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문제를 해결하라(요한복음 5:2~9)

갈렙처럼 2025. 2. 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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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해결하라

요한복음 5:2~9

 

서론

예루살렘은 명절(오순절이었다)이었는데 베데스다 라는 곳에는 잔득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명절이라고 성전을 찾지도 못하고 남들은 봄 농사의 산물을 바치며 감사하고 있는 데 저들은 자신의 불행을 괴로워하며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님은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명절의 즐거움보다는 베데스다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그 희망이 없는 곳, 남들의 기쁨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 연못으로 주님은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의 모든 이들을 찾아가신 게 아닙니다. 오직 한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38년 된 병자입니다. 그 38년 된 병자가 그곳에서 살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 연못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병자는 신화에 의지했기에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자비의 못이라는 명칭이 있는 이 연못에는 예로부터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물을 동하고 가장 먼저 그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던 상관없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전설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이 연못 아래에는 지하수의 흐름이 있어 때때로 그 지하수가 부글부글 거품을 내면서 괴어올라 올 때 누군가 들어갔다가 피부병이든 무슨 병이든 나은 적이 있었던가 봅니다. 이 현상이 확대 과장되면서 천사의 기적으로 소문이 나게되었고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진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병자는 이런 전설을 믿었습니다. 당시 그의 병을 고쳐줄 만한 의술이 없었기에 이런 신화에 의지하고 싶은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 갑니다. 그러나 그 신화가 결국은 그로 하여금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잘못된 신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 일확천금으로 돈 번 사람들의 이야기.

* 땅 투기로 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

* 정치적으로 줄만 잘 서면 성공.

* 제비족들이 판을 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신화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했고 이 사회의 희망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정직한 사람들의 희망을 그들은 완전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현대그룹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국회의원(대통령)으로 있는 이명박씨를 직장인들의 우상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여덟 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야간중학교를 나왔고 지금은 없어져 버린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공부를 하면서도 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그의 모친은 권사님으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권사님의 기도는 특이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식의 기도는 맨 나중이거나 조금만 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다른 자식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더니 그에게 "너는 장차 크게 될게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식에게 꿈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는 "나의 선생은 가난과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식들에게 "절대 얻어먹지 말라"할 정도로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웃에 봉사하되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물 한 모금도 공짜로 얻어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실천적 가르침으로 이명박은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성실을 정주영씨가 눈 여겨 보게되었습니다.

그는 <신화는 없다>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간에서 나를 가리켜 신화의 주인공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신화는 명명하는 사람들,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만 신화일 뿐 안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겹겹이 위기와 안팎의 도전으로 둘러 쌓인 냉혹한 현실이다"

 

신화를 좇아 사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은 헛된 일확천금의 신화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을 양산했기 때문입니다.

 

기도원에 가보면 신화를 꿈꾸는 목회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40일 금식기도를 합니다. 능력을 받으려고.

왜 능력을 받으려는가? 큰 목회자가 되기 위한 꿈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로 신화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입니다. 병든 사회입니다.

성실한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해야지 희망이 어디에서 천사가 갖다주는 것으로 잘못 아는 그 사고가 결국은 그로 하여금 38년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도움의 손길,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십니다. 이것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일어설 수 있습니다.

병자는 육신의 장애가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는 앉은뱅이입니다.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앉은뱅이로 살았습니다. 그의 신체적 장애는 그의 삶을 철저히 파괴시켰습니다. 그는 결혼도 못했을 것이고 아무런 생활대책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비관했고 베데스다에서 희망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희망 없는 삶은 왜 생겼습니까? 그의 신체적 조건 때문입니까? 천사들이 자주 물을 동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남들보다 달려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까? 물론 이 모든 것도 불행의 원인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불행의 원인은 그의 생각입니다. 그는 육체가 그의 삶을 망가뜨려 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신은 더 깊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의 정신은 그의 힘없는 다리처럼 아무런 쓸모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불행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가 바른 생각, 바른 정신을 가졌다면 38년은 그 어떤 것보다 그에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세월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육신적으로는 즐거움도 희망도 없고 그 현실 속에서 자신이 행복해 지는 법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두 다리가 없이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연못에서 구차한 신화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성전으로 나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의 골방에서 두 다리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용기와 힘으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잘못된 신화에만 집착했습니다. 자기의 다리만 낫고 건강하면 모든 것들이 다 해결된다고 믿었습니다. 잘못된 정신입니다.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자들이 낫는 기적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2차 대전에서 다리를 한쪽 절단 당한 상이군인이 오는 것을 본 어떤 사람이 옆 사람에게 속삭였습니다.

"저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새 다리를 주실 줄로 기대하는가보지?"

그 말을 흘려들은 상이군인이 그쪽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나도 하나님이 새 다리를 주실 주로 기대하지는 않소. 그러나 한 다리 없이도 살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기도하러 온 것이오."

 

진정한 믿음은 새 다리를 달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한 다리를 갖고서도 두 다리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그 사실을 놓쳤습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내 안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게 더 신앙적입니다. 더 검소하게 해주시고, 절약하게 해주시고 가난의 영적 유익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훨씬 희망적인 삶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기관지인 평화신문은 <실직 신앙인의 생활 십계> 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라"-어려울 때 욕심을 버리고 기도하라. 하나님은 기도에 귀기울이신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라"-눈을 돌리면 나보다 어려운 처지인 이웃이 많다. 이들을 위한 봉사에 참여하라.

"옷을 항상 깨끗하게 입고 다녀라"-머리를 깔끔하게 하고 옷을 항상 단정하게 입고 다녀야 호감을 줄 수 있다.

"새벽미사에 참석하라"-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움직여라. 새벽공기는 당신을 상쾌하게 할 것이다.

"동료나 친구를 찾아가서 부탁하는 직업은 피해라."

 

우리는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얻어터져 일터를 잃고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에 밀려난 소외된 처지인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적의 힘만을 간구 하지 마십시오. 오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간구 하십시오. 이것이 힘을 잃지 않은 일입니다.

병자는 남을 탓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에 살면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는 남을 탓하는 마음만 늘었습니다. 우선 그는 성한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이 병자들을 누가 데려다 놓았을까요? 제 발로 걸어온 사람들도 있겠으나 38년 된 병자처럼 성한 사람이 갖다버린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니었기에 성한 사람들이 이곳에 갖다 놓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원망하느라 하루를 보내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을 원망했습니다. 이곳은 무정하기 짝이 없는 사회입니다. 나름대로 경쟁이 있고 견제가 있는 곳입니다. 초조하고 답답한 사회가 바로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그는 천사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자주 내려오지 않는다고. 그의 원망은 그의 마음을 더욱 병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7절. "주여…"

베데스다는 더 이상 자비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비뚤어지면 어떤 장소도 좋은 곳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역시도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이 이 교회로 하여금 건강한 곳이 됩니다. 내 생각이 비뚤어지면 건강한 교회도 없습니다.

그는 38년 된 병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병이 오랜 줄 아셨습니다. 그의 절망이 그의 상처가 오랜 줄 아셨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베데스다에서 나음을 입고 나갔습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연못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38년 된 병자는 마음대로 걸을 수도 없기에 연못이 동하는 것을 바라보는 데도 지쳤습니다.

그는 연못이 아니라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여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라는 사람이 베데스다에 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연못이 아니라 예수에게로 눈을 돌렸습니다.

 

예수님도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서로의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아셨습니다. 그의 상처, 38년의 슬픔, 원한, 쓰라린 과거를 아셨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독 그 사람에게 다가가 물으셨습니다.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자신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말대로 라면 그는 평생 나음을 입지 못하고 살아갈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사정을 아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이제 희망 없는 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예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신화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환경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이웃들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라보는 자들을 바라보십니다. 찾는 이를 찾으십니다.

 

결론

인생은 편도밖에 없습니다.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무엇을 주시하며 살 것입니까?

베데스다의 연못, 행각마다 병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청와대에도, 사법부에도 학교에도 병자들 투성이입니다.

누가 이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습니까?

어느 한 사람을 통하여 이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신화에 집착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넘어진 자들을 붙들어 줍시다. 예수의 사신이 됩시다. 사랑의 힘으로 일으켜 새워주는 사신이 됩시다. 여기에서부터 희망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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