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감옥(監獄) 문을 열라!
마태복음 18장 23~30절
서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용서’(容恕)입니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용서는 제비꽃이 자기를 짓밟는 구두에 향기를 풍기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용서는 아름다우면서도 실천이 힘든 단어입니다. 유대랍비들은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되 세 번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잔인한 사람에게 관대한 것은 결국 죄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넉넉한 마음으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절) 물었을 때에 2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490번은 무한정 용서입니다. 그러면서 23절 이하의 말씀을 하십니다. 24절, 재무부 장관 급의 어떤 사람이 왕에게 엄청난 국고 손실을 끼쳤습니다. 빚이 1만 달란트(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 한 사람이 6,000일 일해야 모을 금액)=6조원에 달하는 돈입니다. 일당 10만원으로 계산하면 164,383년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천문학적 금액입니다.
당시 로마가 식민지 팔레스틴에서 피를 짜듯 유대인에게 수탈해 간 연간 세액이 800달란트였습니다. 1만 달란트면 이 연간 세액보다 10배가 넘습니다. 국민경제가 휘청거릴 만큼 엄청난 금액입니다. 평생 감옥에 갇혀 나올 수 없는 손실입니다. 왕은 그 사람과 처자식과 살림을 몽땅 노예시장에 경매로 팔라고 했습니다. 그 가련한 사람은 왕의 발 앞에 엎드려 애원합니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 그러자
27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남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유년의 누구일 수도 있고 청년 시절이거나 근래 타인에 가한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말로, 물질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가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셨고 그들도 용서의 마음으로 지하 감옥에서 나를 풀어주었고 상처 입혔던 나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 많은 이들에게 용서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용서받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28절,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백 데나리온이라면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천만 원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빚을 진 사람을 목을 잡고…협박과 모욕을 하면서 빚을 갚으라고 닦달합니다. 6조 대 천만원, 그러면서 자기에게 빚진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사람뿐일까요? 누구나 자기의 감옥이 있습니다. 아직 용서해 주지 못한 사람을 가두고 사는 과거 속 감옥입니다. 내 감옥의 죄수는 친구일 수도 부모일 수도, 사별한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우 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내 지하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있는 한 나 자신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도 감옥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사랑이 컸고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기에 하나님의 상처는 더욱 컸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섭리에 역행했고 왕들은 우상 숭배에 앞장서므로 하나님에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왕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처형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백성들로 크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감옥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옥 감옥은 있어도, 마음에 감옥은 갖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시고 감옥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마음의 감옥을 열어 버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게 바로 본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나는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다. 그들을 미워하며 증오하며 그들의 명예에 상처를 가하려고 벼룹니다. 다른 사람들도 감옥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지하 감옥 에는 나의 용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는 오래 전에 묶여있고 누구는 십 수 년 전부터 묶여있습니다. 때로는 아버지가 사슬로 묶여있습니다. 부모로서 제대로 하지 못한 실수들의 목록을 주머니에서 끄집어내어 크게 읽어드린 후 소리칩니다.
“당신이 이 모든 일을 내게 저질렀고 이제 나는 당신이 내게 한 것을 보복하겠어요!”
그리고 증오합니다. 때로는 거래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어려움 당하고 집안이 무너지고 가족이 흩어지면 원한으로 내 감옥에 가두어 놓고 기억날 때마다 그를 찾아가서 증오하며 미워합니다. 때로는 학교 선생님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 앞에서 수치스런 말을 한 사람, 그 한마디는 평생 내 마음을 상처받게 하고 행복해야 할 학창시절을 끔찍한 감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때로는 직장 동료가 되기도 하고 같은 교회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받은 기억을 회상할 때마다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서 그들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돌아옵니다. 그럴수록 마음은 황폐해집니다. 맑고 아름다운 영혼을 갖기 위해서는 지하 감옥의 문들을 열어야 합니다. 과거 속에서 나에게 상처를 가한 사람들은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진정으로 나 자신의 해방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액을 사기당하고 그 사기꾼을 원망하며 미워하며 이를 가는 동생에게 언니가 충고합니다.
“너는 도마뱀만도 못한 년이다. 봐라! 도마뱀은 꼬리를 밟히면 그 꼬리를 끊고 도망간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왜 그리도 미련하냐? 너를 짓밟고 있는 그 증오 때문에 너는 죽고 말 것이다. 미련 없이 끊어버려라. 뚝 끊어버리고 잊어라. 그래야 산다!”
그렇습니다! 용서하기 전에는, 두 개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죄의 무거운 짐’과 ‘원망의 무거운 짐’입니다. 이게 그 사람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를 짓누르고 숨이 막히게 합니다. 계속 키우면 나중에는 내 마음의 감옥 문보다 더 커져서 평생 내보내지 못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고 용서를 해주어야 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어야 살 듯이 감옥 문을 열어야 내가 썩지 않고 회복되고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라는 열쇠로 마음의 감옥에서 석방시켜주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감옥에서 해방된 것은 목사님입니다.
링컨은 원수를 없애는 비결은 용서라 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친구로 삼아버리라!”
이 사람들은 감옥 문을 열고 원수들을 놓아버렸습니다. 마음의 자유함과 평안을 얻었습니다. 감옥문을 열고 원수들을 해방시키는 위대한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이들을 마음속에 가두어 두지 않았습니다.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죄수는커녕 감옥조차 만들지 않았습니다. 온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문을 열고 내가 가두고 있는 사람들을 석방해 주어야 합니다.
켄트 크로켓은, <내 영혼의 119>에서 용서의 원리 몇 가지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 우리는 그 사람이 나를 해롭게 했거나 상처를 입힌 것에 근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것을 근거로 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알렉스 캔드릭은 ‘사랑을 배우다’에서 말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무죄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분의 방식대로 처리하실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과거의 상처들을 치유하시도록 해야합니다. 만약 이 상처들이 치유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뢰가 되어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빨리 그 상처를 치료하시도록 요청해야 합니다.
㉢ 우리는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야 합니다. 왕은 종을 향하여 측은히 여겨, 측은지심의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용서는 분노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연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그 속에 상처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남에게도 공격적이 되고 상처를 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야 합니다.
㉣ 마음에 상처받은 순간들을 기억치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당하면 그 순간을 마음에 녹화를 해둡니다. 그리고 틈틈이 재생 단추를 누르고는 우리가 겪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재생시킵니다. 계속 재생시켜서 재방영을 하는 동안에 상처는 점점 더해갑니다.
컴퓨터 파일을 삭제하려면 <당신은 문서를 삭제하려고 합니다. 확실합니까?> 경고문이 나옵니다. 경고가 나오는 것은 서류 파일이 지워지면 더 이상 불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단추를 누르는 것은 시도하지만 완전히 지우기 위해서 두 번 째의 단추를 누르지는 않습니다. 첫 번 째 단추를 누르는 것으로 그 상처를 용서했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 번째의 삭제 단추도 눌러야 합니다. 비디오테이프를 지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옥에서 그 사람을 석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결론
할머니가 나지막이 “주여, 죄를 용서하소서~” 버릇처럼 말했을 때 손자가 듣고 묻습니다.
“할머니, 용서가 뭐야?” (…?)
“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
“아님, 잊어달라는 거야?”
그제야 할머니가 무성의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냥 한번 봐달라는거야~”(김애란의 소설 ‘노찬성과 예반’에서)
그렇습니다. 용서는 없던 일로 하자는 것도 아니고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번 봐주는’ 것입니다. 한 번 봐주는 것을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이라고 말합니다. 늘 용서의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두어 두면 내가 죽기에 풀어주는 것이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20절,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바로 용서를 하며 사는 사람 둘이 삽심하여 기도할 때에 19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일을 이루십니다.
자, 이제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십시오. 감옥 속에서 가둬두었던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아버지, 어머니, 남편이었던 사람, 아내였던 사람, 한때는 동업자였던 사람, 친구였던 사람… 이제는 감옥에서 그 사람들을 세워놓고 채찍질하려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열쇠로 쇠사슬을 풀어주고 석방시켜 주기 위해서 그 사람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나는 이제 당신을 떠나게 할 것입니다.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자유입니다. 당신을 가두어 놓았던 지하 감옥에서 당신을 석방시킬 것입니다.”
그제야 우리 마음은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누군가를 용서해 주고 감옥에서 풀어주는 그 순간, 그것은 나 자신을 해방시켜 주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사하셨기 때문이다.”(c. s. 루이스)
언젠가 김부남 사건이 사회 문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성폭행한 동네 아저씨를 성인이 되어서 보복 살인한 일로 우리 사회가 시끌벅적했습니다. 그 정당성이야 어디에 있든 심리적, 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20여 년 동안 동네 아저씨를 자신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가 보복 살인하고 만 것입니다. 20년을 흉기를 가두었으니 본인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이제 당신의 지하 감옥에는 누가 갇혀있습니까? 감옥이 텅 비어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위장병도 골치 아픈 것도, 울분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런 용서의 삶을 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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