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그 사람 좋은 사람(사무엘하 18:24~28)

갈렙처럼 2025. 2. 4.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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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좋은 사람

사무엘하 18:24~28

 

서론

서울대학교의 김형국 교수는 절친하게 지내던 화가(장욱진)에 대한 책 <그 사람 장욱진>에서 장욱진을 "그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쓰면서 <그 사람 장욱진>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화가에 대한 여러 소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학벌이 좋다거나, 외국 유학을 다녀온 실력 있는 화가… 등등이 있겠지만 ‘그 사람 좋은 사람’, 이 하나면 끝납니다.

 

제가 여러분을 소개할 때 어떤 소개가 좋겠어요? 그 사람 똑똑해, 돈 많아, 일류대학 나왔어, 믿음이 좋아… 이런 소개도 좋지만 가장 간단하면서도 좋은 소개는 “그 사람 좋은 사람”, 참 기분 좋은 소개라고 생각됩니다.

 

누가 나를 소개할 때 “그 사람 똑똑하고 실력도 있고 믿음도 좋은 데 그 사람 별로야!” 이렇게 소개되었다면 삶을 다시 돌아보며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 이웃들에게 잘못 보이며 살았구나” 이런 자성(自省)과 달려가던 길을 유턴(U턴)하고 제대로 가야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교회가 부흥하고 건물이 멋있고 교인 수가 많이 모여들어도 이웃들에게 "그 교회 별로야!“ 이런 평판을 들으면 무슨 영향력이 있겠어요? “아, 그 교회 좋은 교회야!” “그 교회 다니는 사람들 참 좋은 사람들이야!” 우리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어야 주님을 존귀하게 높여드리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변에 외상값들 빨리 갚아요.

1. 아히마아스는 좋은 사람입니다.

다윗 왕 시대에 제사장 가문이 둘 있었습니다. 사독과 아비아달. 아히마아스는 사독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믿음이 좋고 유능하고 의리가 있습니다.

그런 좋은 성품들은 평소에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모두들 충신 같은데 인생의 위기는 주변 사람들의 됨됨이를 드러내 줍니다.

 

다윗이 왕에 올랐을 때는 모두들 충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민심이 떠나가니 주변에 있던 신하들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아히도벨은 1등 책사입니다. 그가 압살롬 편에 붙어버렸습니다. 시므이 같은 경우는 구(舊) 정권 인사인데 다윗 정권 하에서도 좋은 지위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시므이 역시 다윗이 피신 길에 오르자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되었을 때 다윗이 얼마나 가슴 졸이며 그 소식을 기다리겠어요? 왕의 군대가 당연히 승리해야겠지만 압살롬이 죽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어떻게 되나, 기다리고 있는데 망을 보고 있던 정탐꾼이 소리지릅니다.

 

“어떤 사람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아,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앞선 사람을 보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 달음질과 같습니다!”

그때 27절 다윗이 대뜸 뭐라고 합니까? “저는 좋은 사람이니”

 

어떤 사람? 좋은 사람! “그 사람 좋은 사람”

좋은 사람-그 소개 속에는 그 사람 됨됨이가 들어있습니다. 민심이라는 것이 조석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등졌습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는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 자기 이익을 좇아 왔다 갔다 하지 않고 항상 다윗의 유익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 언제나 다윗에게 좋은 사람, 그것이 아히마아스에 대한 다윗의 평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볼 때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정직하고 이중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본바탕이 좋다는 뜻입니다.

 

김형국 교수가 장욱진씨를 표현할 때 “그 사람 좋은 사람”, 다윗이 아히마아스를 대할 때 “그 사람 좋은 사람”,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면서 “간사함이 없는 사람”, 이런 표현은 결국 생각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생각은 행동의 핸들입니다.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나옵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면 좋은 행동이 나오고 나쁜 생각을 갖고 있으면 나쁜 행동이 나옵니다. 내 앞에서는 온갖 좋은 말하고 좋은 행동해도 생각이 함께 하지 않는 행동은 내가 없을 때는 그 사람 또 다른 말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그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 그 사람, 별로!

 

다윗에게 있어서 아히마아스는 “좋은 사람”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뒤에서 비수를 들이대지 않는 사람, 모두들 등 돌리고 다윗을 비방한다 해도 그 비방을 막아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아히마아스가 좋은 사람이라는 선 듯 말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늘빛교회가 좋은 사람들로 가득 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사에게는 사람들이 많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좋은 사람들로 많아져야 합니다. 목사가 “그 장로님, 좋은 사람이야!” “그 권사님 좋은 사람이야!” “그 집사님 좋은 사람이야!” 이렇게 항상 믿고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목회가 편하고 힘이 있고 역사가 나타나는 목회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앞에서는 웃고있지만 목사가 조금만 허점이 보였을 때 아히도벨처럼 뒤통수치는 사람은 똑똑은 해도 좋은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끼리도 좋은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좋은 사람은 좋은 소식을 가져옵니다.

본문은 다윗이 가장 어려움을 당할 때에 관계된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에 어려움이 이번만은 아닙니다. 수없이 생명의 위경을 당한 사람입니다.

 

사울에게서 20여 년 가까이 추격 당하는 생애를 보냈습니다.

시글락에서는 마을이 불타고 두 아내와 자식들과 다른 모든 백성들이 포로로 붙잡혀 가게되고 따르던 군사들에게 돌로 맞아 죽임을 당하는 위기도 있었습니다.

 

이번은 또 다른 위기입니다. 아들에게서 반역 당한 것입니다. 아들 압살롬! 죽일 놈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 대한 마음은 다릅니다. 끝까지 압살롬의 생명을 염려하는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백제의 견훤 왕 아들 신검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반역을 일으키고 이복동생을 죽입니다. 견훤이 분해서 잠을 못 이룹니다. 그리고 결국 후백제를 망하게 하는 데 앞장을 섭니다. 부모와 자식들끼리 철천지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라요. 압살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대단합니다. 전쟁터로 나가는 요압과 그 장수들에게 신신부탁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오! 제발 죽이지는 마시오!”

총사령관 요압은 왕의 부탁을 묵살하고 압살롬을 죽여버립니다. 자, 압살롬을 죽이기는 했지만 누가 이 소식을 전할까? 요압은 구스 사람을 보냅니다.

 

구스 사람은 요압이 소유하고 있던 이디오피아 출신 흑인 노예를 말합니다. 흑인 노예를 보낸다는 것은 압살롬의 죽임을 은연중에 알리려는 요압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굳이 아히마아스가 가겠다고 자원합니다.

 

다윗의 파수꾼이 보니 두 사람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구스 사람과 아히마아스입니다. 구스 사람이 달려올 때 다윗은 마음이 덜컥했습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를 발견하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는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의 특징은 좋은 소식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27절,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어떤 소식? 좋은 소식!

 

아히마아스가 도착했습니다.

“왕이여, 승리했습니다”

“내 아들은?”

“요압이 나를 보낼 때에 큰 소동이 일어났고 그 이후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전쟁은 승리했지만 큰 소동이 일어났다? 압살롬은 죽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전쟁의 승리를 알리려 달려올 때, 압살롬의 안부에 대해 모른다 할 때는, 왕이여, 왕자가 죽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의미입니다. 그는 어떻든 왕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는 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신약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나옵니다. 가브리엘 천사.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아내의 잉태 소식을 전할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 보냄을 받았느니라”(누가복음 1:19)

여섯 달 후에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누가복음 1:30) 성령의 잉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약 10여 개 월 후에는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나타나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라고 했습니다.

 

가브리엘, 좋은 천사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좋은 소식 전해주었습니다. 이런 천사들의 내방은 받으면 받을수록, 회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니까. 우리도 가브리엘 천사와 같은 긍정적이고 평안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좋은 사람들을 주변에 꽊 채워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믿음이 좋은 믿음이 될 수 있어요.

 

요즈음은 정보 시대입니다. 좋은 물건들이 정보를 통해 나쁜 것으로 포장되고 나쁜 물건들이 잘못된 정보로 좋은 것으로 둔갑합니다. 어떤 정보를 제공받느냐에 따라 나의 인간성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고 그들을 통해서 늘 좋은 소식, 건강한 정보를 제공받는 사람을 뜻합니다.

3. 좋은 소식을 전하는 좋은 사람이 되십시오.

좋은 사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거듭남의 체험을 강하게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말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부패했고 인간의 심중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박군의 심정”이라는 전도지를 본 적이 있나요? 박군이라는 사람의 마음 속에 온갖 더러운 짐승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뱀, 여우, 고양이, 생쥐, 거머리…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추악한 성품을 말합니다.

동물로 따지자면 인간은 참 고약하고 나쁜 짐승입니다. 이간질하고 음모를 꾸미고 살인하고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참 고약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남을 받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받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기질들은 버리고 새로운 하늘의 성품으로, 천사의 성품으로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성품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되는 소식,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소식,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소식-이런 것보다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정죄하는데, 피를 흘리는 데 빠른 발들은 신분상으로는 거듭났는지는 몰라도 성품의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세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앙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다 성품이에요.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좋은 성품을 말하고 좋은 인간성을 말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 좋은 성품의 사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고 성격순!

 

우리는 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늘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으로 우리의 생각이 좋은 생각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날마다 삶을 돌아보며 매일매일 반성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늘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항상 긍정적인 사람, 좋은 이야기를 물고 오는 사람, 좋은 이야기를 물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한 병실에 두 명의 환자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창가 가까운데 있는 사람이 중환자인데 창문 밖을 내려다보면서 항상 좋은 이야기를 합니다.

“와, 분수가 멋있다!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들고 사람들이 놀고 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출입구 쪽 환자는 그 자리가 참 부러웠습니다. 그 사람은 척추 마비환자였기에 창 밖을 내다볼 수 없었지만 저 환자가 빨리 죽으면 내가 차지할 수 있겠거니, 하고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환자가 죽었습니다. 침대를 옮기고 가족들에게 창 밖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곳은 시커먼 벽만이 서 있었습니다. 죽은 환자는 자기보다 더 불행한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좋은 말만 전하다 간 것입니다. 그 사람 좋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가정이 철저히 파손 당했습니다. 망신스러운 일입니다. 그의 충신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밧세바와의 불미스러운 일은 그의 인격에 치명타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는 그의 편에 섰습니다.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런 배려가 결국은 다윗으로 하여금 영웅이 되게 만들었고 성군이 되게 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그의 주변이 위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주변이 좋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들이 만들어 냅니다. 좋은 목사가 좋은 교인들을 만들어 내고 좋은 교인들이 좋은 목사를 만들어 갑니다.

 

결론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특히 여성인 경우, 똑똑한 여자들에게는 “참 아름답다” 이렇게 해야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여성에게는 “참 똑똑한 여자다!” 이래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름답거나 똑똑하거나 그것도 좋지만 “그 사람 좋은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로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나 좋은 소식, 좋은 이야기, 긍정적이고 밝은 이야기… 교회에 유익되는 이야기, 목사의 목회를 도와주는 좋은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좋은 사람들, 아히마아스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찰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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