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받은 구원, 은혜안에 머물자!
사도행전 15장 10, 11절
서론
사람의 마음, 인심(人心)이 사나워진 세월을 만났습니다. 우리 집이 연립주택 촌이라 싸우는 소리가 자주 들립니다. 위아래 층 주민들끼리 어찌 그리 싸우는지…. 유명 인사 사진을 몰래 찍는 파파라치, 이제는 교통 법규 위반을 경찰에 신고하는 ‘카파라치’까지 등장해서 올해 신고 수가 300만 건을 돌파할 전망입니다. 공익을 위한 시민 신고는 바람직하지만 이게 심하면 정이 사라지는 세태를 만들어 냅니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릴 때는 4인 이상 자장면 배달도 신고했답니다. 서로 고발사회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은 이제 이웃사촌이 아니라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위험한 민원인이 되었습니다. 자동차 주차문제로 싸움이 벌어졌는데 한쪽 상대는 교회 승합차를 몰고 다니는 분입니다. 교역자인지, 교회직원인지… 욕을 하는데 일반인 못지않습니다. 그렇게 싸우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는 그 교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 교회 교인들도, 담임목사님도 같은 성향으로 느껴져 그 교회 앞을 지날 때면 좀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부부싸움을 해도 집밖으로는 새어 나가지 않게 싸우시고 승용차에 성경을 놓고 다니거나 교회 교패를 붙이고 다닌다면 따질 일이 생겨도 제발 좀 참아주세요~ 사람들은 내 이름은 몰라도 신자라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브라운은 그의 책에서 “수의사는 개만 보고도 생면부지의 개 주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무엇을 배울까요? 세상은 신자들을 통해 은혜의 교회를 생각하고 은혜의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냥 내가 좀 손해보고 넘어갈 수는 없을까요?
기독교복음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기관으로 교회를 세웠다 합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 어원을 따라가면, ‘기쁘다’ ‘즐겁다’는 동사가 나옵니다.
교회는 은혜의 기관이요 장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구원을 받았다는 기쁨들이 밖으로 흘러넘치면서 타인에게 친절하고 명랑하고 따듯한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교회를 생각할 때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짐짓 거룩한 표정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교회란 잘못을 청산한 후에 가는 곳이지 있는 모습 그대로 가는, 은혜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상담가 데이빗 시멘즈는, 복음주의 교인들의 정서 문제를 두 개로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한다는 것!
그 은혜를 남에게 베풀지 못하며 산다는 것!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은혜로운 일입니까? 낙원은 기쁘고 즐거운 곳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그들은 비은혜의 부부, 비은혜의 가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담은 “이 여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키며 여인을 비하시킵니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비은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은혜의 다른 모습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내 행위를 내가 책임지겠다! 나아가서 구원문제도 내가 해결하겠다! 이런 사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끼어 들만한 공간이 없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은혜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카리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은혜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 비은혜가 들어왔습니다.
5절, “바리새파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개종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들의 말인즉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의 길은 열어놓았지만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의 중심은 ‘불량품 사절!’입니다. 불량품은 인간이든 제물이든, 어류이든, 무엇이든 사절! 입니다. 그래서 불량품을 정품(正品)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그 과정을 율법으로 보았습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정품-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율법은 출애굽 구원 이후, 3개월 후에 시내산에서 주신 것입니다(출 19:1). 그러니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주신 것은 구원 이후, 성민을 위한 생활지침입니다. 성화를 위한 기능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 신자들에게도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는 종교적인 행위를 넘어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조국, 내 혈통이 있는데 왜 유대인으로 개종해야 합니까? 이것이 초대교회에 걸림 노릇이 됩니다.
10절,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능히 메지 못할 멍에. 그것이 율법이고 할례입니다. 여기에는 은혜라는 개념이 사라져 버립니다. 기독교복음의 핵심이 은혜인데, 요즘말로 말하면 유교식 기독교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충효에 매진하는 신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무거운 멍에에 무슨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잘못된 믿음을 바로 잡아주는 것입니다.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시카고대학을 방문하자 학생들과 학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 가장 심오한 진리는 무엇인가요?”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예수 사랑하심… 이게 은혜입니다. 자격이 없는 이가 사랑받는다!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기쁘고 즐겁습니다. 사회학에는 ‘거울 자아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아내, 아버지, 상사 등)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말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면 거울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베드로는 예루살렘회의에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행 15:11)고 말합니다.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은혜란,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 속임수, 교만, 포르노, 간음, 심지어 살인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본질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옵니다.
회개하고 몸부림을 쳐야만 마지못해서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먼저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며 모든 것을 품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공급은 계속 이어집니다.
은혜는 율법 이전에 존재합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숨었습니다. 그들은 선행으로 나오지도 않고 용서해 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두려움으로 숨어버린 것입니다. 은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그들 자손이 그들을 회복시킨다! 죄인신분에 대한 용서와 자손들을 통한 구원과 에덴 복귀-이것이 은혜입니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냥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 은혜를 이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봅니다. 탕자는 돌아오기는 해도 울고불고 사정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던 아버지가 달려 나와서 아들을 그냥 수용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회개의 몸부림을 쳐야만 마지못해 받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체신조차 버리고 아들이 돌아오면 맨발로 뛰어나가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은혜는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달려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데우스는, 라틴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이 영화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려 애쓴 17세기의 한 작곡가를 다룬 영화입니다. 독실한 신자 안토니오 살리에르는 불후의 찬미곡을 만들고픈 의욕은 있으되 재능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천재적 은사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이름의 아직 사춘기도 지나지 않는 개구쟁이 소년에게 부어주신 데 대해 분노를 느낍니다.
욥기는 “하나님이 지면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한테 벌주시는 이유를 몰라 고민했다면 살리에르는 하나님이 자격 미달의 애송이한테 상주시는 까닭을 놓고 고민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설명됩니다. 은혜는 조건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부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던 은혜의 사랑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습니다.
4세기의 신학자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적수였습니다. 펠라기우스는 도시 출신에 점잖고 구변(口辯)도 좋아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습니다. 반면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낸 어거스틴은 어머니와의 관계도 유별났고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노력으로 시작하여 잘못되었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결실도 좋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님을 좇았으나 펠라기우스는 자기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믿음은 어거스틴이지만 실제생활은 펠라기우스 쪽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마음까지 사려고 강박적인 노력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거스틴:"하나님은 가치 있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선택한 사람을 가치 있게 하신다."
고든 맥도날드는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않게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일은 굳이 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것보다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행하는 어떤 일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남을 도울 수도 사랑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들의 의(義)를 드러내거나 보람 때문에,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전략 차원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있고 그 은혜를 남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 교회의 자선 행위는 교회를 자선 기관 중의 하나로 인식시키고 말 것입니다.
은혜의 기관들이 비은혜의 기관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자꾸만 비은혜들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은혜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비은혜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분구덩이를 잘 덮어놓으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누가 그것을 자꾸 헤저으면 냄새가 납니다. 은혜가 없는 곳에는 자꾸 헤젓습니다. 은혜가 있는 곳은 사랑으로 덮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배운 비은혜의 연쇄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눅 4:19). 클리포드 윌리엄스는 “제자도란 한 마디로 은혜로 사는 삶이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은혜를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나눠 줄 정도로 은혜가 흘러 넘쳐야 합니다. 내가 교회입니다. 내가 은혜를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간직하고 흘러넘쳐 타인들에게 가야 합니다. 세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우리교회 설립 감사주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은혜를 키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주일마다 은혜를 받고 기쁘다~ 행복한 에덴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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