘생활거룩’이라는 단행본을 냈습니다. 책이 잘 나와 기분이 참 좋습니다. 제가 35년 동안 매달마다 발행해왔던 월간 교사의벗을 10월이면 지령 600호, 56년 만에 폐간합니다. 독자 감소와 재정적자로 인해, 그야말로 청춘을 바친 사역을 마감하니 시원도 하고 섭섭도 하고 심난도 하고… 요즘 교회 일에, 또 교인들 중에 이런저런 어려움도 좀 있는데 하나님께서 힘을 내라고, 그동안 수고했으니 내가 크게 보상해 주겠다고 하셨는지 일류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자랑처럼 들리더라도, “남의 손자들 자랑도 들어주는 마당에 오늘은 목사님 자랑질 좀 들어보자”, 넓은 마음으로 경청해 주세요.

 

이번에 두란노에서 책을 냄으로 한국교회 빅5 출판사에서 모두 책을 냈습니다. 생명의말씀, 규장, 아가페, 성서원… 등입니다. 다섯 출판사에서 모두 책을 낸 저자는 제가 유일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에 누님이 제주시로 여고로 진학해 자취를 했는데 방학 때 집에 오면서 소설책 한 권을 가져왔습니다. 신성여자고등학교 도서관이라 찍혀 있는 ‘빙점’이라는 소설입니다. 그걸 읽고 얼마나 감동받았는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문학청년이 되었는데도 소설가적인 역량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총신대학교를 다닐 때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었습니다. 우편배달 화물비행기의 조종사 주인공이 사하라사막에 불시착한 후 별에서 온 어린왕자를 만나면서 전개되는 순수한 영혼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왕자를 읽고 어른들을 위한 동화작가가 되겠다 결심합니다. 장르를 옮겼더니 나하고 많이 맞아요! 그래서 1979년 서울신문 최종심에 오르고 이듬해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크고 작은 책 200여 권 정도를 썼습니다. 50쪽의 성경공부 교재를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일반 유명 출판사에서도 책들을 여럿 냈습니다. 창작과비평 창비사에서도 냈고, 대교출판사, 계몽사, 재능수학… 등 쟁쟁한 출판사에서 책을 냈습니다. 신수성가를 제외하고는 한 권을 교인들 상대로 판매한 적이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내 작품이 두 편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청소년시절, 청년시절에 참 마음고생을 많이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신체적으로 남들처럼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특별한 집안도 외모도 학벌도 뒷배도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또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경쟁력이 무엇인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이걸 강점으로 주셨다! 그래서 그쪽 은사를 계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약점에 눈을 돌리지 않고 강점에 눈을 돌려 열심히 그걸 붙들었더니 오늘 이런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여러분들이 합력하며 만든 작품이 저입니다. 늘빛교회가 없는 오늘의 저는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늘 고마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저의 자랑질은 그냥 자랑질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는 하나님 자랑질입니다. 바울은 나의 약함이 주님 안에서 강함이라고 했는데 이게 바로 오늘 저의 신앙고백이자 간증인 것입니다.

 

현대 대중심리의 최고 권위자 브레네 브라운은 <마음가면>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취약점, 수치심, 불안 등 현대인이 시달리는 부정적 감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취약성을 당당하게 드러내면 무엇보다 마음이 홀가분하고 무슨 일을 해도 후회가 남지 않는다고, 또한 진솔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드러내지 않고 가면을 쓰고 한 그런척 안 슬픈척 안 외로운 척 안 약한 척 하다보면 정말 큰 병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려 가면 쓰지 말고 그걸 드러내라고 합니다. 그녀는 ‘취약성의 힘’이라는 강연에서 ‘자신을 취약하게 만드는 바로 그 면이 오히려 자기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제 삶도 취약성의 힘이 만들어 낸 작품입니다,

 

어느 장로님과 식사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70대 중반이 훨씬 넘은 은퇴 장로님입니다. 물론 우리교회 장로님은 아니고 직원들 몇이서 동석했습니다. 괜찮은 일식집이었는데 메인 요리 회가 빠졌는데도 경황이 없는 아가씨가 코스가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실수도 그런 실수가~

 

그런데 그 사장 장로님이 노발대발한 것입니다. 너 이름이 뭐냐? 사장 오라고 해라~ 음식점 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제가 식사 기도하는 것을 서빙아가씨도 보았고 손님들도 다 보았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노발대발하느라 우리의 본색이 다 들어난 것입니다. 물론 장로님이 책망하고 화를 낼 수는 있습니다. 메인 요리가 나오지 않았다면, 네! 하고 주방에 알아보면 되는데 다 나왔다고 우기는 바람에 아가씨가 크게 실수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너무 크게 화를 낸 그 장로님도 좋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왜 이리 오래 믿었는데도 이런 데서 거룩이 나타나는 대신에 분노가 폭발하는 것일까?’

 

이번에 제가 쓴 야곱의 이야기, ‘생활거룩’의 내용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잘 합니까? 어느 사람들이 이렇게 주일성수를 하며 십일조를 합니까? 불교나 로마가톨릭 신자들에게 일요일마다 법당에 나와야 하고 주일마다 성당에 나와야 한다면 정기적으로 나올 분들이 몇 %나 되겠습니까? 십일조를 내라면 기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녁에도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주일학교 교사로 찬양대로 식사담당으로… 정말 열심히 잘 믿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헌금에는 또 얼마나 열심입니까? 예배당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입니까, 선교사 파송은 정부에서 월급을 주면서 국위를 선양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다 교회가 하는 것이고 다 여러분들의 헌금으로 감당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종교인들이 어디 있고,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신앙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잘 믿은 것입니다. 저도 잘 믿어왔고 여러분들도 잘 믿어왔습니다! 한국교회는 정말 교회생활을 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가 지금 욕을 먹고 있습니까? 이렇게 믿음생활과 교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이 모였으면, 주일마다 모여서 좋은 말씀, 교훈들을 들었으면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인격자들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주변의 현실이 그렇습니까? ‘생활거룩’이 여기에 대해 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거룩하고 교리도 거룩하고 기도도 거룩하고 예배당 안에서도 거룩한데, 무엇이? 생활이! 생활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생활은 어디에서의 생활입니까? 사무실에서, 목욕탕에서, 버스 안에서, 시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미용실에서, 운전하면서… 바로 그런 생활일터에서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기에 한국교회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런 사달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생활은 잘 하는데 생활이 뒷받침되지 못합니다. 목회자들이 목회는 잘 하는데 개인의 신앙생활은 잘 하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은혜를 받고 밑줄을 잘 긋는데 생활에서는 밑줄을 긋지 못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건 교회가 계속 외상장부만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겠다, 저렇게 살겠다! 용서하며 살겠다, 남을 미워하지 않겠다… 예배당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외상을 긋습니다, 그러면 생활에서 그 외상을 갚으며 살아야지요! 그게 성화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기도로만 말로만 그렇게 살지 삶으로 말씀을 살아내지 못하니 자꾸 외상장부만 쌓여가는 것입니다.

 

선교지도자 플로이드 맥클랑은 <제자도의 본질>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맥클랑은, 우리가 왜 이렇게 살지 못하는가? 맥클랑은 신앙생활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됨’

‘예수님의 제자됨’

 

맥클랑은 그 책에서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자녀 됨’은 좋아하는데 예수님의 ‘제자 됨’은 잘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양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자녀 됨에는 사랑과 축복과 용서와 위로가 있습니다. 대부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하늘의 선물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자녀 됨을 말하는 구약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현세의 복, 땅의 복들을 많이 열거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는 자원하고 기뻐하고 그분으로 오는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을 바칩니다. 자칫 마중물 헌금이 될 수 있고 마중물 헌신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 됨에는 자기부정과 희생과 대가를 치르라는 요구가 따라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100점짜리 고백을 했습니다. 그 고백으로 주님을 구세주로, 하나님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모습을 보였습니까?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입으로는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했지만 삶으로는 그 고백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고백은 예수님의 제자 됨보다는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로서 여러 해 집중교육을 받았지만 성화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고정관념의 덫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성격도 행동도 거칠었고 온유함과 진지함은 더욱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기에 실수가 많았습니다. 고백에서는 성공했지만 삶에서 실패한 것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도 이런 면에서 실패를 했기에 130년을 성화되지 못하고 좋은 아들도 남편도 아버지도 되지 못하고 방황한 것입니다. 그가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언약의 일원이 된다는 것! 언약백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가를 알았기에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까지 그 언약을 얻었겠어요? 야곱이 하나님의 자녀됨에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이 바로 언약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자녀, 선민의 축복은 엄청난 것입니다.

 

땅, 대민족, 복의 근원!

이런 약속에 아브라함이 따라나섰습니다, 그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조카 롯도 따라붙었습니다. 리브가는 남편될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생면부지의 남자임에도 하나님의 자녀의 일원, 가족, 언약의 축복이 있기에 아브라함의 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말에 교회를 다닌 것입니다.

 

야곱이 그 언약의 축복을 탐낸 것입니다. 그 언약의 계승자라는 보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세 가지 조건을 겁니다.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제단을 세웁니다”(예배당 건축?)

“십일조생활을 하겠습니다.”

 

고백은 좋았습니다.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도 고백은 좋았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도 항상 고백만큼은 좋습니다! 그러나 야곱도 고백대로 살지 못했고 베드로도 고백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고백한 대로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좋아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됨’은 기피했습니다. 왜? 삶으로 드러내려니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은 ‘고백’으로 가능하지만 예수님의 제자 됨은 ‘생활’을 통해서만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은 기대하고 예수님의 삶은 기피하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맥클랑은 이를 두고 ‘예수 결핍장애’라 진단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도 많고 기도도 풍성하고, 성경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지적만족도도 높은데 정작 예수님처럼 살라고 하면 발을 뺍니다. 예수 결핍증인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지탄받는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는 되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자기희생이 없는 고백은 얼마든지 하지만 수고와 포기가 따르는 제자의 삶은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는 예배받지만 주인으로는 대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은 많으나 정작 제자는 없는 것입니다.

 

유대 속담에 “유대인이 되는 것은 쉽지만 유대인으로 살아가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쉽지만 구원받은 사람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쉽지만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희생과 눈물이라는 대가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자녀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많아도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고신대학교의 박영돈 교수는, “한국 교회는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구원받고 축복누리는 데만 열심이었지 거룩하게 살아가는 데에는 열심을 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힘이 달려 오히려 교회가 세상에 의해 변질된다는 뼈아픈 지적입니다.

 

야곱도 같은 행보를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축복에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어 대민족의 족장이 되고 조상이 되는 것에는 열심을 냈지만 하나님의 자녀처럼, 신약에서는 예수의 제자처럼 살아내기 위해 주의 십자가에 자아와 이성과 감정을 못 박지 못하고 자기 해체라는 과정을 거친 적이 없었기에 무늬만의 하나님이 백성이고 성화와는 거리가 먼, 오랫동안 공회전 신앙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자기 인생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면 살아왔지만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인 라헬이 죽고 요셉을 실종하고, 디나는 성폭행당하고, 장남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동침하고 손자 두 명도 하나님께 벌을 받아 즉사하고… 일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입니다. 그는 언약을 놓아버려도 하나님은 놓지 않으시고 그는 언약을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인내하시고 끝까지 추적하시어 그의 삶을 신분에 맞도록 만들어 갑니다. 그것이 야곱의 환란입니다. 야곱의 일생은 뜻밖에도 비가 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떡하든 이기고 빼앗고 움켜쥐던 야곱의 일생에 이렇게 많은 시련과 환란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마를 날 없는 이 눈물로 인해 야곱은 인생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것을 놓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무릎을 꿇습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면서 “잃으면 잃으리라” 그런 고백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 고백과 행동이 결국은 야곱을 성화의 최고봉에 오른 성자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결론

미국의 존 맥아더는 <하나님이 전해 주신 복음< <주님 없는 복음> 등 좋은 책을 낸 세계적인 목회자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를 사랑한 신실한 목회자였고 시무한 교회는 영적인 부흥을 중시하고 성경을 믿는 전통적인 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그는 유년 시절 기독교 문화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존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일부 교인들의 구원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던 신자들의 삶이 고백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예배는 생활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때 어른들의 그 신앙생활의 공회전, 성화공백 신앙으로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눈도 비슷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믿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됨, 예수님의 제자됨”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하십시오! 고백하십시오! 그걸로 부족합니다. 그 고백이 참이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세요.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제자는 자기를 부인합니다. 해체합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며 충성합니다. 그럴 때 우리 믿음은 성화 공백기나 공회전을 벗어나서 서서히 성화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점전적인 성화의 생애를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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