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길이 누구에게 있는가?
예레미야 10장 23~25절
서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입니다. 당시 영국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쌓여 있었습니다. 영국황실과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영국교회의 요청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종을 울리게 했습니다. 그 날 온 교회에서 종이 울렸는데 이 종은 “희망의 종”이라 명명했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존경받는 주교 윌리엄 템풀은 전 국민에게 방송되는 설교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대영제국 국민여러분, 잠시 후 이 땅의 모든 교회에서는 종이 울릴 것입니다. 종소리를 듣거든 모두 교회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입니다.”
상대국이었던 독일은 전쟁을 반대하는 목사, 히틀러는 반대하는 목사들을 일제히 체포, 구금했습니다.
그렇게 2차 대전은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전쟁이었지만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국가와 모든 길은 인간 히틀러가 만들어 간다는 국가간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신다는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인생의 길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하나님에게 있을까요, 내 자신에게 있을까요? 인생의 길이 누구의 소관에 있음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의 소관이라 생각하면 인간이 주인이 되는 인본주의의 길을 걸어갈 것이고, 하나님의 소관이라 생각하면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길을 걸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은 하늘과 땅으로 각각 이어질 것입니다.
1. 인생의 길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모든 일을 결정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인본주의는, 모든 역사가 인간 중심입니다. 여기에 교만과 파괴와 무정함과 탐욕이 들어섭니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살기에 자기 좋은 대로 선택하며 결정합니다. 그래서 일이 잘 될 때에는 자기가 잘 나서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일이 안 되면 자기가 한계이기에 절망하고 낙담합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이가 없고 그가 신뢰하며 기도하며 예배하며 초자연적인 힘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적 배경인 가나안 땅은 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비였습니다. 비를 누가 내리느냐? 바알 신과 아스다롯 여신이 내린다! 이 신은 누가 조종하는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사람이 신전에서 신들을 기쁘게 해준다면 신들은 흥분한 나머지 비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백성들의 신앙이었고 이 신앙은 인본주의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철저히 신본주의 신앙으로 살아갔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 그것은 광야에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을 마시게 되는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그 길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광야에서 얻은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 자신이 길이다!” 아무리 사람이 닦아놓은 길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지 않으면 죽음의 길이고 아무리 길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가시면 그 자체가 길이 되고 그 길에는 보호와 공급과 인도함이 있다, 이것이 광야에서 터득한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온 이래로 그들의 신앙이 점점 변질되었습니다. 그들은 인본주의가 되었습니다. 믿음도 인본주의 신앙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행복을 맡기기보다는 주변국가들과의 역학관계를 의지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작전으로 생존의 법칙을 삼았습니다. 그 결과는 지금 망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인간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 인간의 길이 걸음을 걷는 자에게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길이 결코 자기에게 있지 않습니다. 1902년 영국에는 64년만에 있게 되는 대관식으로 온 국민들이 들떠 있었습니다. 에드워드7세 왕자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대관식을 갖게되었던 그 날, 에드워드 왕자는 엄청난 맹장염으로 꼼짝을 못했고 대관식은 연기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국위를 떨치던 대영제국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롯의 동서 오르바, 그녀는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 신앙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어미와 룻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부정하고 자기의 길을 자기의 걸음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그 결과 오르바는 어둠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그 후손의 족보도 성경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걸음을 자기가 주장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마지막입니다.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20:24)
2. 인생의 길이 조상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길이 조상의 은덕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상제사를 깍듯이 하고 조상을 잘 섬깁니다.
우리 작은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묘를 높은 산꼭대기로 이장했습니다. 제가 벌초를 못하지만 언젠가 벌초하러 가보니까 너무 힘들어요. 왜 이 산꼭대기로 왔느냐? 고 했더니 조상의 은덕을 보아 축복을 누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조상 제사이니 명당이니, 사후에 다시 이장하느니, 하는 것이 결국은 조상들의 은덕을 입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축복이 조상에게서 내려올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조상들이 하나님을 잘 섬겨서 대대로 축복 받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상들의 신앙을 그 자손들이 계속 이어받아서 복을 받는 것이지 조상이 주는 축복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복이나 명예적인 복은 언제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을 짓을 했기에 받는 것이지 조상님들의 은덕이 아닙니다.
세상나라에 조상제사를 잘 해서 물질적인 복을 받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나라가 조상제사를 잘 해서 복을 받았습니까? 오히려 선교사들을 받아들여서 학교, 병원, 고아원, 양로원 한글교육 등을 통해서 개화가 되었고 경제적인 복을 누리게 되었지 않습니까? 중국은 유교국가이면서도 조상제사가 없습니다. 조상제사는 원래 왕족에게만 있었는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일반인의 가정에서도 효심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복의 근원처럼 잘못 이해되고 있습니다.
조상제사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고통과 가정의 분란을 일으키는 주범 중의 1순위입니다. 우리 집안의 제사가 여섯 번입니다. 거기에다가 명절을 두 번 합니다. 밤 12시에 제를 올립니다. 물질적인 손실과 형제들 간의 반목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조상간의 불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조상님들이 복을 준다? 조상님들이 자손의 길을 주장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 나가면 ‘가계저주론’으로 이어집니다.
‘가계저주론’-몇 년 전에 유행하던 주장입니다. 조상의 저주를 차단하지 않으면 그 저주가 집안 대대로 내려온다는 학설(?)입니다.
가계저주론을 말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조상의 죄는 후손에게 유전된다, 그 죄는 죄의 뿌리는 끊지 않는 한 가계의 저주를 타고 계속 내려간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를 찾아내고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면 가계의 저주가 차단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계의 영이 계속 가계를 통해서 활동하면서 인간을 저주하게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신앙은 귀신론의 신앙으로 이어집니다.
`가게저주론’은 이윤호 목사라는 분이 주창했는데, 그는 가계의 저주를 끊지 않았기에 젊은 사람들이 죽고 집안에 후환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윤호 목사는 클린턴의 성 스켄달도 가계저주론으로 억지 해석합니다. 클린턴의 계부는 알콜 중독자, 할머니는 몰핀 중독자, 어머니는 여러 번의 결혼을 한 경력자, 이런 가계에서 클린턴은 저주를 이어받아 성 중독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조상 중에 전도사가 있었는데, 그가 핍박 중에 배교자가 되었는데 그 자손들이 계속 배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는 교회에서 계속 남을 괴롭히고 교회 안에서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그가 기도 중에 보니까 그 5대째 조상이 정승벼슬을 했는데 그가 모함으로 유배했고 그 때의 복수의 영이 가계를 타고 계속 흐르면서 남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길은 조상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조상의 길은 죽음의 길이고, 그 길은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이기에 인간에게 축복을 줄 수도 없고 해코지를 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조상들이 축복을 할 수 있다면, 어느 조상의 영이 축복하며 어느 조상의 영이 저주를 하겠습니까?
3. 인생의 길이 여호와에게 있습니다.
인생의 길은 인생을 창조하시고 세상에 보낸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에게 모든 길을 맡겨야 합니다.
서울대학교병원장을 지냈던 한만청 박사는 건강검진센터를 건축하고 기념으로 본인이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방사선 전공입니다. 늘 자기 몸을 살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계에서 간암이 1cm 이상 자란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아무리 자기 자신의 몸을 관리하고 늘 정기검진을 해도 인간의 길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암 투쟁 과정을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되라>는 책으로 발간했습니다.
인생의 길을 너무 앞에 있는 것만 보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고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미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술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전도사 9:11, 12).
문제는 사람의 눈에는 바르고 부하고 명예롭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만이 진정으로 축복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지혜자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10:9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결론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여호와께서 내 길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룻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시부와 남편과 남편의 형제가 죽음을 당한 집안의 며느리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저주받은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문의 저주를 끊는다? 가문의 계보에 저주가 흐르고 있다? 그런 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 보아스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보아스는 전 남편 기룐보다 백 배 천 배 멋진 남자였고 유력한 부호였습니다. 하나님께 길을 맡길 때 종말 좋은 길을 얻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서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결과를 죄의 탓으로 돌리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나의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였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을 말씀을 그의 귀히 여겼구나. 그는 듯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리니 내게 작정하긴 것을 이루실 것이다”(욥기 23:10~1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으로다”(시편 37:23).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우리시고 네 의를 빛같이 정오의 빛같이 인도하시리라“(시편 37:5, 6).
우리의 걸음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이 사망의 길이며 아무 소득도 없는 길입니까? 그래도 우리의 길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늘빛가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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