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주제
요한복음 20장 31절
서론
성경은 매우 방대한 책입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성경을 1회 이상 독파(讀破)하신 분들은 교인 중에 50%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재미있는 삼국지도 한번 읽지 못한 분들이 많은데 재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성경을 일독(一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성경은 1600여 년 동안 40여 명에 의하여 장기적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세계에 1600여 년이 걸린 집필 기간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 사실 성경은 한 권이 아닙니다. 66권입니다(성경의 권수가 가톨릭의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지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개인적으로 기록된 단권(單券) 66권들이 묶여져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여러 권이면서 단권
성경(聖經), 혹은 성서(聖書. Bible)라는 이름은 원래 ‘책들’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블리아’(biblia)에서 온 것입니다. 구약의 성경은 AD(기원 후)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어거스틴의 시사를 받으면서 66권으로 하나의 성경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로마 가톨릭이 여러 권의 외경(外經)을 무리하게 정경으로 억지 편입시키기까지에는 세계교회는 모두가 성경은 66권이자 하나의 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책이면서도 여러 권의 책이기에 “바이블”은 “책들”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600년 동안 40여 명의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은 당연히 금언집(金言集)이나 파스칼의 <팡세>처럼 서로 연결이 없는 명상 류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 권의 내용들은 서로 비슷한 것이기는 하나 완벽하게 일맥상통하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1600여 년 동안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방대한 책에서 앞뒤에 전혀 모순이나, 내용의 흐름에 일치를 기대한 것은 무리한 요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66권이 놀랍게도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구조나 흐름에 완벽한 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앞뒤에 전혀 모순(矛盾)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모순이 있었다면 지난 2천 년 동안 원수들의 공격 앞에서 보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것은 성경으로 인정(?)되고 어떤 것은 잡류로 처리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다수의, 다양한 출신성분을 갖고 있는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66권이면서도 하나의 책으로 완벽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매우 불가사의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라는 한 원저자(原著者)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성경의 주제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주제
성경은 하나님이 원저자이십니다. 성경은 사람이 쓰기는 했지만 그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사실 성령의 작품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의 주도하에 성경은 다수의 사람들이 집필했습니다.
다수의 성경 저자들은 성령의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개성을 갖고 자기 나름대로의 주제를 갖고 집필하지만 서로가 모순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은 1600년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계신 분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실 분입니다. 그 분 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분은 자라지도 않고 성숙되지도 않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자람과 성숙이 있는 분입니다. 그것은 영원불변합니다. 그런 분이 주도 하에, 통제 하에 쓰인 성경이기에 성경은 40명이, 1600년의 집필기간이 소요되었지만 66권이 서로 차이가 나거나 주장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성경이 다양한 저자의 저작이면서도 일치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주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주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유일한 주제(主題)입니다.
성경은 장편과 단편의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원고지 5매 이하의 짧은 것도 있고, 모세오경이나 시편, 이사야처럼 방대한 것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모든 성경의 주제는 오직 한 사람과 그분께서 하실 일(구약), 하신 일(신약)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대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들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를 위한 구속 사업에 귀결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 사실을 자증(自證)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이상의 구절에서 보건대, 성경의 저작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왜 상고해야 한다고 합니까?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며 영이신 하나님처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으로 나가는 길이 되고 영생의 길을 알려주는 도표가 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 속에 보물을 숨겨놓았습니다. 너무 광대하기에 무작정 찾아 나서기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에 사막의 지도가 있다면, 그 길은 매우 쉽습니다.
성경에는 바로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그 영생의 길을 표시해 주는 모형과 상징이 구약과 신약에 숨겨져 있고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모형과 비유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영생의 인도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고 신약에서는 그 분께서 오셔서 사셨던 생애와 인격, 교훈을 통해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영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신약시대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구원받기에 훨씬 더 유리하다고 합니다(고후 6:2).
성경은 우주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기원, 인류의 시작, 그리고 인류의 발전… 등등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성경의 저작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주에 대한 과학적 진리들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 과학적 진리들을 찾아보고 지구의 기원이나 인류의 역사에 참고가 되는 사실들을 찾아보는 ‘교과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인류사도 아닙니다. 성경은 역사성을 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의 국사(國史)는 더더욱 아닙니다. 구약의 90% 이상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구약성경이 이스라엘의 국사에 관한 책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의 역사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구속의 책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며, 구원에 필요한 사항들만 영감으로 선별하여 기록된 것이다. 세상 역사의 기록에 미흡 되는 부분이 나왔다고 해서 성경을 하나의 ‘전설’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구세주이신 ‘한 인물’(신약)과 그 구세주를 태동시킨 ‘한 민족’(구약)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약성경 안에는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어떻게 일으키셨고, 그들에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방식으로 계시하고 있는가 하는 내용들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구약도 신약도 예수에 관한 책
성경의 독자들 중에는, 구약성경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요, 율법에 관한 내용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율법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록해 놓은 책이 구약성경이고,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 지켰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필요도 없고, 신약성경이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들이 계명을 어겨 구원받지 못했으므로 할 수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구약과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오직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구원의 방법을 말씀해 주신 적이 없으시며, 율법(계명-행위라고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을 훌륭히 지키는 자들에게 천국입성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무기력과 인간 본성의 내면적 부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죄인된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의로워지려고 했으니 이것이 결정적인 그들의 실수였으며, 예수님을 배격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바라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구약성경 도처에 여러 가지 모형(模型)과 상징(象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숨겨놓았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3:15), ‘가죽옷’(3:21), ‘수양’(22:13), 출애굽기의 ‘유월절의 어린양’(12장), 레위기의 ‘대제사장’(8장 이하), ‘염소’, 민수기의 ‘반석과 샘물’(20:11), 신명기의 ‘도피성’(19장)-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형들입니다.
구약성도의 수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成肉身-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어서 육신이 되심)의 사실이 이해되기 어렵기에 하나님은 이런 상징과 실물적 모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복음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고, 신약에 나타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신약에 들어서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나타납니다. 이것을 가리켜 ‘점진적 계시’라고 합니다. 학교의 교육과정(커리큘럼)이 단계가 있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그 시대에 맞게 점진적인 발전을 보여 왔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들로 계속 이루어졌고, 신약은 그 예언의 성취로 짜여져 있습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어느 한 쪽에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과 신약은 본질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고, 다만 그 시대에 적합한 계시의 방법만이 다를 뿐입니다.
바빙크(H. Bavinck)박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항상 더 풍부하게 더 충만하게 나타내신다. 구약시대에는 종의 생활과 같았던 것이 이제는 자유요, 비유였던 것이 이제는 참이요, 그림자였던 것이 이제는 빛이요, 한 민족에게만 은혜가 되었던 것이 이제는 모든 민족들에게 그리하고, 두려움의 관계가 이제는 사랑의 관계요, 약속되었던 메시아가 이제는 오셨다.”
두 성경의 관계가 이러하건대, 구약을 잘 알아야 신약을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신약을 잘 알아야 구약의 바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짝이 되어 서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완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성도의 영적 성장의 두 유방이다. 이 두 유방 중에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원만한 성장을 할 수 없다.”(루터)
성경을 읽을 때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구약만을 좋아합니다. 구약이 깊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구약이 무슨 성경이냐?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홀대합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66권 모두가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저작물입니다. 모든 성경에는 예수에게로 나가게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기만 하면 어느 성경에서도 능력을 얻을 수 있고 그리스도와 깊은 교통이 있게 될 것입니다.
결론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투르먼이 은퇴하고 고향 미주리에서 살고 있는 데 아이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대통령님은 제 나이였을 때 인기 있고 반장이었겠지요?”
“아니야! 나는 눈이 나빴고 재주도 없고 운동도 못했어.”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어요?”
“성경말씀을 믿었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 말이야. 그래서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어. 하나님이 내 등뒤에 계시다는 것을 믿고 말이야”
이제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기로 마음에 다짐을 하십시오! 그럴 때에 성경은 매일 여러분을 영감시키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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