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관계의 힘!(마가복음 5:25~34)

갈렙처럼 2025. 2. 11. 11:52
반응형

관계의 힘!

마가복음 5장 25~34절

 

서론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면서 사회적 동물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사람은 밥으로만 살 수 없고 좋은 인간관계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근혜 전대통령의 실책은 인간관계입니다. 최태민 최순실 일가와의 관계단절에 실패함으로 국가는 물론 자신의 위상도 타격을 받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습니다. 만나지 말아야 할 악연입니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중요합니다. 사람으로부터 아픈 상처를 받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기쁨도 행복도 사람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람 사는 것이 복잡해지고 인간관계에 지칠 때가 있습니다. 이를 관계권태기, 일명 ‘관태기’라고 합니다.

 

관태기는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한국인은 유난히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남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누가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차를 타며, 어느 학교를 나왔나⋯. 그러다보니 내 신상이 남들 입방아에 오르고 인간관계의 뒷담화에 지치고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편하게 살려고 그동안의 인연, 인간관계를 정리하기도 합니다.

 

이데일리신문사가 취업포털 커리어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인간관계 정리를 고려했던 사람이 성인남녀 10명 중 7명 이상으로 나타났습니다. 핸드폰이 생기면서 휴일도 없이 전화벨이 울리며 각종 메신저를 확인하느라 피곤합니다. 전화번호는 많지만 정작 진정한 관계는 별로 없는 인맥사회에 관계피로감, 관태기를 느낍니다. 그러다보니 복잡해진 관계를 끊고 싶은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에게 버림받았거나 우정에 배신당하면 관계 트라우마가 생깁니다. 결혼도 힘들고 친구들을 제대로 사귀지 못합니다. 버림당하고 배신당할까봐 지레 겁을 먹는 것입니다.

 

관계 부적응자들도 있습니다. 가까운 이들에게 피해를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헌 경험이 있으면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겁을 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잘 지내는데 어느 이상의 관계로 깊어지려 하면 견디지 못해서 밀어냅니다. 관계 장애자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관계귀차니즘에 빠집니다. 누구와 친밀히 지내는게 뭔가 불편한 것입니다. 남이 옆에 있으면 귀찮고 머리가 아파요! 혼자 있는 게 행복해요! 그래서 남들과는 거리를 둡니다.

 

본문에 모든 관계단절로 고통당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관계 트라우마도, 관계부적응자도, 관계 귀차니즘도 아닙니다. 몹쓸 병 혈루증에 걸려 강제적으로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12년을 관계가 단절되어 힘들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아주 안 좋아요!

혈루증은 여성의 생식기계통에 이상이 있어 불규칙적으로 피가 흐르는 만성하혈증(下血症)입니다. 혈루병과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에게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생혈(生血)입니다. 하혈은 죽은 피, 사혈(死血)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죄인취급을 당하고 성전출입을 금했습니다(레위기 15:25).

 

하나님은 언제 필요하고 종교는 왜 내게 필요합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견디는 힘을 얻기 위해 종교를 찾고 하나님을 찾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병든 사람을 율법으로 부정하다, 정죄하고 내쳐버립니다. 얼마나 야속합니까?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의사와의 관계:환자들에게 의사는 가장 친밀하고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의사가 아니면 누구에게 기대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의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26절,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여인은 12년을 앓았습니다.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임을 암시합니다. 그동안에 의사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재물도 다 허비했다고 합니다. 고대시대 의사는 환영받는 직업은 아닙니다. 유다는 <미쉬나>에서, “의사들 가운데 최고의 사람들은 게한나에 있다. 왜냐하면 아주 특별한 사람인척 하면서 계속해서 돈을 잡아먹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당시 의사들은 알 수 없는 이유들을 붙여서 돈을 갈취했기에 강도의 직업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 의사들은 대부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는 민간치료사입니다. 손으로 직접 만지면서 치료하던지 약초를 발랐습니다. 그러니 낫겠어요? 의사, 의원마다 치료법이 저마다 다릅니다. 그때마다 여인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망가진 것입니다. 치료사와의 관계가 좋을 리 없지요!

 

-사람들과의 관계:가족까지 망라합니다.

유대율법은 부정한 자와 직접 접촉은 물론 부정한 자가 만졌던 물건, 장소에 접촉하면 같이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전출입과 사회활동에 제약을 당합니다. 그러니 가족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인간관계가 망가집니다. 사람들이 피하던지 돌을 던지며 멀리 가라 합니다. 서로 접촉만 아니라 몇 미터 안에만 있어도 부정하고, 바람결에 피 냄새만 맡아도 스스로 부정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면 정결의 절차가 복잡해집니다. 제물을 준비하고 예루살렘성전까지 가야 합니다. 시간 낭비, 돈 낭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정한 자들을 보면 피하거나 돌을 던져 자기 반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쫓아냅니다. 자신을 지켜내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인이 이렇게 하나님, 의사, 남편자녀들을 포함한 이웃관계! 모두가 힘을 얻어야 할 관계가 파탄이 났습니다. 그러니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12년 지옥생활을 살았습니다.

당연히 대인기피증이 생기겠지요. 그녀의 인간관계는 부정적이고 그만큼 불행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어떤가요?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행복의 90%는 인간관계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불행의 90%도 인간관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나요? 행복한 관계는 생산적인 관계입니다. 그 사람이 있어 행복하고 그와의 관계를 통해 내 삶이 인격이 믿음이 성장합니다. 내가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 그의 성장과 성숙과 기쁨을 도와줍니다. 서로 윈윈하는 좋은 인연입니다. 교회가 이런 생산적인 네트워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도 부정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같은 교인이면서도 트러블 관계가 됩니다.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편들다 껄끄런 관계가 됩니다. 왜들 남의 일에 끼어드는지 모르겠어요? ‘너 나 잘 하세요~’ 좋은 관계들을 가져야 합니다. 관계 트라우마, 관계부적응아, 관계 귀차니즘⋯. 모두 내 삶의 풍성함을 훼방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좋은 관계들을 갖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상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노년이 되면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게 됩니다. 관계가 좋아서 행복합니다.

 

12년, 사방팔방 관계가 단절되었던 여인이 27절,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능력자라는 소문입니다. 다른 의사와는 다릅니다. 치료의 괴로움을 주지도 않고 돈도 받지 않습니다.

여인은 그 소문에 힘을 얻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에게 치료의 능력만 있을 뿐, 사랑과 긍휼이 없다면 여인은 감히 찾아 나설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여인은 자기 신분, 병을 숨겼습니다. 정체가 드러나면 예수님께 접근도 못하고 제자들에게 제지당하고 사람들이 돌 던지며 꺼지라고 위협했겠지요!

 

그럼에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입니다. 죄인들, 부정한 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과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접촉에도 하등의 분노와 거절이 없다는 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가 여인으로 망가진 관계개선을 위해 용기를 내게 합니다.

 

27절, 옷을 대니⋯.

유대의 경건한 남자들은 옷단에 율법의 항목을 상징하는 613가닥의 실꾸러미들을 달고 다닙니다. 옷단의 술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나타내고 당사자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이런 권위는 남들이 함부로 만져서도 훔쳐서도 안 됩니다. 누가 이런 종교적 규범을 어기고 옷단 술에 함부로 접촉했다면 옷단술 주인의 권위를 손상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여인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험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 문헌에는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의 옷단에 손을 대면 온전해진다”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여인은 히브리인들의 믿음에 근거하여 옷단 술을 만지는 모험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자 29절, 거짓말처럼 혈루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여인은 병이 나은 줄을 깨달았습니다. 여인은 감격에 감사표시나 통곡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러면 신분을 드러내게 되고 돌을 맞습니다. 적당히 예수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떠나가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30절,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말은 “누가 내 능력을 훔쳐 가느냐?” “내 능력을 빼앗고 있느냐?” “누가 내 능력을 빨라 먹고 있느냐?” “누가 나를 자신에게로 밧줄로 꽁꽁 묶어서 가지 못하게 하느냐? 놓아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적인 익명의 장소에서 나와 공적인 고백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상생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신분과 형편을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믿음이 시작되고 새로운 인연이 맺어집니다. 만약 예수님의 능력만 받고 돌아갔다면 병은 고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그녀에게 진정한 샬롬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은 고침을 받지만 행복한 관계로 이후의 삶을 보장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익명의 자리에서 자기 이름을 걸고 자신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지난날의 망가진 관계를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요? 너 때문에 나도 부정해졌다! 어찌 감히 부정한 몸으로 나를 만졌냐! 내 능력을 훔쳤냐!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34절, 딸아⋯. 여인을 처벌할 이유들이 있었지만 딸이라고 부릅니다. 딸은 가족관계입니다. 1촌입니다. 가족관계는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고 보살피고 품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가 뭐래도 너를 딸로 품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뭐라고 해도 내 가족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처벌받지 않습니다. 흉측한 죄를 범해 세상은 처벌해도 가족은 처벌하지 않고 따뜻하게 품습니다. 그러면서 감동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34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 놓여 건강할지어다”

평안히 기라⋯. 12년의 어두움을 지나 이제는 “평화를 향하여 가라” 수치와 슬픔을 버리고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

 

예수께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이 평안이야말로 히브리인들이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던 샬롬~ 평안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새 길, 샬롬의 길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과 샬롬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녀에게 정죄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녀의 아버지요 그녀는 딸입니다. 사랑스런 부녀지간의 1촌입니다. 샬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들과도 샬롬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경시하고 내쫓은 것은 율법에 있는 자신들을 지켜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모두가 이해가 됩니다. 이해지수가 높으니 샬롬입니다.

 

자신과도 샬롬입니다. 누가 뭐라도 이제는 하나님의 딸입니다. 죄인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딸이라는 신분의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신분지수가 달라지니 샬롬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멋진 행진입니다. 그것은 신랑신부의 웨딩마치보다 더 아름다운 평화로의 행진입니다!

 

유대역사가 요셉프스-유세비우스(Eusebius)는 이 여인이 파네아스 출신 이방인 베로니카라 기록합니다. 이 기록이 호리라도 사실이라면 여인은 평안을 향해 가라! 는 예수님 말씀에 평화를 찾았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걸으실 때 그녀도 울면서 함께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자 여인은 자신이 쓰고 있던 수건을 내주었고 예수님께서 얼굴을 닦자, 그 천에 예수님의 얼굴이 남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 손수건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수건을 만지면 병이 고침 받았습니다. 전설이요 신빙성은 없지만 그래도 본문에 비추어보면 사실로 믿고 싶은 전설입니다. 베로니카는 초대교회 성도들과의 바른 관계로 참 행복하게 보람 있게 살다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의 힘입니다.

결론

티베트망명정부의 지도자 달라이라마는 “나 혼자 따로 행복해질 수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도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니 좋은 관계법을 배워야 합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멘토입니다. 예수님은 바른 관계 설정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죄로 인해 관계가 틀어져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을 화목시켜 바른 관계를 만들어주려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죄인은 자기 위치에서 이탈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동족들과의 관계가 잘못된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죄인의 대명사 세리는 정신적으로 관계가 잘못된 자들이고 창기들은 육체적으로 바른 관계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들이 되어 함께 먹고 놀고 마시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아브라함의 아들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버림받았던 외로움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그것은 잠시지만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렇게 단절의 아픔을 겪어보았기에 관계를 통한 우리의 상처도 아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누구와도 좋은 관계가 됩니다. 좋은 관계가 좋은 성도를 만듭니다. 사람사이에 관계가 좋은 표식은 웃음입니다. 웃음의 횟수가 많을수록 행복한 관계이고 웃음의 횟수가 적을수록 불편한 관계입니다. 웃음이 오면 사람도 오고 웃음이 떠나면 사람도 떠납니다. 그러기에 지치고 힘들어도 교회 안에서는 늘 웃는 얼굴로 서로 힘이 되는 믿음들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 관태기가 아니라 힘을 얻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관계가 서로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소비적 관계 악연이 아니라 서로에게 힘을 더해주는 그리스도의 인연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