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예배 설교

[찬양대 봉헌예배] 좋은 찬양대가 되려면시편 33:1

갈렙처럼 2025. 2. 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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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찬양대가 되려면

시편 33:1

 

서론

나폴레옹이 오케스트라 공연에 갔습니다. 그 날의 음악은 전혀 감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휘자에게 경비를 물어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부어가면서 이런 예술을 해야 하나?”

그러자 지휘자가 대답했습니다.

“각하! 이 돈은 각하가 쏘아대는 대포 한방에 불과한 경비입니다!”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 찬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노래와 찬양이 그저 ‘딴따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노래하는 이들에게는 ‘딴따라’라고 불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딴따라’는 연예에 종사하는 배우, 가수, 무용가 등 연예인을 을 낮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이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선호도 1번입니다. 그러다보니 연예인들은 정치, 사회⋯ 광고⋯ 등등에서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러니 교회라고 다를 것은 없습니다. 찬양대는 항상 봉사순위 1번입니다. 그 교회의 수준을 보려면 찬양대를 보라는 말도 있듯이 찬양대는 교회의 얼굴이요 간판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성가대가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도우미뿐만 아니라 늘빛교회가 주님을 찬양하는 데 큰 일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찬양의 중요성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찬양을 왜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다.

*구속하신 목적이다.

*치료의 능력이 나타난다.

*단합된 공동체를 만든다.

그러기 때문에 찬양의 중요성, 필요성과 함께 찬양의 음악성 내지는 영성에 대한 연구와 마음자세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찬양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와를 만났을 때 사랑스런 여인을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노래합니다. 노래 이전에 찬미의 시(詩)였고 그건 노래가 되었습니다. 결국 시와 노래는 같은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있는 찬양은 하나님에게서부터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찬양의 DNA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말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사랑이라면 사랑의 대상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독생자, 성령 하나님!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사랑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영광을 올립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성자는 성부와 성령을!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하시는 일을 찬미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내용입니다.

 

사랑의 전달방법이 있습니다. 노래입니다. 노래는 인간의 감정을 가장 전달합니다. 옛날에는 연애편지를 썼습니다. 문자로 구구절절 사랑을 전달했고 표현했습니다.

지금은 노래로 사랑을 전합니다. 그래서 지금 시대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보다는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대한민국 직장인의 고민이 글을 못 써서가 아니라 노래를 못해서⋯ 특히 회식자리에서, 노래방에서 노래를 못해서 망가질 때를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DNA를 받았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기 전에는 독창으로 하나님을 찬양했고 하와와 함께 짝을 이루었을 때는 합창으로 하나님을 찬양을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새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시냇물소리⋯ 모두가 음악이었고 찬양이었고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찬양이 달라졌습니다. 대상도 내용도 전달방법도 달라졌습니다. 그 중심에 처음으로 악기를 만든 유발이 있습니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창4:21)

유발. 그는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조상’이라는 것은 시작을 말하는 것이기에 발명자요, 연주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음악과 악기를 만들어 사람을 높이며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수단이 됩니다.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절,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무대뽀 할아버지는 노래하는데 일부다처제를 자랑하고 자기의 살인능력을 자랑하고 어떠한 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자신만만을 자랑합니다.

 

여기에 유발이 음악으로 할아버지의 자랑을 뒷받침합니다.

한마디로, 음악은 인본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음악은 경건을 버리고 안 좋은 의미에서의 ‘딴따라’가 되고 맙니다.

 

인본주의 음악을 제대로 경건음악으로 되돌린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평하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을까? 전투력, 리더십, 통치술, 성전을 사모⋯

그러나 그의 전투와 통치술에는 허점들이 있었다.

 

-성전으로? 하나님께서 사양하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찬양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찬양으로 경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고 다윗을 더욱 크게 하셨고 최고의 번영을 허락하셨습니다.

 

다윗은 찬양의 사람입니다. 찬양에 쏟아 부은 정성은 메가톤급입니다. 4천명을 악기와 성악으로 찬양하는 찬양대입니다(대상 23:1-5).

여의도순복음교회 찬양대는 오케스트라와 합쳐서 몇 백 명 될까요? 한 5백명?

다윗의 찬양대가 4천여명이라니, 얼마나 찬양의 비중을 높인 것입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입니다. 최고의 부흥과 세력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다윗은 항상 찬양으로 그 은혜에 보답했습니다.

 

세상의 노래는 두 상대만을 바라보면 됩니다. 노래를 부르는 자신과 노래를 듣는 청중 내지는 상대방입니다. 여기는 음악적 기교만 있으면 됩니다.

 

찬양은 다릅니다. 찬양은 셋을 향하여 부릅니다. 물론 일반 찬양은 하나님과 나 자신을 위해 부르면 됩니다. 그러나 찬양대는 다릅니다. 찬양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나 자신이 행복하고,

듣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공감해야 합니다.

1. 하나님께 영광

우리의 찬양의 1차 대상이자 절대대상이 누구인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습니다. 왜 그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있었기에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부는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고 선택하고⋯

 

성자는 직접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하셨고

 

성령은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면서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활동하십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협동적인 역사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런 사실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찬양의 대상이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찬양은 울리는 꽹과리와 그냥 노래가 되고 맙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지휘를 끝나자 연주는 너무도 훌륭했습니다. 모두 기립박수를 했습니다. 지휘자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일어나지 않았고 박수를 쳐주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그 사람이 일어났을 때 지휘자는 기뻐했습니다. 그에게 지휘를 사사해준 스승님이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일단 하나님 한 분만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찬양하는 시간은 청중의 박수도, 우리 자신의 즐거움조차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자꾸 그런 훈련이 되어야 찬양이 영성을 띕니다.

2. 자신이 행복

그러려면 영감어린 찬양을 불러야 합니다.

시편 33:1에는, 누가 찬송을 부를 것인가? 에 대해 나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여기서 세 가지가 나옵니다.

 

의인들⋯찬송은 의인의 노래입니다.

찬송은 즐거운 자의 노래입니다.

찬송은 정직한 자의 것입니다.

 

찬송은 마땅히 할 일입니다. 범사에⋯ 쉬지말고 찬양 범사에 찬양, 항상 찬양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유대인들의 성년은 12세인데 다윗은 30세 이상의 사람들로만 찬양대를 조직했습니다.

군인은 20세(민1:3), 레위인 봉사는 직함에 맞게 25세(8:24), 30세에 봉사하고, 제사장은 30세(민4:3)-원숙한 지경의 사람들로 성가대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실, 영적인 찬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국교회의 찬양대가 지난날에는 20대가 과반수입니다. 젊은 목소리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사명감보다는 무드에 약합니다. 그래서 꽃피고 단풍지면 무드 따라 가버려서 지휘자가 애를 먹습니다. 그런 면에서 30대, 지금으로는 40-50대의 나이로 찬양대를 조직한 다윗의 슬기가 돋보입니다.

40-50대는 자기감정을 떠나 하나님의 영성으로 충만한 시기입니다. 이때 믿음이 원숙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입술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옵니다. 영적체험을 갖고 있는 가슴입니다.

 

찬송은 악보가 있습니다. 작곡가들이 악보를 만들어 놓는 것은 그대로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영감어린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입니다. 찬송도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의 것입니다. 정확하게 불러야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루빈스타인은 공산국가에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단의 연주를 보고 이렇게 평했습니다.

“이렇게 기교가 훌륭한 오케스트라단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혼이 없는 오케스트라도 본 적 없다.”

요즈음 젊은 가수들은 음악보다는 기교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무대나 화면에 나가서 현란한 의상과 몸짓으로 춤추며 율동하는 것으로 인기를 얻어갑니다. 그러다 보니 ‘립싱크’가 대부분입니다.

 

찬양의 준비과정에서 준비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존경-지휘자를 존경하고 잘 따라주기를 바랍니다.

자세와 태도-찬양대는 교회의 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세와 태도가 성도들에게 본이 되고 감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각과 결석이 없어야 합니다.

복장-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초라하지도 않기를 바랍니다.

평소에 삶의 자세가 좋아야 찬송도 좋습니다.

좋은 팀워크와 친교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찬양은 성도가 마땅히 해야 될 예배입니다. 찬양과 함께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찬양대는 온 몸으로 영으로 찬양하는 자세를 기대합니다.

여러분들이 올바른 찬송문화를 선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청중들이 감동해야~

찬양대는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인들을 향하기 전에 하나님을 향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얼굴에서 먼저 빛나는 즐거움이 있기를 원합니다.

찬양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와 감동을 전해줍니다.

노래는 직접적인 감동이 있습니다. 일반노래에도 감동을 통해 치료를 받습니다. 하물며 영을 터치하는 찬양이야 말로 얼마나 많은 치료와 회복을 보이겠어요?

 

찬양대가 수준 높은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려면 청중들의 수준이 같이 올라가야 합니다. 찬양대의 수준이 청중들의 수준을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잘 듣는 법! 찬양대의 찬양에 흠뻑 빠져드는 음악영성들이 있어야 합니다. 찬양대가 청중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성장하듯이 찬양대의 영성은 성도님들의 영성과 같이 갑니다.

 

두 사람이 음악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사람은 큰 감동을 받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몹시 지루했습니다. 그는 옆에 앉아 열심히 음악을 감상하는 신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습니다.

“저 노래 별로이지 않습니까?”

“저 가수는 제 아내입니다.”

그는 순간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닫고 만회하려고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요, 가수는 훌륭한데 곡이 형편없다는 거죠.”

“저 곡은 제가 작곡한 것입니다.”

음악을 듣는 데는 음악적 이해력이 성숙되어야 하고, 미술을 감상하는 데는 미술에 대한 이해력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력이 성숙되어 야 합니다. 소꼬리는 세 번 이상 고면 멀건 물만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진국이 우러나옵니다.

결론

찬양이 뜨거운 교회는 부흥하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개인도 찬양을 뜨겁게 하면 어둠의 영들, 근심의 영들, 괴로움의 영들이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백성들과 함께 열심히 찬양할 때 정병들이 물러났습니다(대하 19~23)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옥에서 뜨겁게 찬양할 때 닫혔던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 16:25, 26)

찬양으로 마음이 뜨거워질 때 성령께서 역사하기가 편합니다. 마치 바다 위를 배가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찬양대 여러분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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