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무엇이라고 작명하겠습니까?(창세기 2:18, 19)

갈렙처럼 2025. 2. 10.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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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라고 작명하겠습니까?

창세기 2장 18, 19절

 

서론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구두 판매원이 어느 아프리카 국가의 판매시장을 알아보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 도착하니 토인들이 모두 맨발입니다. 그는 본사에 전보를 쳤습니다.

 

<아무도 구두를 신은 사람이 없다! 여기는 구두 사업이 안 된다!>

 

몇 년 후 다른 판매원이 파견되었을 때도 역시 흑인들은 맨발입니다. 그도 전보를 쳤습니다.

 

<일단은 1천켤레 구두를 보내주시오. 여기는 모두 구두를 신을 사람밖에 없습니다!>

 

안경도 마찬가지지요! 실패하는 사람은 아무도 안경을 쓰지 않으니 안경을 팔 수 없다 했고 성공하는 사람은 누구도 안경을 쓰지 않았으니 천지가 안경 구매자로 봅니다.

 

우리는 어떤 시각입니까? 구두 신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런 사람입니까, 천지가 구두를 신을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입니까? 상황은 중립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판단하고 우리가 뭐라고 이름을 짓느냐에 따라 상황은 긍정이 되고 부정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다양한 상황들을 만납니다. 좋은 패가 들어오는 날이 있고 나쁜 패가 손에 쥐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악연과 같은 사람들과 또한 안 좋은 상황을 만납니다. 이런 상황이 우연이라면 내 팔자라 생각하면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장로교인들입니다. 이 모든 상황과 패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오는 것입니다.

 

19절, 온갖 짐승들을 이끄시고…

하나님께서 에덴의 상황과 사람들을 아담에게 인도하십니다. 모든 상황을 만들어 가는 원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내 눈에 보기에 좋지 않으면 이런 일을 끌어 오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내게로 이끌어 오시는가, 가정으로 이끌어 오시는가, 내 자식들에게로 이런 불운한 일들을 이끌어 오시는가…. 제 인생에도 왜 그렇게 하셨냐고 묻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필립 얀시는 이런 소재로 글을 썼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희생 당할 때, 쓰나미로 모든 것들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왜 침묵하시는 것이냐? 그래서 책 한 권을 씁니다.

 

<하나님, 내 마음이 상할 때 어디에 계십니까?>

 

이런 주제는 고통에 있던 분이라면 누구나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남편이 가장 섭섭할 때가 언제던가요? 가장 힘들 때 내 옆에 없었다는 것, 하나님이 가장 필요할 때 하나님 내 옆에 없다고 생각될 때! 얀시는 여기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책을 씁니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하나님은 딱 부러지게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살아가지는 못해도 무엇보다 하나님을 소중하게,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받고 싶은 것도 많고 축복을 바라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나를 돌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고 억울하고 그래서 원망합니다. 그리고 얀시는 또 한 권의 책을 씁니다!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얀시의 책들을 무엇을 뜻합니까? 나에게 이런 나쁜 상황들을 이끌어 오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도대체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가3:33)

우리로 고생하게하심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어려운 상황과 사람을 내 인생에로 이끌어 내십니까? 이왕이면 형통한 상황과 좋은 사람을 만나도록 해주시면 좀 좋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입니다.

 

19절,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하나님께서 아담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나 보시려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시고 사람들을 이끌어 내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많은 새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면 이름까지 작명해 주시면 좀 좋습니까? 하나님께는 간단히 일이지만 아담은 머리에 쥐가 날 버거운 일입니다. 동물들의 특성도 파악하지 못했고 종류 수는 엄청 많습니다. 작업량이 많고 시간도 걸리고 혼자 작업해야 합니다. 아담에게 너무 고된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작명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 보려하십니다. 왜 이름 짓는 일을 맡기셨을까요?

 

-아담의 지혜를 높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원래 우수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머리로는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지혜를 계속 키워나가야 합니다. 수많은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려면 머리를 써야하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짓게 함으로 아담의 지혜가 발달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권세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담이 이름을 지어주면 그들은 아담의 권위에 속합니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지어주었기에 아버지의 권세는 더 커지는 것처럼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담의 권세는 짐승들에게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동물들에 대한 애정이 커지게 함입니다. 이름을 만들어주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관심이요 사랑입니다. 친밀함이 더욱 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담의 관리권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자에 대한 작명도 그렇습니다. 이름이 없이 야, 너, 저기~ 그렇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하시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그에 대한 신뢰요 존경입니다. 노예에게 주인이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알았기에 아담은 이름을 작명합니다.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여자라 부르리라…. 굉장한 작명이요 여인에 대한 엄청난 존경어입니다. ‘여자’란 말은, ‘사람이란 뜻으로 동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인격체요 인격이요 인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고자 했던 것은 ‘돕는 배필’ 파트너입니다. 아담은 자기의 일을 도와줄 동역자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처럼 기동력이 있던지 소처럼 노동력이 있던지 사자처럼 든든한 방어막이 되더니 공작처럼 예쁘던지 여우처럼 간드러지던지… 이런 파트너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생산과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인생의 동반자 개념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았던 때임을 감안하세요!

 

아담의 입장에서 보면 좋은 이름을 지어줄 수가 없습니다. 별로 돕는 배필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좋은 이름, 최고의 이름을 작명했습니다. 그러니 아담은 최고의 파트너가 되었고,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름을 ‘여자’라 작명했기에 이런 좋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지켜보는 하나님의 기쁨도 큽니다. 그래서 창조 6일이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처럼 아담이 좋은 이름으로, 행복한 이름으로, 상대방을 높이는 이름으로 작명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십니다.

 

잭 하일즈 목사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비행기를 다고 돌아가던 중에 4A에 자리가 지정되어 있었고 옆에 앉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남자는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을 걸었지만 시큰둥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고약한 사람, 까다로운 사람을 ‘게’(Crab)라 합니다. 이런 게와 4시간을 함께 간다는 것이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여승무원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했지만 만석이기에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잭 하일즈 목사님은 화가 난 마음을 가라앉히며 인생에서의 교훈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를 지정해 주셨다는 것,

-내 옆에는 언제나 고약한 까다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러기에 골치아픈 사람의 문제는 좌석을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리에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인생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고약하고 까다로운 사람, 가까이 있으면 피곤한 사람-직장 동료일 수도, 부부일 수도 심지어는 같은 교우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때로는 자리를 바꾸고 싶지요? 파트너를 바꾸고 싶지요? 그러나 좌석을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규명을 좋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어떻게 견디고 해결하나 주목하십니다. 여차하면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아담의 작명 작업은 손쉽게 하루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에서 여러 달이 걸렸을 것입니다. 긴 작업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보고 계십니다. 그 상황을 어떻게 잘 넘기나, 힘든 상황을 잘 넘기나 하나님께서는 주목하십니다.

 

“보시려고”-계속적인 관심과 주시와 기대입니다. 모든 상황은 우연이고 내가 끌어들인 것 같기도 하지만 상황을 끌어 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고통당할 때 주님께서는 내면의 힘을 주시고 보호하시며 문제가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장애인 자식의 고통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결정적입니다. 자식의 고통에 너무 민감한 부모들은 결국 그 자녀에게 자립심과 고통을 이겨나가는 힘을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장애인 자식이 넘어지고 끙끙거릴 때 그 부모들은 달려가 편들지 않습니다. 그냥 버려둡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버려둡니다. 그러나 그냥 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갑자기 실명된 아내를 혼자 직장으로 보내고 아내 몰래 같은 버스에 타고 아내가 퇴근하기 전에 달려가 아내의 버스에 동승하며 살폈던 한 군인 장교 남편의 순애보! 아내는 혼자 모든 일을 해내고 있는 줄로 알았는데 운전기사가 “당신은 참 행복한 여인이오! 멋진 남자가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으니!” 그 말에 남편의 보호와 사랑을 알고 눈물을 터트린 러브스토리!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그 고통을 헤쳐나가나? 그 고통을 어떻게 이름 짓나 살펴보고 계십니다. 우리만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함께 고통당하며 우리가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도 주님은 그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하시나 보고 계셨습니다. 이 사랑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케일리는 자기 책이 팔리지 않아 엄청나게 재고가 쌓이는 것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느 날, 대통령에게 증정할 기회가 있었고 소감도 물어볼 수 있게되었습니다. 대통령이 책을 읽었겠어요? 그냥 좋아요! 했는데 케일리는 대단한 광고문구를 만듭니다.

 

<대통령이 읽고 좋아요 한 책! 절찬리 판매 중!>

 

새 책을 발견한 케일리는 다시 대통령에게 증정했고 여러 날 후에 소감을 물었습니다. 대통령이 뻔한 수법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혀 재미가 없어요!” 했더니 이번 카피는 이것입니다.

 

<대통령이 싫어하는 책! 절찬리 판매 중!>

 

역시 대박입니다.

세 번째 책을 내고 다시 대통령을 만나고 같은 방법을 씁니다. 대통령은 더 이상 농간에 놀아나기 싫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케일리의 광고 문안은 이것입니다.

 

<대통령도 결론 내리기 어려운 책! 구매하려면 서두르세요>

 

케일리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자꾸 그 상황에 좋은 이름을 지었고 좋은 문구를 지었습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 어떻게 문구를 만드는가? 그것이 성공과 실패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참고도서. 유대인의 생각공부)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모든 상황의 이름을 명명하라 하십니다. 우리는 일종의 작명가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맞도록 좋은 해석들을 해야합니다.

 

가나안 정탐에서 10명의 정탐꾼들은 원주민들을 거인으로, 자신들은 메뚜기로 작명했습니다. 결국은 이름대로 메뚜기로 처신합니다. 갈렙와 여호수아는 상대방을 거인으로,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그 거인들을 밥이라 작명합니다. 거인이 클수록 밥덩이도 큽니다. 상황을 어떻게 규명하는가, 에 따라 승리가 있고 패함이 있는 것입니다.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나? 하나님께서 보시려고 와 있습니다. 상황 판단이 중요합니다. 그 상황 판단이 바르게 되면 결과도 좋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걸 보시려고 와 계십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선전하고 좋은 이름을 붙여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좋은 쪽으로 명명하는 영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담처럼 우리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면서 삽시다. 바로 내가 어떻게 이름을 짓나 그걸 보시려고 주님은 지금도 내 곁에 계십니다.

 

결론

서두에서 필립 얀시의 책 이름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이 상할 때 어디에 계십니까?> <내게 왜 이러세요>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누구나 고통과 황당한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할 때 마음이 상합니다. 왜 이런 상황을 주시는가? 하필이면 왜 나에게? 내 자식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실망’을 합니다.

 

얀시는 또 하나의 책을 썼습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뜻밖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내가 어떻게 이 불행을 감당해 가나? 그래서 얼마나 내 인격과 삶이 성숙되어 가나?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어떻게 이름을 짓나 살펴보고 계시는 분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어디에서나, 뜻밖의 장소, 즉 불행한 장소와 상황에서조차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이름들을 만들어 가며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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