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불행이 끼어 들 때
마가복음 6장 21-43절
서론
저는 신학을 하면서도 개척교회를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기관목사나 문서선교를 위한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리 교단의 총회교육국에 들어가서 일할 기회가 왔습니다. 1월부터 와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7년을 섬기던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하고자 하는 부서에 더 빽이 좋은 사람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저는 9개월을 쉬다가 늘빛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9개월 동안 사람이 미워서 혼이 났습니다. 약속을 지켜주지 않은 사람도 밉지만 나대신 들어와서 일하는 그 사람조차 미웠습니다.
느닷없이 내 인생에 남이 끼어 들어와 내 축복을 가로챌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평온하던 가정에 질병이 끼어듭니다. 질병은 당사자 본인에게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가정을 충격과 슬픔 속에 빠지게 합니다. 행복했던 부부 사이에 누가 끼어 들어 한 가정을 갈등과 긴장관계로 몰아갑니다. 회사에서 잘 지내고 있는 데 누가 끼어 들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입니까?
본문은 바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 회당장의 인생에 불행이 끼어들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회당장은 회당의 책임자였을 뿐만 아니라 장로회의 의장입니다. 그는 한 마을의 지주요 정신적, 행정적 책임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안정적 위치의 사람입니다. 그에게 딸의 죽음이라는 고통만 찾아오지 않았던들 모두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며 살아갔을 특권층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에게 불행이 끼어들었습니다. 열 두 살난 딸에게 죽음이 끼어 든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은, 소녀가 열두 살이 되면 성인여자가 됩니다. 법적으로도 남자를 사귀게 되고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열두 살이면 다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성인식을 올릴 딸에게 세상 말로 죽음의 마(魔)가 끼인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세상이 노랗고 눈이 뒤집힐 일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딸 아이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앞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거라사 광야의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깨끗하게 고침 받고 멀쩡한 모습으로 마을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제 딸의 병을 고쳐줄 사람은 예수 외에는 없었습니다. 회당장은 망설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서 이단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갔다가는 자신이 평생을 쌓아올렸던 명예와 신분이 박탈당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딸을 위해 자존심도 지위도 친구들도 버렸습니다. 그에게는 딸이 소중했고 죽음만은 막아야만 했습니다. 회당장은 22절,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회당장이 나사렛 목수 아들의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쇼킹한 일입니다. 이제 야이로의 종교적 신분과 주목받던 삶은 끝난 것입니다.
그는 발 앞에 엎드린 것만 아니라 23절 "많이 간구"하였습니다.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애원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24절,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신이 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가시겠다면 딸은 이제 살아난 것입니다. 그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2. 회당장은 조연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끼어들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입니다. 한번 하혈하기 시작하면 끝날 줄을 모르는 피비린내 나는 고약한 병, 그 여인은 예수님 모르게 슬쩍 다가와서 옷 가를 만졌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셨으면 좋겠는데 주님은 발걸음을 멈추시고 누가 나를 만졌느냐며 당사자를 찾는 것입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예수님은 그냥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여인이 앞으로 나와서 실토했을 때 그 여자와 말씀하시며 시간을 지체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렸겠어요? 많아보아야 10분 아니면 20분 정도가 아니겠어요?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은 가슴이 탑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여인에게 흘러가 버리는 게 속상하고 예수님께서 계속 지체하시는 게 가슴이 탑니다. 이러다가 다시 제2, 제3의 여인이 나타나서 주님의 능력을 소비시키고 시간이 지체된다면 딸은 죽게 될 것입니다.
아닌게아니라 염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알려주었습니다.
회당장은 너무도 억울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먼저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면서도 딸을 살려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여인이 끼어들면서 그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는 축복을 가로채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조차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여인만 응시하며 여인의 깊은 믿음에 감동을 받으시는 모습입니다.
회당장은 주목받던 자리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뒷자리로 물러났습니다. 회당장은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초라하며 분하기도 하겠습니까?
여인은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가만히 다가와 옷가를 만졌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먼저 고침 받았습니다.
자신은 회당장이라는 특권마저 내던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 앞에 엎드렸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주님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고 있는 판인데 여인은 고침 받고 자기 딸은 죽고 말았습니다. 너무 억울하고 밉습니다.
이제 온통 사람들은 여인에게 쏠려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던 한 남자는 꼴이 우습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이런 입장이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먼저 예수 믿었고 내가 먼저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종종 내 기도보다는 다른 사람의 기도를 더 먼저 응답하십니다. 나보다 늦게 뛰어든 사람이 은혜도 더 많이 받습니다. 내가 더 기도했고 더 수고했는데 왜 내 병은 고쳐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병은 먼저 고쳐주시는지요? 나에게는 축복해주시지 않고 다른 사람이 먼저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는 조연으로 물러서고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합니다.
3. 모두가 주연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로 등을 돌립니다. 교회에서 등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자신을 우습게 여겼다고 분노합니다. 그리고 끼어 든 사람을 미워하며 기쁨을 상실합니다.
회당장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꿈은 사라졌고 그는 자신이 수고한 것만큼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식은 죽었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안중에서 벗어나고 그래서 2류 배우로 전락했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다시 그를 찾으시며 그가 주목받을 때를 기다리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36절,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회당장은 딸이 죽었음에도 계속 낙망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계속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회당장은 여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을 경쟁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녀도 자신처럼 괴로운 사람이며 고침 받아야 될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자기 딸은 열두 살입니다. 이제 막 성년에 접어드는 열두 살의 소녀가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애석한 일이지만 바로 눈앞의 그 여인은 12년을 혈루증으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힘든 세월이었습니까? 그 여인도 고침 받아야 합니다. 야이로는 그 사실을 동정했고 인정했습니다. 그 여인이 먼저 고침 받는 것이 괘씸한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함께 예수님께로 은혜를 받아야 하고 축복을 받아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누가 먼저 믿었고 누가 먼저 이 교회에 왔고 그래서 목사의 사랑을 덜 받고 더 받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 비록 누가 나보다 먼저 그 축복과 기도의 응답을 받더라도 야이로처럼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2) 야이로는 계속 간청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이적을 베푼다 해서 그분의 능력이 감소되거나 고갈되는 것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아직도 시간이 있고 아직도 주님께서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계속 간청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 누가 나보다 먼저 응답 받고 축복 받았다 해도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셨는가? 생각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결코 남에게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나의 축복은 나에게만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축복 받았다 해서 너무 안달하거나 질투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축복은 그의 것이요 나의 축복은 나의 것입니다. 때가 되면 내 축복도 임하게 될 것입니다.
3) 야이로는 조연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이로는 주목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관심은 여인에게로 몰려갔습니다. 야이로는 꼴이 우습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야이로는 예수님 곁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사람들이 자기를 얼마나 주목 하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정성에 얼마나 관심을 써 주실까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주님 곁에 있고 사람들이 와서 딸의 죽음을 알렸을 때에도 낙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이로의 열심과 믿음과 기다림은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잊지 않으시고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딸은 살아났습니다. 그는 다시 주인공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고침 받았다는 것이 큰 뉴스거리입니까, 열 두 살 난 소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더 큰 뉴스입니까?
당연히 살아난 것이 더 큰 뉴스거리입니다. 회당장은 다시 뉴스의 주인공으로 돌아왔고 그 무대에서 각광을 받게되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조연의 자리로 밀려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장차관이 임명되고 고위직 관리들이 임명되는 것을 보세요. 인생의 앞길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조연의 자리로 밀려났다 해서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전면에 내세울 때가 있습니다.
결론
저는 제가 바라던 기관목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남에게 그 축복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늘빛교회라는 소중한 무대를 주셨고 여러분을 알게되었고 `교사의벗'이라는 교육잡지를 주셔서 그보다 더 큰 일을 맡기시고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질병과 죽음이라는 불행이 끼어 들어오고 한 여인이 끼어 들어와 자신의 축복을 가로채고 있음에도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주님 옆에 서 있었던 회당장 야이로,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를 다시 찾으셨고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연에서 조연으로, 그리고 다시 주연의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주연일 때가 있고 조연으로 밀려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끼어 들어 내 자리를 차지해버리고 내 영광을 가로채어 버리는 인생의 고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밀려나는 때가 있을 때라도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조연의 자리를 맡기는 것은 더 큰 주연의 자리로 높이시기 위한 주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모든 인생의 곤고함을 참아낼 수 있는, 그래서 주인공의 자리로 올라 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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