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희망이 하나님에게 묶일 때(창세기 16:1~3)

갈렙처럼 2025. 2. 10. 06:48
반응형

희망이 하나님에게 묶일 때

창세기 16:1~3

 

서론

인생 살아보니 계획대로 소망은 이루어졌는가요? 연말연시에 기도제목을 냅니다. 건강을 위해, 사업장을 위해, 회장 직책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운전면허 합격해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기를… 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회사의 중책을 겸손한 마음으로 잘 감당하기를… 혼자 교회 나오는 것 너무 힘들다고… 며느리가 아이를 갖기를… 아들을 세무공무원 만들어 달라고… 남편이 꼭 교회에 나오기를… 아들이 임대주택에 들어가기를… 의료사고가 생기지 않기를… 자녀들이 좋은 배우자들을 만나기를… 사위들의 사업이 잘 되기를… 소망대로 이루어졌나요? 기도제목만 있지 이루어진 것은 내 눈에 귀에 들어오지 않기에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제목대로 이루어졌고 어떤 분들은 아직도 원점이라며 낙담합니다. 올해에는 모든 것이 끝났고, 내 생에는 이루지 못할 소망이라고 체념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인디언 아라파호족(族)은 11월을 가리켜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11월은 그런 달입니다. 왜냐? 추수감사절에 감사했던 그 감사가 12월을 기다림의 달로 만들어 낼 것이며 우리 마음에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의 성탄으로 다시 힘을 얻고 새해를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에게 희망(希望)이라는 단어는 ‘하티크바’입니다. ‘하티크바’는 “노끈을 서로 꼬아 한데 결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죽어버렸지만 하나님의 희망의 끈과 함께 꼬아 일어서는 것입니다. 일어서 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희망(希望)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희망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자체 발생되는 “희망”은 또 하나의 절망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희망은 하나님의 희망과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노끈을 만들어 갈 때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희망은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록 그것이 더디게 나타나고, 소망이 더디게 이루어져도 하나님의 노끈과 꽈배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그 희망을 얻게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국 문제만 하나님께 맡기고 희망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거짓된 희망에 속기도 하고 소망이 더디게 이루어질 때 다른 것과 함께 꼬아 감으로 결국에는 더 큰 절망을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20년 이상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없고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자 절망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 부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희망을 만들어 가려 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과 꽈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희망을 엮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태(胎)에 희망의 끝을 묶었습니다. 사라의 태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들을 통해 대민족의 꿈을 이룰 것입니다. 대민족! 땅! 복의 근원! 생각만해도 행복하고 희망적입니다. 사라 역시도 자신의 태(胎)에 희망을 겁니다. 그래서 귀한 태(胎)를 만지며 그곳에서 희망이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1절,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사라를 통한 아브라함의 희망도 사라져가고 사라 자신의 희망은 더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올인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에게 올인해서 너무 공부, 공부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들의 믿음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 아이들이 희망이 되었습니까? 자녀들의 성공에 노끈을 묶어가며 희망이라 생각했는데 자녀들의 성공이 때로는 내 희망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갈모자를 통해 희망을 만들어 내려합니다. 누구를 통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갈을 동원했습니다. 그 결과 하갈이 임신했지만 그건 희망이 아닙니다. 거짓 희망입니다. 하갈이 제 처지를 망각하고 여주인 행세를 합니다.

 

4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그래서 집안이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5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출생하자 거기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겠다고 했으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7:!8)고 했습니다. 응답이 더디 오고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자 이스마엘로 희망을 삼고 그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만들어 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서 나오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이삭이 아니라 약속이 없는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인간적인 희망은 모두 이스마엘일 뿐입니다. 그래서 한때의 희망은 우환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메시아>를 작곡한 프리데릭 헨델은 세계적인 작곡가였습니다. 어느 날부터 명성은 시들어졌고 그의 음악애호가들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는 퇴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소망이 거의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성경교재를 보게되었습니다. 첫 머리에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이사야 40:1절을 읽고는 온 몸이 전율로 떠는 것을 느꼈습니다.

 

1741년 8월 22일-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23일이 지난 뒤 <메시아>라는 대곡이 탄생했고 초연 당시 영국 왕 킹 조지 2세는 음악이 막바지에서 “할렐루야!” 라는 찬송에 너무도 감동을 받아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었고 관객들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일어났습니다. 그 날 이후 이 부분에서 모두 일어난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헨델은 많은 곡들을 작곡했지만 모든 것이 이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성공 같았지만 하나님의 인정도 약속도 없는 이스마엘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 누리고 있는 것들을 봅시다. 그것은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까?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달려가면서 얻은 이스마엘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제자들처럼 자기들이 던지는 헛 그물질은 아닌가요? 유다의 은 30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자고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스마엘처럼 두고두고 우리에게 불화를 주고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 손에 있던 것들을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서 희망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언약에 근거한 희망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이라도 만들어 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희망의 대안이 아니라 서글픔과 분노와 애석함을 남겨주고 떠났습니다. 작은 희망조차도 분질러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과정을 겪어가면서 점점 희망의 끈을 하나님과 묶습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그의 믿음은 날로 성장하여 상당한 믿음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삭에게 올인하려하자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누구도 순종할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인간의 도리로서 못할 짓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납니다.

자식을 죽이면 아버지의 희망은 끝입니다.

 

지난날이었으면 순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순종합니다. 그의 희망은 사라에게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에게서, 롯에게서 점점 하나님 쪽으로 올라갑니다. 사람과 묶으려했던 노끈을 하나님과 묶으며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점점 접근했습니다.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은 이해는 안 되어도 그렇다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희망은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기둥에 묶여서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지 않을 것이며 설령 죽인다 해도 땅과 대민족과 복의 근원이라는 아브라함의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해석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하나님께서 희망의 불꽃을 다시 피울 것이며 3대 축복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의 희망은 더 이상 이삭에게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이었으면 이런 찬양을 눈물을 흘리며 불렀을 것입니다.

 

“세상소망 다 사라져가도 주의 사랑은 끝이 없으니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이 주 은혜임을 나는 믿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입니다. 이삭은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모리아산을 내려오는 아브라함의 희망은 더 굵어졌고 더 강해졌고 그 희망은 2천년 후까지 바라보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는 메시아를 바라보는데 까지 희망이 길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누구를 기다리면서 기뻐했다고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며 즐거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진정한 희망이 되었습니다. 메시아를 바라보는 희망이 있었기에 이삭을 제단에 올리면서도 그의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삭에게 있었던 희망이 온통 하나님에게로 더 나아가 언제인가 오실 메시아에 대한 희망으로 더 강력해졌습니다.

 

이런 희망이 아브라함 속에 피와 살이 되었고 히브리민족의 DNA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 70년을 바벨론에서 종살이하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내는 메시아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는 민족으로, 율법과 성전 중심의 거룩한 민족으로 민족개조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메시아 희망이 만들어 내는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2천년을 주권과 영토와 나라가 없이 유랑했습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철저히 패배자의 역사요 절망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 대망신앙, 메시아의 강림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어떤 국가보다 역동적이고 강력한 민족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희망이 만들어 내는 민족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가의 제목이 ‘하티크바’(Hatikvah, 하틱바), ‘희망’(HOPE)입니다.

 

마음 안속에서

유태의 영혼이 갈망하는 한

그리고 동쪽의 끝을 향하여

한 눈이 시온 쪽을 향하여 지켜보는 한

우리의 희망은 아직 잃어지지 않았다

 

2천년의 희망,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로운 민족이 되는 것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

우리 자신의 땅에서 자유로운 민족이 되는 것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

 

희망처럼 유대인을 속였던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유대인은 희망이 있기에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세상 희망은 그들에게 사기를 쳤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은 절대 거짓이 될 수 없다는 믿음이 오늘 유대민족을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운명은 노끈으로 하나님과 엮었고 국가의 운명을 노끈으로 하나님에게 묶었기에 스탈린의 독가스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희망이 주는 힘입니다.

결론

성경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고 희망을 이룬 이야기들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요셉, 욥, 다윗…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욥은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35:10)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노래했던 실천적인 인물입니다. 밤중에 어떻게 노래가 나왔을까요? 그들의 희망을 하나님에게 묶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더디게 오는 것 같습니다. 희망이 아니라 자꾸 일이 꼬이고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가장 좋은 희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과 끝까지 함께 한다면 말입니다.

 

12월은 희망을 키워내는 성탄의 달입니다. 내 생애의 유일한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희망의 노끈을 단단히 묶으시고 한 해를 잘 정리하면서 새해를 기다립시다! 희망을 잉태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