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믿음은…
히브리서 11:7
서론
추석 연휴들 잘 보내고 있지요? 추석 연휴에 영리한 도둑이 전자제품 대형 할인매장에 잠입했습니다. 물건을 훔치려면 트럭도 준비하고 동료도 필요한데 혼자서 매장 문을 따고 들어왔습니다. 도둑은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물건마다 가격표딱지를 바꿔놓습니다. 비싼 것은 싼 가격에, 싸구려는 비싼 가격표를…, 이런 것이지요! 5백만 원 냉장고에는 5만원 가격표… 5만 원 제품에는 5백만 원 딱지를… 가격표를 바꿔놓은 도둑은 맨손으로 사라졌습니다. 장난도 아니고! 뭔 이런 도둑이 다 있나요? 하다못해 간단한 노트북이라도 훔치고 갈 것이지….
다음 날입니다. 신사복 차림의 도둑님(?)께서 대형트럭을 몰고 왔습니다. 여럿 올 것 없습니다. 혼자 매장에 들어와서는 아파트 건축주로 행세하면서 밤새도록 가격을 다운시킨 제품만을 골라 한 트럭 구매했습니다. 소매점이면 금방 들통 날 텐데 알바들이 창고 일을 보기에 가격표 전표만 떼어 계산원에게 주고 계산원은 제품은 확인도 하지 않는 채 계산을 끝내주자 도둑님은 vip 대접까지 받으며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영리한 도둑입니다. 이번 추석 전후에 한국에서 있던 일은 아니고 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화입니다.
요즘 한국사회가 이런 지경이 아닌가요? 제대로 귀한 것은 싸구려 취급되고 싸구려들은 꾸미고 모양만 바꾼다고 vip대접을 받고… 그래서 학벌이나 외모, 스펙, 자본지상주의로 변질되고 인간의 가격을 매길 양심, 인격, 종교… 라는 단어는 싸구려 헐값으로 매도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가요?
사탄이 밤중에 한국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귀한 것은 싸구려로, 싸구려들은 비싼 것들로 가격을 바꿔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 말씀, 기도, 십자가의 도(道),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보관하고 있는 교회의 소중함은 싸구려로 취급하고 번영신학-예수님을 믿고 축복받자, 성공하자, 잘되자, 는 믿음의 아래쪽에 있는 부분만을 기독교의 꼭대기로 올려놓고 그걸 열심히 구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카터 콜론은 <두려움에 속지 말라>라는 책에서 미래에는 ‘느낌이 좋은 종교’가 인류의 대표종교가 될 것이라 예고합니다. 느낌이 좋은 종교는 어떤 종교일까? 포시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라>에서 ‘십자가의 메시지가 삭제되고 정답고 다정한 종교’가 느낌이 좋은 종교라 합니다. 이런 종교들의 특징은 죄를 지적하지 않고 죄를 변명하고 변호합니다. 신권보다 인권을, 신본주의보다 인본주의를 최상위로 올립니다. 그래서 인기가 있습니다. 편하게~ 더 편하게~ 힐링 또 힐링~ 헌신은 없고 희생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세상축복만을 희생 없이 얻으려 합니다. 이런 바꿔치기가 위대한 기독교신앙을 소꿉놀이로 만들고 또 하나의 종교로 전락시킵니다.
우리 시대에 사탄이 바꿔놓은 가격표에서 가장 저가가격표로 둔갑된 것이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 재림입니다. 재림신앙은 1970년 때까지 최고의 가격표였습니다. 성도들은 오직 주님의 재림을 붙들고 고난과 시련과 가난을 견디었습니다. 재림신앙이던 한국교회가 1992년 10월 28일 시한부종말론자들의 소동으로 재림가격표는 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재림은 가장 싸구려 제품이 되고 지금은 누구도 사모하지 않는 휴면계좌, 깡통계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재림신앙의 실종은 세속화입니다. 세속화의 증상은 귀한 것은 싸구려 취급하고… 싸구려를 엄청 대단한 것으로 갈망합니다. 그 결과가 그냥 편한 종교, 십자가 없는 종교, 예수 재림은 공상만화 수준으로 제쳐버리고 지상천국을 가져다 줄 과학이라는 종교에 솔깃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현상을 2천 년 전에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노아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간들이 보여주었던 경거망동이 세상종말과 심판 앞에서 고스란히 재현될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37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절,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대홍수를 지척에 두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취하다 물심판으로 멸망당했던 사실을 예로 삼고 종말을 준비하는 재림신앙태세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사탄에 의해 헐값으로 버렸던 재림신앙, 1992년 이후 도둑맞은 재림신앙을 비싼 값으로 되찾아 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노아시대 당시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으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와 가족들은 어떻게 예비된 삶을 살았는가, 그걸 살펴보면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장 11장에서 노아의 믿음을 간단히 기록해 놓습니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어떤 믿음의 소지자입니까?
노아의 시대는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던, 자기소견대로 사는 시대요, 인본주의의 뿌리입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옆으로 제쳐버리고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둡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사람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소음(騷音)의 시대입니다. 시대의 경향에 더듬이가 작동하지 않기에 깜깜합니다.
노아는 소음으로 가득 찼던 시대에 하나님의 소리, 영음(靈音)을 들었습니다. ‘아직 보지 못하는’ 심판과 구원에 관한 영음입니다.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으로도 증명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노아는 들었던 것입니다.
노세노세 늙도록 노세~ 하는 인간들의 소음을 걷어내고 노아는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을까요? 창세기 6:8은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노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 음성을 들었고 들리는 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심판과 방주를 통한 구원은 사실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보지 못하지만 믿었습니다!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기에 대홍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세상의 망하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전제로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사실 대홍수는 믿을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제껏 누구도 경험되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대형방주를 지으라! 모든 생물들은 내가 데려다주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제안이 믿어질까요?
노아는 믿었습니다! 상황이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믿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이 참 믿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믿음은 노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믿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합니다(엡2:8)
하나님께서 시대를 구원하실 때에는 강하게 은혜를 입히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은혜를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은 은혜를 크게 입은 사람입니다. 단 10:11,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은혜가 컸기에 시련 중에서 최고급인 사자의 굴속에서도 믿음을 지녀낸 것입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여인입니다. 눅 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은혜를 받았기에 성령으로의 잉태! 성모(聖母)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순종하기가 어려운 가시밭길입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예 옷처럼 은혜를 입혀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옷을 입혀주실 때 영음이 들리고 믿어집니다. 믿는 은혜도 중요하지만 믿어지는 은혜는 더 큰 것입니다. 믿는 은혜는 하나하나에 대한 소매로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믿어지는 은혜를 받으면 도매금으로 그냥 믿어집니다. 이런 은혜를 입을 때, “아, 믿음이 이런 것이구나!” 믿음의 본질을 경험하게 됩니다. 노아는 율법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믿어지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메시지가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노아는 은혜만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은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20년 후에 홍수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홍수에서 살아남으려면 대형방주를 만들라 하셨습니다. 방주는 학교운동장 길이 정도. 130~150m, 넓이는 약 25m, 높이는 약 15m, 적재 톤수는 14,000톤입니다.
전설에는, 방주의 모양을 어떻게 만들까? 궁리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티크나무로 새의 배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즉시로 티크나무를 심어서 20년 후에 큰 나무가 되었고 이 나무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20년을 나무를 심고, 100년을 방주를 만드는 작업-도합 120년! 이것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까요?
우리는 120일도 참기 힘듭니다. 당장 응답을 내려야 하고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120년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멀쩡한 세상의 멸망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얼마나 비가 오기에 천하의 산을 덮을까요? 세상을 덮을까요? 그러나 노아는 믿었습니다! 아멘! 하고 믿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홍수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명하신 대로 배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창6:22) 만들었습니다. 방주가 뜰까, 효율적인가? 그것을 점검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을 믿었습니다! 상황이나 효율성보다는 말씀이 언제나 앞섰습니다.
이게 우리가 본받아야 할 노아의 믿음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은혜입니다. 교회가 너무 세상보다 앞서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보다 앞서 가느라 세상과 함께 가느라 하나님과의 동행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과 나란히 함께 걸어야 합니다.
에녹은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합니다. 빛나는 믿음은 인내입니다. 참고 견디는 믿음입니다. 노아는 120년을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에녹은 혼자만 잘하면 됩니다. 노아는 먹고 놀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기소견대로 가는 시대이기에 더 어렵게 동행했습니다. 굳이 믿음을 논하려면 에녹보다 노아의 믿음이 더 큽니다. 에녹에 관한 기록은 4절이지만(창 5:21~24) 노아의 생애는 창세기 6~10장까지 5장에 걸쳐 기록됩니다.
믿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믿는 대로 사는 믿음은 더욱 중요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성경구절에만 밑줄 긋지 말고 생활에 행동에 밑줄을 그어야 합니다. 아멘!도 중요하지만 아멘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인내하게 하며 성장하게 합니다.
7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노아의 믿음은 세상을 정죄한 믿음입니다. 세상을 정죄했다는 것은 그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이요 세상의 죄를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전설에 노아는 150센티 정도의 종을 만들어 하루 세 번 타종했다 합니다. 사람들이 묻자 “하나님께서 홍수를 보내서 너희를 멸하신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정죄했다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거룩한 사람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의 티를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의롭다’ 합니다(창6:9). 도덕적 의로움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현재의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니 120년을 한결같이 의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현재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노아의 정죄를 세상은 받을 리가 없습니다. 120년 후에 된다는 황당한 일을 지금 곧 일어날 일처럼 일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또라이’ 조롱했겠지요. 그것도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드는 것은 정상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설에는 돌을 던지며 조롱했습니다. 그때 노아는 “지금은 너희가 나를 조롱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너희들을 조롱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외롭게 믿음생활을 한 것입니까?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이자 저술가 에이든 토저는 <세상과 충돌하라>는 책을 썼습니다. 유명대학 휘튼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전한 메시지입니다. 토저는 이 책에서, 타협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세상이 던져준 싸구려 기쁨을 거부하라!! 적당히 타협하며 편하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그 편한 길을 철저히 반대하신다! 세상과 불화하라, 겁먹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 고 일갈합니다. 이런 배짱 없이 십자가 길을 간다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노아의 생활신앙을 들으면서 산다는 것이 힘들다고 말함을 조심해야 합니다. 살아도 노아처럼 땀 흘리며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 일이 힘들다고 말하지 말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교회 봉사를 얼마나 했나? 예배당 방주를 몇 채 지었나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당시의 타락한 윤리를 정죄하는 거스르는 길을 걸었던 노아 앞에서만큼은 목회가 너무 힘들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 하나 지어보지 못하면서, 지어도 여럿이 합작품 아닌가요? 노아는 8명이 건축했습니다.
믿음은 땀 흘리는 것입니다! 세상과 거룩하게 충돌하며 사는 것입니다. 멀리 보이는 심판과 재림과 보상을 기다리면서 지금은 오해를 받고 땀 흘리는 것입니다. 보상을 충분히 기대하면서 농부의 심정으로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믿음입니다.
결론
영리한 도둑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시다! 영리한 도둑은 비싼 것은 싼 가격으로! 싼 것은 비싼 가격으로 가격표를 속였습니다. 매장 고객들은 비싼 제품은 싸구려 취급을 하고 싸구려는 비싸게 구입해서 속은 줄도 모르고 애지중지하겠지요.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그렇게 싸구려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단이 율법에 대해 고가의 가격표를 붙여놓자 율법의 제품으로 구원 얻으려 했습니다. 사단이 십자가 가격표를 헐값으로 바꿔놓자 세상은 십자가를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사단의 작전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싸구려 취급을 하시는 세상영광에 대해서는 영적인 분별력과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죽자 사자 그걸 얻으려고 누리려고 놀고먹고 마시고 취한 상태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아무리 오래 예수님을 믿었다 해도 그건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나가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야 합니다. 120년이나 믿음을 지키며 세상의 죄를 정죄하던 노아도 노년에는 포도나무를 심어 술에 취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안전핀이 벗겨졌습니다. 그러자 해롱대었고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추태를 보였습니다. 세상의 죄를 정죄하던 의인 노아는 아들에게서 정죄를 당하는 죄인의 모습, 자기가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정죄하는 불행한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니 아무 것도 아니라는, 참 무섭고도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비싼 것은 비싼 것으로! 싼 것은 싼 것으로! 영광은 영광으로! 배설물은 배설물로 분별할 줄 알고 선택할 줄 알 때 우리 모두는 우리 시대의 노아가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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