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렙산이 하나님의 산이 되다
출애굽기 3장 1~5절
서론
마곡단지 마곡지구를 지날 때마다 신기하지 않으세요? 그 논두렁과 밭이 저렇게 최첨단의 연구단지가 되다니, 대단하지 않나요? 어떤 생각이 드세요? 그때 죽을 둥 살 둥 아이들 대학 보내지 말고 그 돈으로 천 평 정도만 사놓았더라면… 평당 4,5만원 할 때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의 삶이 환하게 펴졌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대학에 목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한 삶이지요! 대학이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양대교를 지나 난지도는 어때요? 흙으로 메꾸어 섬이 아니라 의젓한 서울특별시입니다. 난지’(蘭芝)는 난초와 지초(버섯)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샛강에는 맑은 물이 흐르며 수양버들이 늘어서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난초와 지초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이 1978년부터 1993년까지 폐기물 매립장이 됩니다. 하루에 3,000대 트럭이 드나들고, 15년 동안 8.5톤 트럭 1,300만대 분량의 쓰레기가 매립됩니다. 쓰레기를 소각하는 시간에는 인근주민들은 창문을 닫았고 빨래를 걷었고, 냄새가 나고 재(災)가 날려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상암동아이들은 입은 옷이, 싸오는 반찬이 달라 멸시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랬던 난지도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세계규모의 운동장과 녹지공원, 대형건물과 특히 방송국들의 밀집으로 금싸라기 땅이 되었습니다. 그 쓰레기 땅이 금단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 사람 팔자 시간문제다, 와 함께 땅 팔자, 섬 팔자 시간문제다? 격언이 생길 판입니다.
난지도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쓰레기는 없다!
희망은 쓰레기 더미에서도 나올 수 있다! 난지도처럼 밀려나고 뒤죽박죽 되어버린 삶에도 희망은 숨겨져 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난지도도 성지(聖地)요 임재하지 않으면 강남도 그냥 허드레 땅이다! 그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호렙산입니다.
해발 2천미터가 넘는 호렙산은 소망이 없는 곳, 소망이 있다 해도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는 답답한 산입니다. 호렙(Horeb)은 ‘건조한 곳’ ‘사막’ ‘황무지’ 산입니다. 울퉁불퉁한 암반투성이 정상은 풀 한 포기가 없고, 계곡이 거의 없어 물구하기도 어려워 생명이 살기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인공위성으로 바라본 시나이반도는 푸른 색채 하나 보이지 않는 무인지경입니다. 시내산이라고도 불리는 호렙산은 모세가 40년 동안 양(羊)을 먹이던 곳입니다. 지금도 베두인들이 4만명 정도 곳곳에 삽니다. 40년 호렙산 생활은 모세에게 절망 그 자체, 최악이었습니다.
1절,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상상해 보세요! 온갖 낙담의 조건은 여기에 다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결혼생활, 희망이 없는 직업… 처가살이…. 하는 일이란 군대를 호령하는 제국의 왕자가 아니라 양들과 종일 생활하는, 보잘것없는 촌부(村夫) 목부(牧夫)입니다. 애굽 궁궐과 비교해 볼 때 호렙산은 절망 자체입니다. 호렙산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절망의 산, 삶은 엉망진창이 되고 깊은 상처를 입고 하나님조차도 침묵해버린 40년의 호렙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 이 산을 1절, ‘하나님의 산’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40년을 들락거렸지만 이 산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삼켜버리고 아무런 기대감도 존재감도 의미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황무한 땅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개발되기 전의 난지도였고 연구단지가 들어오기 전에 마곡의 땅이었습니다. 그 땅의 주인조차 그 땅의 가치를 모르고 하찮게 보던 쓸모없던 땅들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출애굽기를 쓰면서 분명 ‘하나님의 산’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산이라면 백두산이나 한라산처럼 정상에 호수가 있어 백록담이 되고 천지연이 되고 나무와 꽃과 수풀로 우거져 신령한 영산이 되고 명산이 되어야 하는데 호렙산은 풀 한 포기가 없고 물이 흐르는 계곡조차 없는 민둥산입니다. 이런 산이 무슨 하나님의 산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연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던 그 창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창조를 하다 실패하여 내 던져버린 것 같은 땅이 시내광야요 산이 시내산 호렙산입니다.
이런 산을 ‘하나님의 산’이라니, 모세가 다른 산을 두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출애굽기를 쓸 때 그의 나이는 120세 가까이, 40년 전의 그 일을 착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120세에 죽을 때까지 눈이 흐려지지 않고 총명이 흐려지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산’은 호렙산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황무지에 불과한 이 산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산’이 되었을까요? 누구의 눈에 들어 마곡 땅은 연구단지로 개발되어 금싸라기 땅이 되고 쓰레기더미 난지도는 어느 시장의 눈에 들어 황금 알을 낳은 금단지가 되었을까요?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애굽 궁중에서는 들려오지 않던 음성입니다. 광야는 무음(無音)입니다. 소음(騷音)이 차단됩니다. 소음은 불쾌하고 잡스러운 소리, 잡음(雜音)입니다. 소음이 차단되니 들어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음성, 영음(靈音)을 들습니다.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모세는 그 좋았던 시절, 왕궁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많은 종교인들, 현자들, 동족들… 친부모를 통해 히브리의 여호와 신에 대해 들었고 히브리의 종교적인 예절과 관습도 알았지만 애굽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돌투성이 현장, 보잘것없는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니 그 산은 순간적으로 ‘하나님 산’이 되고 모세를 희망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2절, 떨기나무가 불붙는 모습입니다. 수없이 보아왔던 떨기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열매도 재목도, 넓은 잎도 없기에 더위를 피할 그늘도 없었습니다. 그 나무를 볼 때마다 모세는 자신의 신세를 보는 것 같아 혀를 찼겠지요.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것이겠지요! 인간아 인간아 뭐하러 사냐? 누구 눈에도 들지 못하고 도움도 되지 못하고 모양도 없이 왜 그리 거기에 서 있으며 왜 그리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입니다. 타도 타도 꺼지지 않습니다. 밤이었으면 찬란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산이면 비록 호렙산이라 해도 ‘하나님의 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산’이라 명한 것입니다.
-호렙산에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9절,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스라엘의 부흥을 위해 네가 불타는 나무가 되겠느냐?”
처음에는 모세가 주저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기술이 떨어졌고 감각이 없습니다. 양떼들만 상대했기에 사람들의 리더가 되기에는 두려웠습니다. 동족들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거절했습니다. 호렙이 ‘하나님의 산’이 되기는 했지만 모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랬던 모세가…
-하나님 자체를 만납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모양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제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확신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확신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동안 너무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이상도 비전도 희망도 더 이상의 사명도 없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늙음이었고 쓸모없는 노인네입니다. 인생이 완전히 녹다운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부르심에 도무지 응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더 가까이 들어옵니다.
음성에서, 상징에서, 사명에서… 지금은 하나님의 본체 자체를 드러내십니다.
13절, 모세가 묻습니다. 후 아 유?(Who Are You?)
14절,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누구야 나지! 아이엠 후 아이엠(I Am Who I Am)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야훼!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여러 번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대놓고 직접 내가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다! 라고 당신의 이름을 드러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민족에게도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알려준 것이 없습니다. 인류역사에 공식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되고 여호와의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여호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모세는 하나님 신이 어떤 분인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분은 자존자, 육체가 아니시고 영이신 분, 온 세계에 충만하신 분, 완전지혜자, 전능하신 분, 그리고 유일하신 하나님… 그 이름이 그를 끓어오르게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자신에게 집중했습니다. 40년을 촌부로 목부로 살아오다보니 손이 녹슬고 머리가 녹슬고 감각이 녹슬었습니다. 나는 늙었습니다. 80된 늙은이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나는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까지는 하늘님으로, 하느님으로, 천지신명… 정도로 알았는데 야훼! 여호와! 하는 이름을 알게 것입니다! 그 이름을 아는 순간!
시인 김춘수가 여기에서 시상을 얻었을까요? 그는 그의 시 ‘꽃’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모세에게는 그 반대입니다.
“그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하늘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여호와 하나님이 되었다.”
그래서 핑계대로 주저하던 모세가 비로소 네! 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때부터 120이 될 때까지 40년을 불타는 떨기나무가 됩니다.
그 때부터 모세는 제 힘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에 들어오시고 그의 에너지가 되시며 엔진이 되시며 날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힘을 알았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31)
닭이 날개를 퍼덕거려 봐도 3m 정도밖에 날지 못합니다. 갈매기는 닭보다 기술이 훨씬 좋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날고 닭들의 부러움을 삽니다. 그러나 갈매기는 창공을 솟아오를 수는 없습니다. 독수리는 창공과 태양을 향해 곧장 솟아오르는 방법을 압니다. 독수리는 자기 힘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른 힘에 의지하여 솟아오릅니다. 더운 공기가 찬 공기를 만날 때 생성되는 상승기류의 힘을 타고 솟아오르면 한도 끝도 없이 솟구쳐 올라갑니다. 독수리는 애를 쓸 것도 없습니다. 커다란 날개만 펼쳐있으면 더운 공기와 함께 바람의 힘이 그를 하늘로 솟아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창공의 왕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원리를 알았기에 이런 문장을 사용했고 모세는 이런 상승기류의 원리는 몰랐지만 하나님의 힘을 40년이나 의지했더니 80세부터 120세까지 훌륭하게 쓰임을 받고 한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엄청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처한 불모(不毛)이 호렙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상징을 보았고 사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슴에 간직했기에 여호와의 이름이 나이와 상관없이 기술이 녹슬고 생각이 녹슬고 모든 것이 녹슬었지만 상관없이 그를 광야의 거대한 독수리로 날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크시고 영광을 올리는 유일한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다시 마곡단지와 난지도로 갑니다. 쓸모없게 보이던 들판 마곡, 1,300만대 분량의 쓰레기가 매립된 난지도! 그 땅이 오늘 저리도 금싸라기 땅이 되었습니다. 호렙산의 촌부(村夫) 목부(牧夫) 모세, 그냥저냥 살았지만 나이 80세에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훨훨 날았습니다.
지금 마곡단지, 난지도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가, 그런 위인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새빨간 제 와이셔츠가 멋지지 않습니까? 나이를 훨씬 젋게 보이게 하지 않습니까? 와이셔츠 하나로도 젊게 보인다면! 옷이 날개가 되고 학벌이 날개가 되고 내 실력도 날개가 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돋보이겠습니까?
이번 우리교단 9월 총회에서 총회장 김종준 목사님이 구두닦이 넝마 줍기 출신이고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님은 엿장사 출신입니다. 제 힘으로 그리 된 것입니까? 구두닦이 넝마 줍기, 엿 장사… 이건 아무 것도 없는 호렙입니다. 그러나 그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 이름을 품에 새겼을 때 그 목사님들의 생애는 ‘하나님의 산’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이름이 그분들을 그렇게 독수리처럼 날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17:6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며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게 되겠지만
7절,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
그렇습니다. 내 삶이 황무지 호렙산이고, 그래서 사막의 떨기나무 같이 좋은 일들을 보지 못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붙들면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인생을 맡기면 성령님의 상승기류를 탈 수 있습니다. 모두 모세처럼 대지도자가 되고 누구처럼 총회장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게막대기를 보세요! 똥지게 막대기들을 보세요! 그것 없으면 장정도 쉽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막대기 하나 있으면 힘을 받고 일어납니다. 누군가에는 이런 역할을 하면서 살다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호렙산과 같은 상황에서 희망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호렙-무서운 형상을 하고 있는 땅이었지만 이제는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여주는 곳입니다. 우리의 호렙산 환경들이 하나님의 산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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