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은 영감의 책이다!
베드로전서 1장 21절
성경은 사람의 손에 의해 집필된 책입니다. 성경은 각 권이 인간 저자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책’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 성경의 원저자(原著者)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창세기를 비롯한 네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누가 그 책을 쓰게 했는가? 집필의 동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출 34:27)
성경의 저자 중의 한 사람인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通用)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이사야 8:1)
다른 성경 저자도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렘 25:13)
이상은 구약성경의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자신은 밖으로 드러난 제2의 저자이고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제1의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상은 신약성경에 들어와서도 동일합니다. 유대교 학자 출신은 바울은 양자(養子) 격에 해당하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경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전 1:21)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예언’(豫言)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성경 저자의 증언입니다. ‘감동하심을 입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이 용어를 더 상세히 이해하려면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물론 이런 창세기적 주장은 신학자들에 의한 정통 해석은 아니고 목회자로서의 제 개인의 소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을 재료로 하여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꼭 인간만 흙을 재료로 한 것은 아닙니다. 짐승과 새 역시 흙으로 빚어서 만들어 낸 창조 작품입니다(창 2:19). 여기까지는 동물이나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숨을 쉬며, 움직이며, 활동하는 생물(生物)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인간에게 특별한 동작을 하나 더 첨가시키셨습니다. 그것은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신’(창 2:7) 행위인 것입니다. 이 행위가 있고 나니까 인간은 ‘생령’(生靈)이 되었습니다. 생령은, 영혼을 소지한 생명체를 뜻하는데, 하나님과 같은 영적 존재인데 이를 두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인간의 흙덩어리 속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짐승들에게는 불어 넣어주시지 않았으나, 그들 역시 생명이 있었고, 활동이 있었습니다. 이 ‘생기’는 단순히 호흡이나 생명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을 공급받은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영성(靈性)을 소지하고 있는 영물(靈物)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새나 짐승처럼 육체를 갖고 있는 생물은 생물이로되 하나님의 영을 공급받는 영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지식을 받았고, 이 지혜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것을 성경 저자들의 영감 받은 것에 비교해 봅시다. 영감을 받지 않은 모든 상태의 인간은 다 같은 죄인이며, 오류(誤謬)를 갖고 있는 유오(有誤)한 존재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잘못될 수 있으며, 혼동할 수도 있고,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이런 상태로 성경을 기록한 것이라면 성경 역시 많은 실수와 오점이 섞일 수 있는 불완전한 기록이 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기록이 될 경우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완벽하게 전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은, 여러 종류의 생물 중 특별히 사람이라는 흙덩어리에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당신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던 것처럼, 1600여 년 동안 약 40여명의 사람들을 선정하여 그들에게 특별한 생기를 순간마다 불어넣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 ‘순간’은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그 시간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집필할 적에, 온전한 정신이면서도 하나님의 생기(생명력)에 충만해 있었기에 무오류(無誤謬) 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죄인이나 의인의 상태가 되고,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에까지 도달했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 완벽한 지식 속에서 쓰이게 된 것이 바로 성경이요,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쓰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원(原)저자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성경 저자의 ‘완벽한 신의 경지’는 성경을 집필하는 그 기간 안에만 해당되었고, 그것이 끝났을 때 그들은 다시 일반적인 인간의 경지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감의 성질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자증적(自證的) 선언이며 권위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누가 그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성경 그 자체가 권위를 갖습니다. 성경은 최고의 권위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 성경이다”-이 선언 속에는, 두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감이 사람 개인에게 임했다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의 내용 속에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영감이 개인(저자)에게 어느 정도의 분량으로 임했는가 하는 영감의 성질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서로 다른 주장들이 있습니다.
① 성경의 기계적 영감설
이 견해에 의하면,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썼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어 자신의 의사(意思)와는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성경을 집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저자는 자기가 쓴 성경에 아무런 사상이나 생각을 담지 못하고 단지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대로 받아쓰는 필기자(筆記者), 대필자(代筆者), 로봇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저자의 정신활동은 중지되어 버리고, 사고력은 일시 멈추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마치 어머니의 손에 붙잡혀 글을 쓰고 있는 아이들로 취급됩니다. 아이들은 그 어머니에게 손을 빌려주었을 뿐입니다. 어머니는 자기의 지식과 생각과 심지어는 문체까지도 자신의 것을 아이에게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손을 빌려주었을 뿐이고, 기계적으로 손놀림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계적 영감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계적 영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각 권 속에는 성경 저자 개인의 사고나 생각은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계적 영감설은 성경의 참 뜻을 오해시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두 권의 저자인 누가는 의사 출신입니다. 그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기록의 요령에 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1, 2).
이 말씀 속에서, 누가는 다른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만나고 사실 그대로 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누가 자신도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3절)라고 함으로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기록함에 있어서 나름대로 수집하고, 조사하고, 연구하는 등의 심혈을 쏟아 성경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대필자나 로봇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성경의 동력적 영감설
이설은, 기계적 영감설을 반대하고 나선 18, 19세기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이들은, 성경 저자들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반 영감으로 기록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동․식물과는 달리 모두 일반적인 영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들이 짐승보다 지혜나 사랑, 예술 느낌… 등이 뛰어나듯 어떤 영감들이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일반적인 영감에 의해 성경 저자들도 저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감은 예술가들에게 강하게 나타나서 문학작품을 쓸 때에 “영감이 임했다” “시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성경의 동력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과 간섭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종교심으로 성경을 기록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따른다면,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지 못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 경험이나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시상(詩想)이 떠올라 시를 짓는 것처럼 어떤 개인에게 있는 종교심이 발동하여 그 생각과 감정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책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성경은 하나님께 직접 주신 경전이라는 의미보다는 종교서적이 될 것입니다.
동력적 영감론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가치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기의 종교문학성으로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감(交感)을 나누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던 그 순진무구한 상태의 교류이며 교감입니다. 당시는 아직 죄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 의지에 전혀 죄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의 하나님과 같은 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영의 존재, 육신의 존재라는 상이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양자간에는 교제가 가능했습니다. 죄성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하나님의 의사가 100% 순도로 두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천국은 아니었지만 천국적인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의 저자들의 상태가 바로 이런 100% 순도의 생령의 영성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분이 전해주시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면서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되…”(사 8:1, 겔 24:1)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영감이나 종교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기록의 내용을 알려주셨고, 그래서 기록했다는 특별 영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 동력적 영감설이 옳다고 한다면 성경은 오류(誤謬) 투성이가 되고, 종교 작품 중의 하나로 그 가치가 하락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동력적 영감론도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③ 성경의 유기적 영감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와 교단들이 수용하고 있는 학설입니다. 유기적(有機的) 영감설은, 성경 저자로 선택받은 사람들이 기록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기록하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 사상, 문체가 충분히 활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여기 유기적(有機的)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저자들의 성품과 기질, 은사와 재능, 교육과 교양 상태, 이로 인하여 생겨지는 그 사람 특유의 용어, 어법, 문체 등을 모두 활용하시면서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지만 그 사람만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살려주시면서 오류가 없도록 기록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자 벌코프에 의하면, 성경 저자들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시면서도 ‘저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였으며, 저자들을 격려하여 저술케 하였고, 저자들의 문서 활동에 미치는 죄의 영향을 억압하였으며, 또한 저자들을 인도하여 그들의 언어를 선택하고, 그들의 사상을 표현하게 하셨던 것’이다.
아울러 성서의 저자들은 ‘가끔 하나님의 직접적인 전달을 기록하면서도 그들 자신의 역사적 연구의 결과를 써 내려 갔고 또한 그들의 죄와 사죄, 희열과 비애, 위험과 은혜로우신 구원 등의 체험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유기적 영감설이 성경적임은 성경의 내용들을 고찰해 볼 때 더욱 확실합니다. 모세의 글에서는, 애굽의 왕자 생활을 했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궁중법도의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귀족 출신 이사야의 글은 장엄하고 유려하며, 가말리엘의 문하생인 바울은 논리적이고, 베드로는 활동적이며, 의사 출신인 누가의 글에는 의학적 술어가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의 문체는 에스겔과 다르며 바울의 문체는 요한과 다릅니다.
성경은 개인적 특징과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특성을 문학적 창작에서 나타냈기 때문에 성경 각권에는 독특한 개체성(個體性)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성경 저자들이 단순한 기계노릇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입증해 준다고 보겠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유기적 영감설입니다.
영감의 범위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면서, 그러면서도 한 글자 한 획의 오류도 없이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의 책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자들에 의하여 성경의 66권의 그 방대한 분량이 모두 영감 되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곤 합니다. 즉, 영감의 범위가 어느 정도이냐는 논란인 셈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세 가지의 주장이 있습니다.
① 사상(思想) 영감설-언어의 영감이 아니고 사상의 영감이라는 설.
이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성서 영감설을 믿는 체 합니다. 그들은, 성경이 영감된 저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영감의 범위가 전체적인 성경의 사상을 뜻하는 것이지 언어, 단어 하나 하나에 대한 영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어영감(言語靈感)보다 사상영감(思想靈感)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서, 성경의 사상은 성령으로 영감 되었으나, 언어는 단순히 인간 저자의 선택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묘하게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려는 시도입니다. 언어의 영감, 언어의 확실성이 없는 한 사상의 영감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단어들이 불확실할 때 내용 자체도 불확실하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가 아닌가요? 언어 자체가 영감이 안 되었는데 어떻게 사상이 영감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사상은 언어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올(Dr. Orr)박사는 “사상은 반드시 형태를 취하고 언어로서 표현된다. 만일 영감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사상과 함께 언어에도 침투하여 표현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로 하여금 전달될 관념의 산 매개체(媒介體)로써 사용하게끔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② 부분(部分) 영감설-어떤 부분에만 영감 되었다고 하는 설.
성경 66권이 모두 성령의 영감을 입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부분 영감설을 들고 반박하였습니다. 성경은 66권 모두에 영감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 이를테면 교리적 사건, 신약성서, 예수님의 말씀, 산상보훈(마 5~7장)의 범위에만 영감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가서는 연애시가 되기도 하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판(版) 삼국지가 되어 버리고, 룻기는 심청전 속편으로 전락되어 버립니다. 성령의 영감을 떠난다면 앞의 이야기들은 문학작품이나 전기 이상을 뛰어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부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구약의 근친상간에 관한 부도덕한 이야기, 어린 아이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반인륜적인 사건, 짐승과 교합하는 내용… 등이 어떻게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일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내용들이 읽기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영적으로 유익한 것들이 있기에 성령은 기록해 놓도록 한 것입니다.
③ 완전축자영감설-영감은 모든 부분에 관련되었다는 설.
이 주장은, 성경 66권의 모든 부분-사상이나 언어 하나 하나가 글자의 일점일획까지 세밀하게 완벽하게 영감 되었다는 것으로서 ‘완전축자영감설’(完全逐字靈感說)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구약의 모든 성경을 “성서” 혹은 “성서들”이라고 부름으로서 모든 성경의 모든 부분에 영감이 미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자신들의 글이 하나님께로 왔다고 합니다(출 3장, 4장). 예언자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 입에 그의 말씀을 위탁하셨다고(렘1:9) 백성들에게 그 말씀을 말하도록 자신들에게 명하셨다고 합니다(겔3:4, 10,11). 바울은 자신의 말을 영이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고전 2:13).
이런 성경적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성경은 단어나 사상에만 영감된 것도 아니고 성경의 어느 부분에만 특별한 영감을 입은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66권 전권, 모든 부분에 영감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성경만 특별 유대해서도 안 되고 나에게 은혜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66권은 모두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정기적으로 읽으면서 그 때 그때 공급되는 말씀 앞에서 은혜를 받아야 하고 깨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
성경을 매일 읽으며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던 미국의 대통령 아담스는 ‘성경을 금광’으로 보았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은 지식과 덕의 무한한 금광이다.”
무한한 지식과 덕! 유대인들은 세계의 모든 지혜를 석권하고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20% 이상을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대학교에는 노벨상 수상자들보다 머리가 더 뛰어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이 그들에게 영감을 주어 지혜롭게, 위대한 인물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토라 해석가인 코헨은 어려서부터 배운 성경말씀은 머리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피로 흘러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일찍부터 성경을 더 많이 읽어 더 영감이 풍성한 크리스천으로 살아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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