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이전과는 다르게 걷지만(창세기 32:24~32)

갈렙처럼 2025. 2. 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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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는 다르게 걷지만

창세기 32장 24~32절

 

서론

본문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던 야곱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금의환향입니다. 20년 만에 대부자가 된 것입니다. 마을사람들이 어귀까지 나와 대환영을 하고 요즘이었으면 현수막도 걸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을 출신 형님이 <블랙야크> 강아무개 회장님인데 고향나들이를 하면 고향마을은 물론 조금 과장해서 제주도 전체가 떠뜰썩합니다.

 

야곱이 지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 대성공을 하고 귀향합니다. 얼마나 부자인가, 형님에게 드릴 선물이 14절, 암염소가 2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절,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모두 합치면 540마리 이상입니다. 얼마나 통 큰 선물입니까? 선물이 이 정도이니 그의 가축 소유물은, 아마 2,3만 마리는 되었을 것입니다. 목축사회에서 재산의 기준은 우물과 가축입니다. 특히 가축의 수가 많으면 그게 재벌입니다.

 

정주영씨는 소떼 5백 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했습니다. 대단한 배짱입니다. 이 분이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랬다면 남북문제가 지금처럼 지리멸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금의환향하는 야곱이 이상합니다.

31절,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절뚝거렸다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발꿈치를 잡았다’, ‘교활한 자’라는 것입니다. 발꿈치를 잡았다는, ‘남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자“입니다. 남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면 내 다리는 그보다 더 튼튼하고 무쇠덩이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그리 살았습니다. 그의 다리에 걸려 모두 넘어졌습니다. 형님 에서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고, 외삼촌 라반을 걸어 넘어뜨렸습니다. 성경에는 일일이 나오지 않지만 대성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다리를 걸었고 쓰러뜨렸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의 길, 목적달성의 길을 달려 온 것입니다. 결국 그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왜 홀로 남았습니까? 야곱은 지금도 뇌물로 형과의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형과의 문제는 재물에 있지 않았습니다. 벌써 형에게 진솔한 사과를 하고 좋은 관계를 가졌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성 있는 사과로 형의 노여움을 풀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돈을 앞세웁니다. 뇌물을 먹여 과거의 잘못을 피해가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부인과 자식들을 먼저 보냅니다. 제수씨와 조카들을 보면 형의 분노가 풀릴까요? 이런 식으로 묵은 앙금을 해결하려고 저는 홀로 남은 것입니다. 아직도 세속적인 문제해결법입니다.

밧단아람에서는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는 믿음의 족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런 믿음으로 인생관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밧단아람의 생애를 정리하시려 찾아오신 것입니다. 에서와 400명의 장정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보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만 연연하여 불안해 하며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세속적인 삶을 청산하고 가나안에서의 성화되는 삶을 시작하게 하시려 싸움을 걸어옵니다. 밤중에 시커먼 사람이 다짜고짜로 덤비자 형님이 보낸 자객으로 알았을 거예요. 그러니 싸움꾼 야곱도 본능적으로 대적합니다. 야곱은 상대방의 삽바를 잡은 순간 보통 센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여기에서 밀리면 패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움이 치열할 수 밖에 없습니다.

 

24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씨름은 다리를 거는 시합입니다. 야곱의 다리가 얼마나 단단하던지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

 

25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천사가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야곱이 얼마나 지독합니까? 여기서 야곱은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보내셨겠어요? 당연히 죽이려 보낸 것입니다. 20년 전에 벧엘에서 했던 3대서원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없이 살아온 세월에 대해 책임을 묻고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씨움은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울고불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천사와 겨루면서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호12:4). 그건 회개의 눈물입니다. 한번만 기회를 더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25절,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어긋났다는 것은 관절이 박살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악착같이 씨름하던 사람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26절,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다” 다리를 걸고 놓지 않겠다는 거지요

27절, 천사: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야곱이니이다

 

사실 야곱은 에서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에서는 외모적으로 훤칠하고 매력적인 남자입니다. 그는 사냥꾼이었기에 수입도 좋았습니다. 남성적인 그의 삶은 여인들에게도 매력적입니다. 이에 비해 야곱은 ‘조용’한 사람, 자칫하면 쪼잔한 남자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형에게서 장자권과 상속권을 샀을 때는 에서의 이런 매력적인 생애조차도 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거칠게 살았고 짐승 사냥꾼이 아니라 요즘 말로 한다면 기업사냥꾼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자 형과의 경쟁에서 형을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 얻어터져 다리 하나를 절뚝이는 상황에서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20년이 지났지만 형은 역시 형이었습니다.

 

33장 1절,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어떤 야곱? 절뚝이는 야곱… 우습고 초라하게 된 야곱입니다! 이에 비해 에서는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에서는 역시 대장부였습니다. 에서가 왜 장정들을 대동합니까? 20년 전 수모에 대해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때는 형과 싸워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 순간에 다리를 다쳐 싸울 수 없고, 도망이라도 쳐야 하는데… 야곱은 도망치기 선수 아닙니까? 도망도 다리가 건강해야 가능하지 절름대는데 도망을 못 갑니다. 딱 걸렸고! 쫄딱 망하게 된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평생 못할 짓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교활한 성향을 드러냅니다.

 

22절,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33장 2절에는,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부인들을 차등화하고 자식들을 편애합니다. 여종의 자식들을 앞세우고사랑하는 부인의 소생 요셉은 후방에 세웁니다. 위기순간에도 아버지로서 어찌 이리도 교활한 자가 됩니까? 아내와 자식들이 그 어설픈 작전을 모릅니까? 꼴이 참 우습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28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입니다.

전의 이름 야곱은, 교활한 자였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겨루어 이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은 하나님께서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주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을 살려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씨름에서 져주시는 척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뭡니까?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니 이제는 사람을 상대하는 싸움은 그만두고 나와 상대하라! 내 은혜와 상대하고 내 능력과 상대하면서 이스라엘 열두 명의 조상으로 빛나는 삶을 살라'

 

바로 그런 명령입니다. 야곱이 이걸 알았습니다. 지난 밤, 얍복 강에 홀로 남아 하나님에게 엄청 은혜를 받았고 은혜를 빚졌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일부러 져주셨다는 것은 에서를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을 이긴 너를 에서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인들 앞에서 자식들 앞에서 저만 살려고 미꾸라지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이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것을 알게 되니 너무 기쁩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나니 사방이 모두 하나님의 기운과 돌보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땅 이름을,

 

30절, 브니엘이라 합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에서와 4백명의 장정들의 얼굴만 보였습니다. 원수를 갚으려는 에서 형님의 무서운 얼굴만 보였습니다. 위기 때마다 자신들을 팽개치고 저만 살려는 남편을 향한 아내들의 불신의 모습, 철저히 편애하는 아버지를 향한 자식들의 원망의 눈길! 이런 눈길에 때로는 화가 나고 창피도 하고 지금은 두렵지만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고 하나님에게서 이기는 자, '이스라엘'로 개명을 받고나니 세상천지가 새롭게 변했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얼굴로 보였고 사랑으로 보였습니다. 인간 역사에 하나님이 절대주권의 거미줄이 보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되고 내 눈이 하나님의 눈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에서 형님도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로 보이고 장정들 400명도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로 보이고 부인들도 자식들도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니 모두가 은혜요 지난 세월이 은혜의 세월이요 고마움입니다. 온갖 차별에도 떠나지 않고 살아준 네 명의 부인들이 은혜요 아버지의 그릇된 차별대우에도 아무 소리하지 않고 견디어준 열두 아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에서 형에게서도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를 보았습니다. 내가 은혜가 되니 모두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은혜를 입에 달고 사는 은혜주의자가 됩니다. 33장입니다.

 

5절, 은혜로… 8절, 은혜를… 10절, 은혜를… 11절, 은혜를… 15절, 은혜를… 입에 은혜가 달라붙어있습니다.

은혜주의자가 되니, 31절, 절었더라….

비록 하나님의 손에 얻어터져 육신은 망가졌지만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입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걷지만”

대찬 두발로 이전에는 멋지게 걸었고 멋지게 살았습니다. 대찬 두 발로 멋지게 사랑했고 멋지게 이겼습니다. 지금은 다리를 절고 있습니다. 우스운 꼴이 되었습니다. 에서가 보면 얼마나 기가 찹니까? 대찬 동생을 상상하고 400명까지 동원했는데 동생은 뜻밖에도 절뚝이는 장애인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고 불쌍한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약함을 통해 임한 것입니다. 네 명의 부인들도 자식들도 하루아침에 절뚝이는 아버지에 대한 놀라움과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31절, 해가 돋았습니다. 절뚝거리며 이전과는 다르게 걷고 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양새가 영 이상하게 보였지만 그는 원한을 풀지 않는 형 에서와 400명 군대를 향해 걸어갑니다. 그건 전선이 아니라 은혜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는 길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이기는 생애였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24절, '나 홀로' 남는 외롭고도 모든 것을 잃게되는 위기에 처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이기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이기소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의 인간방법을 이기소소!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비은혜를 이기소서. 하나님이여 이제는 제발 나를 나를 이겨주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하소서~"

 

야곱의 마음에 평안이 들어왔고 은혜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비록 장애인으로 살아갈 앞날이 막막했지만 야곱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얼굴이었고 빛이었고 빛의 길로 걸어갑니다. 에서 형을 대면하러 가는 그 순간도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은혜를 받으니 내 상황과 형편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결론

오늘의 설교 포인트는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 모양새가 참 우습게 되었습니다. 3.1운동시절에 보여주었던 기독교의 대찬 모습! 6.25의 전쟁과 사상전의 위기에서도 대한민국을 지켜냈던 한국교회의 대찬모습, 유신헌법 하에서도 독재와 싸워냈던 대찬 한국교회가 지금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길을 잃은 것 같고 헛걸음질을 하며 절룩이며 걸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국민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안 그런가요? 우리가 꾸었던 꿈들도 동강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걸음이 우습 습니다. 이거 코로나 때문에 우습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실력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 이리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생활에서 하나님을 이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내 신념과 경험이 말씀을 이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의 3대 째 왕, 아사 왕은 적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 14:11)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게 우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게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기려 하지 말고 한국교회가 하나님에게 져야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이기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져야 합니다. 교단 정치들 그만 하고 명예욕심 얻으러 기를 쓰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이기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에게 내가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앞에 박박 엎드려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이기소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어가 되고 우리가 그 분의 동사(動詞)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록, ‘이전과는 다르게 걷지만’, 걷는 모습이 뒤뚱거리고 절룩이고 실패자로 우습게 보이지만, 이런 조롱에서도 교만했던 자신들을 성찰하며 예레미야처럼 입술을 티끌에 대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비록 절름거리는 패잔병의 인생이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기도록 만들어 드린다면 이런 걸음걸이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기는 자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희망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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