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막 중심으로 살라!
민수기 2장 1, 2절
서론
우리교회 금년 사역주제 “하나님의 선물 나의 사랑 나의 교회”입니다. 왜 이런 주제를 내걸게 되었는가, 요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 좋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장통합 교단 통계위원회가 ‘2018년 교세 통계 현황’보고서를 냈는데 전년도 보다 7만3469명 감소했다고 합니다. 이는, 100명 단위 교회가 734개, 200명 교인수 교회로 따지면 367개 교회가 사라진 셈입니다.
시대가 그러니 그렇구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만 약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천주교 모두 신자 수의 감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슬람만 부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교인들도 교회를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못되어서 그런 면도 있고 일하지 않는 교인들이 늘어나다보니 앉아서 비판만 하게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그들의 잣대로 비판하고 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비판을 귀담아 들으면서 우리가 그 잘못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래도 내 앞에서는 쉽게 교회를 욕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그 선물을 누가 주었느냐, 또한 그 선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때 진정한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교회는 남편이 있으면 버겁고 없으면 아쉬운, 그런 존재처럼 되고 있습니다. 비극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급하고 광야생활을 하던 당시의 인구는 대략 200만 명입니다. 20세에서 50세의 장정만도 603,550명입니다. 그런데 40여년이 지나고 계수했더니 세상에 1820명만 결원이 났을 뿐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40년이면 공동체를 떠나 애굽으로 돌아가고 나름대로 광야의 오아시스에서 마을 형성해서 주저앉고 다른 베두인들에게로 갔을 텐데도 그리 오랜 세월을 방황하면서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출애굽 공동체는 와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우왕좌왕 지리멸렬 할 것 같은데 일사 분란합니다. 모세라는 지도력? 모세는 느닷없이 나타났기에 수도 없이 거역당하고 모욕을 당했습니다.
저들은 별다른 방비 없이 출애굽합니다. 그러니 명령전달 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십부장 제도가 생기지만 그것 역시 훈련된 조직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한 마음처럼 움직였습니다. 인간역사에 이런 일이 없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회막에서 찾아야 합니다.
광야 공동체는 회막이 중심입니다.
회막은 광야의 천막성전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회막 중심으로 진(陣)을 쳤습니다.
2절, “이스라엘 자손은…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출애급공동체가 지도자들마다 나를 따르라! 내 견에 옳은 대로 움직였다면 백성들은 기진맥진했을 것이고 지리멸렬입니다. 그러나 회막이 있기에 사방 각처에서 움직이면서도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회막이 멈추면 회막을 중심으로 하루이건 이틀이건 1주일이건… 멈추었습니다. 회막을 떠난 자들은 광야에서 사라졌습니다.
회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러기에 회막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가까이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사람들과 가까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도 나도 하나님과 가까이 할 때에 피차간에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가까이 하면서 사람들과 가까이 해야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지 교회와 멀어지면서 그룹을 짓는다면, 오늘 한국교회의 분쟁들이 그래서 조정되지 못하고 한국교회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인생을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광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광야 40년을 어떻게 회막을 중심으로 살았는가, 그래서 축나지 않고 오히려 번성되었는가, 그걸 알면 우리도 축복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회막은 하나님이요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회막 중심으로 회막에 초점을 맞추었듯이 우리도 교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에게 항상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회막 안에 늘 있어야 합니다. 광야 백성들이 회막이 더디다고 떠나갔다면 광야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들이 회막을 지킨 것이 아니라 회막이 그들을 지켜준 것입니다.
루터는, 교회는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개의 젖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걸 잘 빨아야 합니다. 내 어머니의 젖을 빨아야 합니다.
텔레비전의 설교, 성경공부… 교회 밖의 성경공부들을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새에덴교회 소목사님의 뉴욕집회 시에 어느 집사님이 식사를 대접하면서 아버지 장로님 이야기를 합니다. 부산 어느 교회 건축위원장, 건축 과정에서 사사건건 목사님과 대립하고 교회에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목사님이 욱! 하는 마음에 소리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짓는 것이지 장로님이 짓는 것입니까?”
그러자 건축위원장 장로님이 같이 화를 내면서 맞받아칩니다.
“그래요? 두고 봅시다! 이놈의 교회 얼마나 잘 짓고 얼마나 잘 되는가 봐라!”
그러면서 공사장 망치로 교회기둥을 내리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후 교회는 무사히 성전이 완공되고 날로 부흥되었습니다. 교회를 떠난 아버지 장로님 가정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맞장구를 쳤던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일찍 죽었습니다. 모두들 하는 일마다 안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축복이 단절된 집안인 줄 알고는 무서워 미국으로 도망 와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눈으로 보았기에 교회 대적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부탁하더랍니다.
“집회 때마다 제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세요! 아버지도 나름대로 교회를 사랑하고 잘 하려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방법이 아니라 당신 방식대로 하셨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요즘 교회관이 너무 약합니다. 그러다보니 명문(名門) 크리스천가문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활주거지를 중심으로… 그것도 재산증식 때문에… 아이들 교육 때문에… 옮깁니다. 그래서 유목민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헌신하지 않습니다. 충성하지 않습니다. 시험에도 견대내지 못합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나가면서 교회관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하면 주일교인이 되고 냉담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가나안 신자가 됩니다. 교회는 안 나가되 신앙생활은 하는 ‘재택형’ 신자들, 소위 ‘가나안 신자’들이 됩니다. 무리들입니다!
우리가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거룩한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교역자들에 대해 늘 존경하고 충성하는 마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들어오고 헌신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교인들의 자손들을 번성하게 해 주실줄 믿습니다!
광야 공동체는 회막이 길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대상로가 있고 군대가 지나갈 길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일정한 곳에 있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살았던 광야는 길 자체가 없습니다. 나침반이 있나요, 가나안을 아는 자가 있나요? 400년이 지났는데… 광야는 길이 생겼다고 없어지고… 오늘 모래바람이 불어와서 길을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
200만 명이 움직일 때 길이라고 다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에 좋은 길이 있고 여름에 좋은 길이 있습니다. 유목민들이 기습해서 생명을 약탈하고 재산을 갈취할 수도 있습니다.
설령 길이 있다고 해도 그 길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방황이요 신기루입니다.
길을 바라보는 자기 눈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마세요. 조종사들이 바로 이런 착시현상 때문에 추락사고가 생깁니다. 계기를 믿지 않고 눈을 믿으니까 자기 생각에는 땅인데 계시는 하늘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땅으로 기수를 돌렸다가 꽝~
그들은 오직 회막을 따라갔습니다. 회막은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갔습니다. 사실은 하나입니다. 회막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걸었던 그 길! 성막은 정처없이 그들을 인도한 것 같은데 ‘워킹 더 바이블’이라는 책을 보면, 그 아래에 지하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성막은 그냥 간 것 같은데 지하수가 있는 길 위로 갔기에 오아시스를 만나고 반석에서 물을 치면 물이 나오고… 그렇게 출애굽 공동체는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길 때문에 마음이 상합니다. 돌아가는 길 때문에! 그래서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갔던 사람들은 다 지리멸렬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부족은 감소합니다.
돌아가는 길… 사실은 그게 안전한 길입니다. 말씀이 앞서고 회막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대단했던 분입니다. 소떼 500마리를 끌고 38선을 넘었습다. 그건 길이 아니었지만 스스로 길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길이다” 대단히 진취적이고 성공적인 언어입니다.
우리는, 살짝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시면 그게 길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음성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성막에서 들려오는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게 약세로 돌아서는 것은 우리의 죄악과 ‘입으로만의 믿음’ 탓도 있고 이러저러한 자충수들도 있지만 지금 시대가 기독교에 적대적입니다.
동성애-한 남자 한 여자의 결혼을 말하는 성경과 맞지 않지요? 페미니즘-여자를 남자의 갈비뼈에서 만들고 남자보다 후순위로 창조되었다는 논리가 여성운동가들에게 기분이 나쁩니다. 인종주의, 민족주의는 모든 민족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 인본주의가 강세입니다. 여기에 교인들의 세속주의와 재림론 결여가 석화된 믿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가 내 사상과 맞지 않고 내 이념과 상충된다고 성경을 포기하고 예배당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곧 길을 잃은 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영적으로 미아가 되고 기독교에 적대적인 세력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진 아무개 교수, 김아무개 목사, 또 김 아무개 석좌교수, 진보적인 기독교인터넷 신문 등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로 인하여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망하다 세대교체를 당하는 비운의 세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입니다. 세상이 어찌 가든지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이런 교회들만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회이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로 교회는 진리를 지켜나가게 됩니다. 이런 진리에 굳게 서 있으려면 말씀의 수원지가 되는 예배당 성막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주실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부족의 번성이 있습니다.
내 눈에 보기에 좋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건 자기희생과 내려놓음과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믿음의 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광야 공동체는 회막의 위치를 사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을 넷으로 나눕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의 일에 책임을 다했습니다.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17절,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영과 함께 모든 진영의 중앙에 있어 행진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들의 기를 따라 앞으로 행진할지니라”
-누구나 동이 트는 곳에 위치하고 싶어합니다.
-남의 눈에 띄는 곳에서 일하면 알아주니까 더 신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자에게 위치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할 임무밖에 없습니다.
이건 거부했다가 고라와 120명의 두령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배치해 주신 위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입니까?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곳이 생활 회막입니다. 그곳에서 성실해야 바른 예배가 되고 바른 제사가 됩니다.
우리 늘빛교회에서의 내 위치는 어디입니까? 내 부서가 부흥하고 있습니까? 불평보다 감사가 넘치는 부서입니까? 내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인류대표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이 아니라 롯을 따라 애굽으로 갔다가 망신을 당했습니다.
야곱. 삶의 위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삭개오. 아브라함이라는 혈통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기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아야 회막은 안전하고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목사는 목사‘답게’, 장로는 장로‘답게’ 권사는 권사‘답게’… ‘답게’는 결국 자기 위치, 자기 포지션을 를 지키는 일입니다. ‘답게’ 신앙이 교회를 진리의 터, 영성의 장소로 만들어 낼 것입니다.
결론
어거스틴은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 부패한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부패한 인간들은 변화되고 부패한 인간들은 죽어서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다시 그만큼 정화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패하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처럼…. J. F, 파워스는 <푸르게 돋아난 밀> 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 이 큰 배는 낡아서 삐걱거리고 이리저리 흔들린다네. 그래서 구토가 날 때도 있지. 하지만 이 배는 목적지까지 잘 간다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걸세. 자네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말일세.”
교회는 이처럼 구원선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방주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방주 안에 있어야 끝까지 구원을 얻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해도 우리는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변증하며 변호하며 온 몸으로 방어하는 신자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자손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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