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고린도후서 5:17~19)

갈렙처럼 2025. 2. 4. 06:54
반응형

화목하게 하는 직책

고린도후서 5장 17~19절

 

 

서론

세계 역사에 문제아로 두 사람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마르크스로서 공산주의를 만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동등하다는 이념으로 시작된 공산주의는 심한 빈부의 차이와 불신만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생산도구로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부재입니다. 사람은 이념의 하수인이 되었고 이념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목숨은 파리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혁명을 말했습니다. 그 혁명은 자기들을 향한 혁명이 아닙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한 사람들 때문이다"

"부한 사람과 자본주의를 제거하라"

"인텔리켄차를 몰아내라!"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혁명입니다. 이런 논리에서 그들은 혁명을 말했으나 있는 자들에 대한 숙청에만 혈안이 되었기에 자멸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굴복당했다기보다는 자기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여 자멸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아는 프로이드입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끼친 영향은 향락위주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이런 이들은 자신에 대한 혁명은 물론 구조악에 대한 혁명도 요구할 줄 모르고 그냥 배만 부르면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부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본주의 역시 인간 상실을 낳을 수밖에 없을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뒤집어 놓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회심한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데살로니가로 갔을 때 그곳의 사람들이 바울을 대적하며 소리질렀습니다.

"이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다!"(행17:6)

이 말은 세상을 뒤집으려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혁명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뒤집는 일이 아닙니까? 바르게!

공산주의는 어떻게 뒤집었습니까? 왼쪽으로 뒤집음으로 인간부재를 낳았습니다.

자본주의는 오른쪽으로 뒤집음으로 하나님 부재를 낳았습니다.

바울은 바로 뒤집었기에 그가 전해준 복음을 받아들인 저 봐이킹, 해적의 나라 영국이 신사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혁명가입니다. 그는 어디에 가나 가만있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발칵 뒤집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뒤집어 놓으면 간수들도 그 발아래 무릎을 꿇고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혁명, 예수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위대한 혁명가가 되었습니까?

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혁명가였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혁명을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과의 뒤틀려진 관계를 바로 고쳐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를 몰아내는 혁명, 죄를 해결하는 혁명, 하나님의 사랑의 혁명, 원수까지도 굴복시키는 혁명은 사랑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조건없이 품어주고 사랑해주고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그의 행위는 원수들까지도 무릎을 꿇게하는 엄청난 변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혁명의 물결 앞에 하루에 수천면 수만명식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혁명을 위해 그분은 오셨습니다. 그 혁명을 위해 그는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진정한 혁명은 자신을 희생할 때 일어납니다.

이 혁명의 불길에 불붙은 자가 바울입니다. 그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독선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이방인들을 경멸했습니다.

 

"뱀을 죽이는 일은 잘하는 일이다. 이방 사람을 죽이는 일은 더 잘하는 일이다"(탈무드)

그들은 여호와 종교가 이방인들에게 흘러가는 것을 매우 경계했습니다. 그리고 잘못 해석하거나 덧붙이는 것도 경계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의 최전선에 섰던 자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종교를 지키기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자신도 말했습니다.

"지나칠 정도였다"

그는 종교의 이름으로 살인, 체포, 구금, 학살을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혁명에 녹아진 것은 비단 부활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 그리고 원수까지도 굴복시키는 그의 위대한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날로 혁명가가 됩니다. 예수의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가가 됩니다. 무력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혁명가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새로운 관계로 재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혁명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식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진노했다기보다는 우리가 본질상으로 하나님을 싫어했고 부담스러워했으며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로 죄를 없앴습니다. 죄는 하나님 쪽에서도 우리들을 거부했고 우리 쪽에서도 하나님을 싫어하던 요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죄를 걷어냄으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헐어졌습니다.

이제는 이런 새로운 관계들이 되었으니 서로 화목하라고 합니다(20절).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합니까? 독생자를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과 바른 관계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신앙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열심이 있었고 은사도 풍부했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속에 불붙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런 사랑에 불붙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무슨 종교 교습소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은사를 받았을 때 그것을 성적으로, 능력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제일이라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교만은 자기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거두어 들이고 자기에게 고정시킵니다. 자기만이 제일 잘 믿는다고 자처케 합니다. 그러자 자연히 사랑이 식어지고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신앙의 본질을 잘 이해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새 신분을 얻은 자들은 여러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합니다. 신앙이 균형을 잡히지 못하면 독선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식이 아닌 모든 것은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에 불 붙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어떠한 허물조차 가리워질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한 쪽 눈을 크게 감고 한 쪽 눈은 크게 뜨는 것이다"

단점을 위해서는 눈을 감고 장점에 대해서는 눈을 크게 뜨는 것입니다.

 

잘못된 경건은 고독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다는것입니.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녀들을 위한 사랑,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성애요, 모성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남남 간에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가 되었으니 우리도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끼리, 아니 늘빛교회 교인들끼리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자들은 서로 화목합니다. 화목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에 갔더니 큰 젓가락으로 서로가 밥을 먹여주고 있었습니다. 지옥에는 서로 자기만 먹으려고 하다가 삿대질을 하고 있었답니다.

천국입장권을 받은 사람이면 이 세상에서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천국시민의 소양, 즉 사랑이요, 화목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들의 인사도 "샬롬!"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대인관계가 좋습니다. 그들은 물질관계는 무정한 것 같으나 정직함으로 비난을 만회합니다.

유대인들의 좋은 사회성이 그들을 출세케 합니다. 1992년 4, 29 흑인폭동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은 피해가 없었습니다. 평소의 대인관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3.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자기들에게 맞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직권을 남용하거나 남의 은사들을 지나치게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화목하게 하는 직책은 모든 이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화목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성품으로 가볍게 넘겨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은 모든 곳에서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탈무드에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에서 나갈 때 환영을 받고 어떤 사람은 들어올 때 환영을 받는다"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모두 웃을 것이다"

"하나님을 웃기려면 사람들을 웃겨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언제나 피스 메이커, 평화제조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 유머가 있고 화목을 만들어 가는 평화제조기가 되어야 합니다.

 

연못에 조그만 바위가 있었습니다. 이 바위에는 개구리 세 마리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은 어제나 토닥거리며 싸우기 일쑤였습니다.

"내 구역에 들어오지 마. 이 구역은 내거야"

"이건 내거야,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어."

이 연못에 커다란 두꺼비가 살았습니다. 그는 세 개구리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을 늘상 마음 아파했습니다.

두꺼비가 "이건 우리 모두의 땅이야. 서로가 양보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해" 라고 타일렀지만 그래도 개구리들은 듣지 않고 눈만 뜨면 다투었습니다.

 

어느 날 비가 와서 연못이 물이 점점 불어나 바위가 없어졌습니다. 개구리들은 그제 서야 큰일 났다 싶어 다른 바위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그 바위에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들은 서로를 꽉! 부둥켜안고 무서움을 참아내었습니다. 나중에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진 뒤에 보니까 그것은 바로 두꺼비의 등이었습니다.

물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 등이 아프고 힘들었지만 여러 세 개구리의 화목, 세 개구리의 행복을 위해 그것을 견디고 참아낸, 그 직책을 감당한 두꺼비의 희생이 불신과 반목을 잠재웠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심한 반목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작은 땅 덩어리에서 서로 편을 가릅니다. 고작 살아봐야 백년 미만이거늘 아옹다옹 거리며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합니다.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여기에 합세하여 서로 불신하고 비판만 하면 누가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똑똑해도 안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똑똑해도 남에 대해서는 후하게 살아야 정이 가고 사랑이 갑니다.

예수의 사랑의 혁명만이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을 다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 혁명만이 모든 불신과 거짓을 몰아낼 수 가 있습니다.

결론

오늘의 세상은 평화를 선전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너무 속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희생함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숨겨진 야망 때문에 국민들을 모두 전쟁터의 사병으로 만들어 가는 이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정말 평화를 만들어 가고 화해케 하는 자들이 우리 사회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때에 이 나라는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할 조건을 다 갖춘 나라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더욱 행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