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요한복음 10:7~10)

갈렙처럼 2025. 2. 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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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

요한복음 10장 7~10절

 

서론

<월스트리트 저널>지가 선정한 미국의 밀레니엄 거부(巨富) 중에 여성으로는 `월가의 마녀'라는 헤티 그린이라는 노파가 유일하게 들어 있습니다. 카네기나 록펠러가 들어있는 거부 명단에 끼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노랭이 중에 상 노랭입니다. 월가를 누비고 다니는 그녀의 스카프는 좀이 먹어 구멍이 송송하고 검은 가방은 흰 테를 두른 것처럼 닳았으며 주판을 놓을 때 쓰는 안경은 한쪽이 실끈, 식사는 오토밀입니다. 데우면 땔감 값이 들기 때문이랍니다. 세탁도 가장 안쪽의 속옷만 빨아 입습니다. 닳을까봐.

 

그녀가 얼마나 노랭인가 하면, 14세날 난 아들 네드가 교통사고로 무릎이 탈골했는데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집에서 치료하다가 뒤늦게 찾아간 곳이 무료진료소. 손쓰기에 늦었다 하여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돈이 아까워서 허술한 하숙방이나 싸구려 빈민아파트에서 노후를 살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81세에 죽었는데 침대 밑에는 거액의 부동산 채권 외에도 녹슨 깡통 속에 1억 달러의 거액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1억 달러의 현찰이 있는 사람이 짜장면 한 그릇 마음껏 사먹지 못하다 갔으니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외모가 각각 다른 것처럼 살아가는 방법도 다릅니다. 같은 돈 만원을 갖고서도 풍성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항상 불평하며 꾀죄죄한 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풍성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지난 시간, 인간 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은 왜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기계이며 하나님의 장난감인가?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해서 존재하는 들러리인가?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자신만을 아는 이기주의자도, 독재자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회초리 들고 인간들에게 "이거 해! 이거 하지 않으면 혼내 줄꺼야!" 하는 감시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지만 인생으로 최고의 대접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생이 즐겁게 사는 것이요 풍성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연물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모두들 행복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것,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심정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이 풍성하게 부유하게 사는 것을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도 인생들의 풍성한 삶을 원하십니다. 고생하며 가난하며 질고로 고통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역시도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람이 행복하게 풍성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티 그린이라는 여자가 돈독에 올라버린 것처럼, 그래서 그때부터 풍성한 삶을 일어버린 것처럼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죄는 왜곡된 하나님상(像)을 만들어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동산 모든 실과는 먹어라"고 했습니다. 풍성한 하나님입니다. 그 중에 단 하나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100중 1%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생으로 하여금 가장 아름다운 배필을 짝하게 하시고 동산의 모든 과실을 마음껏 누리며 행복하게 풍성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마음이시며 소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풍성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이 들어와서 아담을 유혹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하시더냐"(창3:1).

 

인색한 하나님, 부정한 하나님을 내보이고 있습니다. 뭔가 규제에 묶이고 간섭하시는 하나님! 그것이 바로 사단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허상입니다.

사단의 질문에 하와가 자기의 생각을 말합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절)

만지지도 말라? 이것이 바로 왜곡된 하나님상입니다.

하나님의 금기. 하나님을 인색하신 분으로, 금기의 하나님으로, 무정한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는 이 잘못된 생각은 결국 인생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했습니다. 모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죄는 멀어지게 합니다. 그때부터 인생의 풍성함은 시들해지고 사람은 빈곤해졌습니다.

 

사람은 왜 풍성하지 못합니까? 사람은 왜 `세상이 고생이다' 하고 사는 게 지겹고 어떤 이들에게는 지긋지긋하다고 합니까?

 

1.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 금기하시는 하나님.

* 무조건 절제하시는 하나님.

* 간섭하시는 하나님.

주일성수, 십일조, 주초금지. 바른 행동… 등을 공연한 규제로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결코 인간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을 공상하게 하며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며 돈에 대한 바른 쓰임새를 갖도록 해줍니다.

 

그럼에도 이런 종교적 행위들이 귀찮게 느껴지는 것은 인생의 풍성함을 원하지 않는 사단이 우리에게 준 잘못된 생각이요 인생관이요 가치관입니다.

2.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인생이 행복하게 사는 꼴을 못 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풍성하게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사단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 되는 꼴을 못 봅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꾀죄하게 사는 것을 원합니다. 인색하고 사납고 남에 대해 심술궂고 그래서 자기도 힘들고 남들도 피곤하게 만들고... 이것이 사단이 원하는 바입니다. 사단은 이런 인간을 만들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하는 게 세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으로 하여금 세상의 거짓 행복에 취하게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다 쏟아 붓고 결국에는 허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이게 진정한 행복과 풍성함을 빼앗아 갑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잘 생긴 노예를 골라 3일 동안 왕으로 삼고하고 싶은 일을 다 하도록 해줍니다. 밑바닥 생활하다 왕이 된 노예들은 인간으로 구가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추구합니다. 성적 쾌락, 좋은 음식, 권력 남용… 3일 후에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합니다. 이것이 마귀가 주는 인생입니다.

 

3. 정신적인 것들을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있습니다. 육체가 영양을 공급하지 못하면 피곤하고 힘들고 의욕이 없어집니다. 기운을 쓸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공급받지 못하면 한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가치관이 잘못되고, 판단력과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참 행복을 모릅니다. 버버리 하나에 150만원씩 구입하는 일부 사람들의 행태는 바로 물질적인 풍요 속에 정신이 빈곤한 현대인의 사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국은 가장 풍요로운 나라입니다. 그러나 <행복해지는 법>이라는 책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나라도 미국입니다. 그것은 물질이 인간을 풍요롭게 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4.  잘못된 종교도 인간의 풍성을 저해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풍성한 삶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풍성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셨고 여호와 종교를 주셨습니다. 그 종교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종교조차도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613가지의 항목으로 인간을 옥조였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날개가 되어야 하고 사람들의 자유스런 삶을 위해 도움이 되어야 하는 데 오히려 종교는 인간을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종교들입니다.

 

종교인들의 신비주의, 독선, 비판, 지나치게 꼬장꼬장한 성격…. 이것은 자신의 삶을 빈약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자원하는 즐거움과 웃음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병든 믿음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신앙은 즐거워야 합니다.

신앙은 풍성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코 금욕이나 지나친 자기 억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을 지나치게 얽어매는 것도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결론

프랑스의 사상가 스탕달은 죽음 직전 "열심히 살았다. 마음껏 썼다. 열렬히 사랑했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항상 행복하게, 삶을 근사하게, 매력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풍성을 주시려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바른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종교의 티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분은 무소유였지만 풍성한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풍성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적인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너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의 눈들을 크게 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나 종교를 출입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 속으로 날마다 출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꼴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꼴은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으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고 자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풍성함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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