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큰 구원을 유실하지 말라!(히브리서 2:1~4)

갈렙처럼 2025. 2. 10.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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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구원을 유실하지 말라!

히브리서 2장 1~4절

 

서론

2010년 10월, 칠레광부 33명이 땅 밑 700미터에서 갱이 무너지는 바람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620미터의 장소로 옮겨 69일, 마지막에 구조된 이들은 70일을 채웠습니다. 버틸 수 있을까, 살아나올 수 있을까? 염려반기대반이었는데 가족 품에 안기는 대감동드라마를 보였습니다.

 

신문은 “각본이 없는 지상최고의 인간드라마”라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래 맞다! 사람을 살리는 드라마처럼 위대한 드라마가 어디 있는가? 생각했지만 잠시 후에, 이보다 더 엄청난 구원드라마가 일찍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해 내신 구원, 구속(救贖)의 드라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가리켜 ‘큰 구원’이라고 합니다.

 

3절, “우리가 이 같이 큰 구원을…”

거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큰 구원이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은 어느 것과도 비교도, 대체도 할 수 없는 큰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큰 구원이 되는 까닭

-큰 분이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큰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온 우주에 혼자 존재하시는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해 주셨기에 당연히 큰 구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분은 대통령입니다. 말로는 대통령이 국민의 심부름꾼이라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디 그렇습니까? 대한민국을 대표하기에 가장 큰 사람입니다. 큰 사람이 주는 선물은 가장 큰 선물이며 큰 사람이 주는 훈장은 가장 큰 훈장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은 크신 분으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원을 큰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큰 집에서 받은 구원이기에 큰 구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집은 푸른 기와집 청와대입니다. 청와대보다 규모가 큰 사무실, 학교 건물, 공장건물이 있지만 가장 큰 집이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통령이 살고 있기에 청와대를 큰 집이라 합니다.

 

 

왕궁이 크기로만 봐서 왕궁이 아닙니다. 왕이 살고 있기에 왕궁이고 왕실입니다. 왕실에서 받은 음식은 어식(御食)이요 술은 어주(御酒)입니다. 가장 맛있고 풍성해서 어식이요 어주가 아니라 왕이 왕실에서 내려주는 음식과 술이어서 가문 대대로 영광이 되는 어식, 어주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이기에 가장 큰 구원입니다.

 

-큰 역사로 이루어진 구원이기에 큰 구원입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동정녀 몸으로 나시고 복음을 전하다 십자가에서 달리셨습니다. 이어 죽으시고 부활해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래서 큰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하면서 이루신 내신 구원이기에 큰 구원입니다.

 

-이렇게 큰 구원이기에 성령께서 성경으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 만물 창조는 창세기 1장으로 끝납니다. 성경이 구신약 1189장으로 되어 있는데 나머지 1188장은 인간 구원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나머지 부분을 할애할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천군천사들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총동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구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큰 구원을 누리고 있나요? 실감하고 있습니까? 큰 구원을 받은 사람답게 늘 기뻐하며 찬송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큰 구원을 이웃들에게 전하며 간증하고 있습니까?

큰 구원을 등한시 한 까닭

이렇게 큰 구원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3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등한’(等閑). 관심이 없거나 소홀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이다지도 큰 구원인데 복권당첨의 감동만큼도 못하고, 성탄절이 아이들 생일만큼도 못하고, 예배드리러 오는 일이 극장에 가는 일만큼도 못하고… 주님을 위해 헌금하는 일이 아이들 세뱃돈만큼도 못하다면 이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구원을 등한시 하는 일입니다.

 

큰 구원을 등한시한다는 것이 예수님 믿는 일에 관심 없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비신자들, 교회 밖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세례도 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되고 여러 직분을 받은 다양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할 사람들!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할 신자들이 구원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면서 자라지 못하고 세상 즐거움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소위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저들은 왜 이리 큰 구원을 등한시합니까?

-율법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구원을 체험했던 유대인입니다. 율법에 매여 버거운 종교생활을 해왔던 사람들, 정기적으로 예루살렘 제사의식에 당연히 참석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던 그들이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받아 들였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거기에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며 상부상조를 하니 세상에 이렇게 큰 구원, 큰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를 씻어 천국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율법을 제대로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구원의 요구 앞에 혼합을 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상당히 논리적이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교인들이 겪었던 문제였습니다.

 

그 결과, 다시 율법으로 돌아갔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에는 온전히 율법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이었고 지금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의 길에 들어섰으니 이제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것은 율법을 통해 구원을 유지하고 완성하는 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스도로 오는 큰 구원을 등한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너무 오래 믿다보니 구원의 첫 감격이 식어버립니다.

부부가 처음 가정을 꾸렸을 때 얼마나 큰 사랑이며 기쁨입니까? 연애나 중매 이후에 사랑이 싹트고 연애로 들어가면서 결혼한 부부들은 그 신혼이 세상에 가장 큰 기쁨이며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월 앞에 영원한 사랑은 흔치 않습니다. 그 좋았던 기쁨들이 이러저런 일로 갈등하다보면, 아이들이 태어나다보면, 나이가 들어가다 보면 서로에 대해 등한시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사랑이 식어지고 서로에게서 오는 기쁨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구원 받았을 때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과 홍해에서 얻은 구원으로 엄청 컸던 대(大)구원은 광야생활에서 줄어들고 작아지고… 나중에는 구원의 기쁨보다는 원망과 불평으로 점철된 광야생활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 지경이 아닐까요?

 

-구원을 받은 이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구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구원에서 자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은혜의 생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기위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큰구원을 주신 주님을 더욱 찬양하며 구원을 널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은혜 안에서 구원의 기쁨이 계속 자라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한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하나님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천국 입장권으로 만족하기에 큰 구원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구원보다 세상 소유에 더 눈독 들이느라 큰 구원을 등한시합니다.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에는 오직 거기만 관심하면서 암에서 고침 받으면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한다 생각했습니다.

수술이 잘 되어, 아니면 신앙의 힘으로 고침 받으면 눈물범벅이 되도록 감사하며 그 구원을 찬양하며 감동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감동이 식어지고 더 많이 쥐어지지 않음을 불평합니다. 세상의 기쁨과 영광에 눈이 트이고 마음을 주면 영생구원이라는 대(大)구원은 훗날에 되어 질 이야기요 지금 당장은 눈앞에 보이는 기쁨에 큰 구원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등한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구원을 등한히 하지 말라! 공짜 구원이라고 값싼 구원을 만들지 말라!”

 

어느 집의 딸이 피아노를 사 달라고 중학교-고등학교 6년을 내리 졸랐습니다. 형편이 좋지 않아 미루다 대학 입학 기념으로 사 주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피아노를 사놓기만 했지 연습도 연주도 하지 않습니다. 피아노를 등한시 한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이 좋을 리 없습니다.

광야 이스라엘이 그러하고 히브리서 독자들, 우리가 구원을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큰 구원을 소중히 여기려면

큰 구원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존하고 키워나가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구원은 그냥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이 크고 생각이 크고 기쁨과 감격이 커졌다 줄어졌다, 하는 것처럼 구원도 그렇습니다. 큰 구원을 받았다하지만 작은 구원으로 전락합니다. 큰 구원이 작아지면 감동도 감격도 감사도 기쁨도 작아집니다. 그런 믿음은 세상 시류(時流)에 흘러가게 됩니다.

 

말세에는 음험한 조류가 흐릅니다. 인본주의, 세속주의, 정체불명의 이단들, 번영신학들… 그러기에 죄에 대해 무심하거나 신앙생활에 심드렁하면 우리가 받은 구원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도 유실됩니다. 세상에서는 나왔지만 영생의 나라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큰 구원을 유지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1절에서 경고합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염려하라!”

 

-유실되지 말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흘러 떠내려갈까…. 원래의 뜻은 '흘러가다' 흘러 떠내려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미끄러져 빠져버렸다,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버렸다, 음식을 실수로 흘러버렸다, 무의식중에 말해버렸다… 선원이 부주의해서 배를 항구나 정박지에서 멀리 표류시키고 말았다… 등등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관심 부족과 부주의로 인해서 진리를 잃어버렸다, 유실했다는 것입니다.

 

큰 구원이 우리 인생에서 왜 빠져버리고 작은 구원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나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취하다보니 큰 구원이 유실되어 버립니다. 배가 항구에 입항해서 풍어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데 바다에서 표류합니다. 배를 살리고 인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수고로이 얻은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당연히 기쁨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큰 구원을 등한시하면 큰 인격을, 큰 성품을 유실(流失) 당하게 됩니다. 그래놓고 오래 믿었다고, 왕년에 교회에서 일을 많이 했다고, 교회직분이 뭐라고 자랑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큰구원은 모두 빠져나가버려서 지금 남아있는 구원은 하찮으면서 자랑만 한다면 믿음에서도 싱거운 사람 취급을 받게됩니다.

 

-그러기에 큰구원이 유실되지 않으려면 유념해야 합니다. 유념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큰구원이 어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인지, 큰 구원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협동사역을 하셨는지 항상 마음 중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구원을 놓쳐버리면 구원 자체가 취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믿음이 되어버리고 겨우 구원을 이룰 간당간당한 믿음, 부끄러운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큰 기쁨도 없고 큰 능력, 큰 은사, 큰 역사도 덩달아 사라지게 됩니다. 세속화된 신자가 되는 것이지요.

세속화된 신자라 하면,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요 빛을 잃어버린 촛대입니다. 이런 신자들에게 큰구원이 큰 역사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우리의 구원이 큰구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큰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더 크게 키워나가야 합니다.

결론

어느 분이 출근 때마다 지하철 입구에서 구걸하는 이에게 매일 천 원씩을 주었습니다. 한 해가 지나 천원을 주었더니 거지가 얼른 받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물가도 올라서 500원 인상해 주셔야 하는데요, 그러더라는 겁니다. 고마움을 소홀히 여기는거지요! 좋은 분의 친절한 그 마음을 등한시 여긴 거지요! 돈에 너무 연연하다보니! 그러니 받던 천원조차 놓치게 됩니다. 돈도 돈이지만 그 분의 관심과 사랑이 유실되어 버린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보통 선물이 아니라 큰 구원의 선물입니다. 흙덩이가 어떻게 감히 천국의 영생을 꿈이나 꿀 수 있습니까?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어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분의 보호와 공급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 큰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선물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갈고닦아 큰 구원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기위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큰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는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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