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70년을 섬겼으나 돌아온 건(역대상 13:9~14)

갈렙처럼 2025. 2. 1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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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을 섬겼으나 돌아온 건

역대상 13장 9~14절

 

서론

금년 우리는 “복을 받고 복을 유통시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걸었습니다. 여기 복을 엄청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받아도 어느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한마디로 왕창 받았습니다.

 

14절, 오벧에돔입니다.

오벧에돔은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집’에 내린 복은 사람에게 내린 복이요 ‘소유’에 내린 복은 물질과 자녀들의 직업 복입니다. 몇 년 잘해서 복을 받았나요? 딱 석 달! 석 달 잘 믿어 떼 복을 받았습니다. 다음주일에 합니다.

 

오벧에돔이 석 달 법궤를 모셔 굉장한 복을 받았는데 70년 법궤를 모시고도 복은커녕 재앙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웃사집안입니다. 웃사가 집안대대로 70년을 섬겨왔지만 법궤를 잘못 만져 10절,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현장에서 즉사합니다. 어이없고도 억울한 일입니다. 누구는 석 달 섬겨 복을 받고 누구는 70년 섬기고도 벌 받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오늘 내 교회생활이 화를 자초하는 생활인가, 복 받을 복걸이 만드는 신앙인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웃사 같이 교회생활 하지 말고 오벧에돔처럼 교회생활을 해서 나도 복~ 자손만대 복~ 이웃들에게 복을 유통시키는 복된 성도님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福)이 되고 무엇이 화(禍)가 되는가요? 오벧에돔에게 복이 되게 하고 웃사에게 화(禍)가 되게 한 것은 법궤를 어떻게 대했느냐, 섬겼느냐? 입니다. 법궤를 제대로 섬기면 법궤를 통해 복을 누리고 법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때 재앙이 왔습니다.

 

9,10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웃사는 궤를 잘못 섬겨 화(禍)를 자초하고 죽습니다. 오벧에돔은 어찌합니까?

 

14절,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오벧에돔은 법궤를 딱 석 달 잘 섬겨서 대단한 복을 받습니다. 법궤가 복의 기준입니다.

1. 법궤(교회)로 오는 축복

법궤(法櫃, the ark). 구약시대 성막-장막에 안치된 거룩한 궤짝, 상자로 십계명을 새긴 2장의 석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십계명 돌비가 들어 있어 율법의 궤, 증거궤(출 25:22), 언약궤(렘3:1), 이스라엘 신의 궤(삼상 5:7)라고 합니다.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상자, 길이 약 1.3m, 너비와 깊이 약 79cm, 상자 위쪽에는 금판 뚜껑이 있으며, 하나님은 여기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출 30:6).

 

법궤는 하나님의 심벌입니다. 광야에서는 법궤가 있는 성막을 중심으로 12지파가 열십자 대형으로 진을 이룹니다. 행진 때는 법궤를 앞세웁니다. 목적지를 정해놓고 법궤를 앞세우고 가는 것이 아니라 법궤가 이스라엘을 인도합니다.

 

유대인이 성경다음으로 소중한 책이 있는데 탈무드와 미드라쉬입니다. 탈무드(미쉬나)는 유대정신을 집대성한 방대한 책이고 미드라쉬는 성경 주석책, 모세오경을 집중적으로 해설합니다.

 

법궤에 대해 <미드라쉬>는 법궤가 자체적으로 움직이고 능력을 발휘했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법궤를 메고 가는 사람들은 핸들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자동차를 운행하듯이 그렇게 법궤에 자신들이 나아갈 길을 맡깁니다.

물론 <미드라쉬>를 성경에 비견할 수는 없지만, 법궤 스스로 이동했고 법궤가 능력을 발휘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밀리자 그들은 법궤를 전쟁터로 앞세워 갔습니다. 법궤의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치기 위함입니다.

 

당시 전투에서 법궤는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했고 아들이 죽었다는 비보와 법궤를 빼앗겼다는 전갈에 아버지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지며 즉사했고 며느리는 남편 비느하스 형제와 시아버지 죽음과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에 아기를 낳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이름을 이가봇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는 뜻입니다. 법궤가 떠났다! 법궤와 하나님의 영광을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후 법궤는 7개월여를 블레셋 진영에 있었습니다. 법궤가 재앙을 일으킵니다. 신당에 놓으면 우상의 목이 부러져 곤두박질하고 성읍사람들에게 종기가 생겨 괴롭히고⋯ 블레셋은 5대 도시국가-가사 가드 아스돗 에그론 아스글론⋯ 가는 곳마다 재앙이 일어나니 너도나도 법궤 보관을 기피합니다. 결국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려 그들 제사장에게 방법을 묻습니다. 그랬더니,

 

삼상 6:4,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들라 합니다. ‘금독종’은 법궤로 인해 블레셋에게 임한 '종처'(腫處) 또는 '종양'(腫瘍)을 금으로 모양을 만든 것이고, ‘금쥐’ 모양도 금으로 우상을 만들어 함께 이스라엘로 보낸 것입니다.

2. 이후 무슨 능력이 나타나는가?

삼상 6:9, 법궤를 들여다 보다 70명이 죽었습니다. 필사자 실수로 괄호에는 오만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한 푸대접에 얼마나 화가 났으면 블레셋도 죽이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렇게 엄격하게 처단했겠어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더럭 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2절,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법궤를 양도해 버립니다. 약삭빠른 처사입니다.

 

당시 기럇여아림 성읍의 지도자는 아비나답입니다. 아바나답은 아들 엘르아살을 제사장으로 삼가 법궤를 보관합니다. (대제사장이 된 엘르아살과는 동명이인 출6:23). 이들이 수십 년을 잘 섬겼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아비나답의 손자 웃사와 아히오가 법궤를 관리합니다.

 

이렇게 하기를 70년의 세월⋯ 그동안 사무엘-사울-다윗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흘러갑니다. 사무엘과 사울은 법궤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그렇다 쳐도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선지학교를 세운 사무엘이 왜 그리 법궤에 관심이 없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특별한 사람입니다.

 

역대상 13:1, 다윗이 신하들을 모아 법궤를 모셔오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아비나답의 손자 7절, 웃사와 아이호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일어납니다.

 

9절,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소들이 느닷없이 왜 타작마당에서 뛰었을까요? <미드라쉬>는 타작마당에서 법궤 스스로가 둥둥 하늘로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자 소들이 중심을 잡으려다 비틀거리고, 법궤가 기우뚱합니다. 당연히 웃사가 넘어지지 않게 궤를 붙듭니다.

 

10, 11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몸을 찢으셨다! 조각조각 걸레처럼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70년 모셔 복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찢김을 당했습니다. 비운의 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법궤 운송작업은 중단됩니다. 누구도 무서워 법궤 메겠다는 사람도, 보관하겠다는 사람도, 관리하겠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메르스 확진환자를 멀리하고 두려워하듯이 뒷걸음질을 합니다.

 

이때 용기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가드 사람 오벧에돔입니다. 그는 고핫자손이었기에 법궤를 지킬 수 있는 율법 요구를 갖춘 사람입니다(26:12, 15). 그래서 법궤를 모신다 자원했고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안치됩니다. 이때부터 그 집에 호박이 넝쿨째, 복이 넝쿨째 굴러옵니다.

 

14절, 오벧에돔의 집에서 석 달을 모시는 동안 70년동안 아비나답-엘르아살-웃사가 받아야 할 복을 오벧에돔이 몽땅 받아버립니다. 봉사하는 사람 따로 있고 복 받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 사람이 있고 복을 받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70년을 믿어도 아비나답 집안은 복을 받지 못했지만 오벧에돔은 석 달을 섬겨 엄청 복을 받았습니다.

3. 왜 복을 받지 못했을까?

아비나답 가문이 70년 법궤를 모셨지만 복을 받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석달 섬겨도 복을 받는데 70년을 섬겨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1대가 섬겨도 복을 받는데 3대가 섬겨도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기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 법궤종교의 우상화

하나님의 법궤를 여러 우상 중의 하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미드라쉬>에, 하나님의 법궤만을 섬긴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보내온 금독종과 금쥐를 법궤 옆에 두고 함께 섬겼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1계명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다른 신을 나와 동급으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비나답은 70년을 다른 신들과 동급으로 섬겼습니다. 법궤 안에 십계명 돌판이 있는데 하나님 옆에 다른 신을 두고 같이 섬긴 것입니다. 그러니 70년을 섬기고도 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 법궤종교의 상업화

법궤를 종교장사의 도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를 팔아서 자기 장사를 한 것입니다.

 

삼상 7:1, 산에 사는 아비나답⋯. 높은 산지(山地)로 산당을 세우기에는 딱 좋은 장소에 있습니다. 아비나답과 엘리아살은

법궤를 미신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걸 신당처럼 만들어서 그 앞에서 미신적이고 주술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섬기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팔아먹고 살고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상당히 신령한 것 같은데 사실은 법궤를 모시고 종교장사를 한 것입니다. 자기 밥통 뺏기고 밥줄 떨어지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법궤 운송의 앞에 섰겠어요?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억지 운송을 한 것입니다. 법궤가 이를 안 것이지요! 그래서 법궤가 날아오른 것입니다.

 

㈂ 법궤종교의 세습화

아비나답은 제사장 집안이 아님에도 종교를 세습합니다. 하나님을 모신 법궤의 중요성을 제대로 모르니 3대 세습하면서 형식적이고 나태한 종교직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법궤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이를 백성들과 공유해야 하는데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법궤를 옮겨가면서도 귀찮고 이제는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인간적인 계산법이나 하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법궤만 모시고 있으면 계속해서 가문이 먹고 삽니다. 이걸 대대로 세습을 하면 그야말로 금수저 은수저를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걸 다윗 왕이 내어 놓으라고 하니, 그 어명(御命) 앞에 어길 수가 없어 수레에 실고 가기는 하지만 아까워 죽을 노릇입니다. 돈다발을 빼앗기고 황금알을 낳는 종교기업을 빼앗기니 그 발걸음이 싫은 것입니다.

 

㈃ 법궤종교의 사유화. 법궤는 온 이스라엘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모시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체험하고 신심을 더욱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웃사는 공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법궤를 사유화했습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개인기업으로 만들어 금수저 은수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 법궤종교의 세속화. 웃사는 법궤의 거룩한 법칙을 무시했습니다. 소들이 날뛰고 법궤가 흔들립니다. 평소에 법궤에 관한 이야기들을 알았더라면⋯ 들어왔다면⋯ 법궤 옆에 있다가 우상 신들이 목이 부러져 죽고⋯ 법궤를 들여다보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이런 능력을 알았다면 소들이 뛸 때 판단했어야 합니다. 도대체 소들이 왜 뛰는 것인가? 법궤가 스스로 둥둥 뛰어오르는 것인가?

 

일단은 운송수단에 문제가 있습니다. 법궤는 어깨에 메고 가라 했습니다. 그것도 고핫자손들만이 메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수레에 싣고 갑니다. 비레위인이 끌고 갑니다. 편이주의입니다. 이걸 빨리 알고 고핫자손을 불러 모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웃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결국 웃사의 종교는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입니다. 웃사의 열심이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웃사의 행동은 정당했습니다. 법궤가 넘어지려는 순간에 법궤를 보호하려 붙들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칭찬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칭찬은커녕 오히려 천벌을 받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웃사는 평소에도 법궤의 영광과 존엄성을 몰랐습니다.

 

오늘도 내 식대로 교회생활을 합니다. 성령의 감동보다는 세상적 기준에 근거하여 교회도 이해합니다. 그래서 내 열심을 냅니다.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입니다. 이런 내 생각, 내 방식의 종교생활이 70년을 섬긴 집안의 공로도 도루묵입니다.

 

오늘 웃사가 당하는 이런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경고입니다. 그래서 웃사가 잘못한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나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할 때 제대로 해야 합니다. 내 열심히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를 잘 섬겨서 오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축복은 항상 교회를 잘 섬길 때에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님의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뉴욕집회에 집사님이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아버지 장로님 이야기를 합니다. 부산 어느 교회 건축위원장, 건축 과정에서 사사건건 목사님과 대립하고 교회에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목사님이 욱! 하는 마음에 소리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짓는 것이지 장로님이 짓는 것입니까?”

그러자 건축위원장 장로님이 같이 화를 내면서 맞받아칩니다.

“그래요? 두고 봅시다! 이놈의 교회 얼마나 잘 짓고 얼마나 잘 되는가 봐라!”

 

그러면서 공사장 망치로 교회기둥을 내리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후 교회는 무사히 성전이 완공되고 날로 부흥되었습니다. 교회를 떠난 아버지 장로님 가정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맞장구를 쳤던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일찍 죽었습니다. 모두들 하는 일마다 안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축복이 단절된 집안인 줄 알고는 무서워 미국으로 도망 와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눈으로 보았기에 교회 대적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부탁하더랍니다.

 

“집회 때마다 제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세요! 아버지도 나름대로 교회를 사랑하고 잘 하려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방법이 아니라 당신 방식대로 하셨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비나답 엘르아살 웃사⋯ 3대에 이어지는 70년 동안 법궤를 섬겼지만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벧에돔은 당대 집안이 석 달을 잘 섬겨 복을 받는데 특히 자녀들-자손들의 복을 엄청 받습니다. 교회를 통한 축복입니다.

 

집안대대 70년을 믿었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에 주릴 것입니까? 석 달을 잘 섬겨 하나님의 복을 제대로 누리며 아래세대로 대대로 복을 유통시키며 살 것입니까? 다음시간에 오벧에돔이 석 달을 섬겨서 자자손손이 복을 받은 일을 기대해 주십시오! 우리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설교는 3회 시리즈 설교입니다.]

1회 70년을 섬겼으나 돌아온 건(웃사)

2회 석 달 섬겨 대대로 먹을 축복을(오벧에돔)

3회 평생을 섬겼더니 영원한 축복이(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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