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섬겨 자손만대 복을 받다
사무엘하 6장 12~15절
서론
왜 교회에 다니세요? 예수님을 믿어 영생 얻고 좋은 복 받고 누리자, 는 것인데 복을 받는 사람이 있고 화(禍)를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웃사는 3대가 70년 법궤를 섬겼지만 3대로 복이 끝났습니다. 법궤를 독점해서 밥벌이는 했지만 3대를 넘지 못하고 돌아온 건 재앙입니다.\
70년 교회생활이 왜 형벌로 마감되었을까요? 법궤종교의 우상화, 사유화, 상업화, 세습화, 세속화⋯ 결국 웃사의 종교는 편의주의, 인본주의였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종교기업을 빼앗기니 싫은 거예요.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웃사를 치신 것입니다. 웃사는 하나님 장사가 아니라 자기 장사를 위한 자기 열심입니다. 그러니 웃사는 벌을 심고 벌을 받은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석 달을 모신 것만으로도 크게 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복을 받으니 자녀들이 줄줄이 출산에서나 직분에서나 실력에서 쟁쟁한 가문이 되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오벧에돔은 거룩한 규칙에 따라 법궤를 섬겼습니다. 남이 기피하는 힘든 일을 했습니다. 썬다씽은 “십자가 속에는 복이 숨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모신 방에 불을 켜놓고 24시간 꺼지지 않게 정성껏 관리했답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우상화, 상업화, 세습화. 세속화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독점해서 먹고 살 생각을 하지 않고 다윗 왕이 모셔와라~ 할 때까지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석 달을 섬기고도 천하가 아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오래 했다고, 직분을 가졌다고 무조건 복이 넝쿨째 오는 것은 아닙니다. 복 받을 일을 해야 내 인생에 복걸이가 세워지고 그 복걸이에 하나님께서 복을 걸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윗입니다. 법궤에 대한 열심을 말한다면 다윗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 최고의 혜택을 본 사람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복으로 살아온 사람이기에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 컸습니다. 다윗이 서원하기를 시편 132편!
3절,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4절,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5절,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다윗의 서원이 뭡니까? 성막 발견까지에는 침상에 오르지 않겠다는 열심입니다. 왕이 되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울 정권에서 오랜 세월 핍박 받다가 사울이 죽으면서 왕이 됩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다윗의 편은 많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사울정권 하에서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은 다윗을 경계합니다. 기득권을 빼앗길까봐 경계한 것입니다.
그러면 새 왕은 자기 정권을 안정시키는 일에 열심내야 합니다. 경쟁자를 탈락시키고 사울파를 제거해야 합니다. 민심을 얻도록 선심정책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막을 찾아내고 다윗 성에 모셔오는 것을 국정과제 1순위로 삼습니다. 사울 왕도 사무엘도 법궤를 찾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법궤가 미치는 재앙능력에 대해 겁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도자들이 법궤를 찾아오는 일을 1순위로 삼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다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부터 법궤를 사모했습니다. 내가 왕이 되면 법궤부터 제 자리에 모셔야겠다⋯ 그렇게 약속하며 살았는데 왕이 되자 법궤부터 챙깁니다.
6절,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7절,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그래서 여호와께 이렇게 말합니다.
8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 가소서”
법궤가 있어야 할 곳은 에브라다, 웃사가 대대로 독점했던 고산지 기럇여아림이 아닙니다. 산언덕에 몇 사람들이 독점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보기위해 이 높은 곳까지 낑낑거리며 올라오기에는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에게는 힘듭니다. 그래서 다윗은 성읍에 옮겨놓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힘을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선한 마음입니까?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3만 명을 동원하고 법궤를 옮겨오다 웃사가 죽는 사단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노하셨을까요? 당연히 거룩한 법칙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법궤는 운반면허증이 있는 그핫자손들만이, 그것도 어깨로 매어 운반해야 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했나요?
3절, 하나님의 궤를 새수레에 싣고⋯.
다윗은 법궤의 거룩성을 인식하고 ‘새’수레에 실었을 거예요. 그러나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입니다. 율법은 레위인 고핫자손들이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민7:9) 블레셋족속은 수레를 이용하여 법궤를 보내왔습니다. 다윗이 왜 이방인 방법으로 옮기려 했을까요?
-어깨에 메고 먼 길을 운반할 고핫 자손의 고생을 생각하고 법궤를 운반했을 것입니다. 어깨에 메고 가면 얼마나 힘들어요? 예루살렘까지 13km입니다. 편의주의, 신권보다 인권을 우선시하는 인본주의입니다. 한국교회에 편의주의가 엄청 들어와 있습니다. 성경이나 찬송이 없이도 예배드릴 최첨단으로 예배합니다. 교회가 스스로 성경을 경시하면, 이것이 편의주의입니다.
-바른 봉사보다 빠른 봉사를 합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궤를 빨리 옮기기 위해 3만 명 군대와 수레를 동원합니다. 블레셋 기습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빨리 이동하기 위해 수레를 이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열심’을 보지 않고 다윗의 ‘반칙’을 보신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하고 믿음이 있어도 업사이드에서 성공한 공은 무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섬김의 손을 내치시고 음악을 그치게 하신 것입니다.
신권보다 인권을 강조하는 인본주의, 편리하게 자꾸 신앙생활을 만들어 가는 편의주의, 열심이라면 모든 것이 정당하다는 목적중심의 한국교회에 다윗이 받은 페널티(penalty)는 따끔한 책망이 됩니다. 열심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 법칙에서 지나치면 열심도 반칙입니다.
한국교회는 열심 없는 사람들 때문에 분쟁의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법을 어긴 열성신자들로 진통 중입니다. 오벧에돔은 법에 충실하게 묵묵하게 법궤를 섬겨 3대(代)가 복을 받았습니다. 빠른 성공보다 바른 성공을 해야 합니다. 빠른 통일보다 바른 통일을 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빠른 교회부흥보다는 바르게 교회가 부흥해야 참 교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예민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자존심 내세우거나 법궤 운반책임자에게 책임을 물었겠지요. 자신이 수레운반을 허락했어도 자기책임은 숨기고 신하들을 책벌했겠지요.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고집을 펴지 않았습니다.
9절,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계속해서 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잘 하는 일도 있지만 내 열심 내 고집으로 일을 그를 칠 때가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억지 부릴 것이 아니라, 이래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계속 갈 수 있겠는가⋯ 가던 길을 수정하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교체해서 신앙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다윗이 그걸 잘 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길을 가다가도 하나님께 이거 아니다, 하시면 금방 자기 생각을 거두어 버립니다. 사울은 달라요! 사울은 끝까지 고집대로 다윗을 미워하다 세 아들과 같은 날 전사합니다. 다윗은 자기주장대로 가다가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면 얼른 길을 돌립니다.
지금도 그래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처사를 기뻐하지 않으심을 알았습니다. 베레스 웃사의 죽음을 통해 다윗의 죄를 물으신 것입니다. 훌륭한 덕장(德將)들은 늘 이래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남에게 허물을 돌리고, 남 탓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덕(德)이 없어 그렇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래서 덕장이 되고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법궤 운반프로젝트를 일단 멈추고 오벧에돔 집으로 모시게 합니다. 궁금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 오벧에돔에게 재앙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 착한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지?’
궁금하고 염려도 됩니다. 자기의 반칙으로 엉뚱한 오벧에돔이 재앙을 당할까, 염려가 된 것입니다.
12절, 소식이 왔습니다.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궤로 크게 복 받았답니다. 할렐루야~ 다윗의 반칙에 분노하신 하나님이지만 다윗의 열심조차 묻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애물단지가 아니라 보물단지가 됨을 오벧에돔은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다윗은 생각합니다.
‘법궤가 재앙의 애물단지가 아니라 내가 잘못 섬겼을 뿐이다! 이제라도 바르게 섬기면 법궤로 크게 복을 받을 것이다! 오벧에돔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복을 받아야겠다! 다시 모셔오자’
이렇게 결심하고 이번에는 철저하게 거룩한 율법의 법칙을 따라 운반합니다. 12절,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13절, 여섯 걸음을 걸어보았더니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이에 힘을 얻어 짐승을 잡아 감사제사 드린 후에 당당하게 13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15절, 여호와의 궤를 메고, 힘들어도 법궤를 어깨에 메고 다윗 성으로 들어와 안치합니다.
다윗의 법궤 열정이 여기서 마감한 것이 아닙니다. 법궤를 더 좋은 곳으로 모시려고 7:2, 성전건축의 꿈을 꿉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뜻을 전합니다.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지어주겠다니 받은 걸로 할께! 대신에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어주마!’
11절,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6절,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오벧에돔은 석 달을 섬겨 본인과 자식들이 성전문지기 고위직으로 3대가 축복받았더니 다윗은 법궤를 잘 섬기고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건축의 꿈을 가져 16절 영원히⋯ 영원히⋯ 영원한 축복을 허락 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너무 황공해서 이렇게 받습니다.
18절, “제가 무엇이기에 이런 축복을⋯”
28절,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29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잘 섬겨 크게 축복을 받은 분들의 간증스토리는 너무도 많습니다. 새에덴교회 서광수 장로님의 <생명나무장로>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전주 예수대학교 총장입니다. 젊은 시절에 질병을 치유 받고 믿음을 시작했지만 서울법대를 나온 딸을 잃은 상처가 있습니다. 슬럼프에 빠져있던 장로님은 새에덴교회 소목사님을 만나 상처를 치유받고 브리스아선교회를 조직합니다. 목사님의 대외활동 선교를 재정적으로 돕는 선교회입니다.
새에덴교회가 대형예배당을 건축할 때 설왕설래가 있었습니다. 그때 장로님이 앞장섭니다. 오랜 공무원생활에서 자녀들을 위해 마련해 둔 아파트가 있었는데 자녀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큰딸이 죽고 남매가 남았습니다. 남매가, 성전건축에 바치는데 우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찬성! 아내권사는 대찬성합니다. 아파트를 팔아 헌금하는 일로 본을 보이고 교인들을 일일이 설득했습니다. 목사가 주장하는 것보다 장로님이 앞장서니 훨씬 교회건축이 힘을 냈습니다. 그래서 새에덴교회가 저렇게 교회가 건축되고 크게 부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장로님이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9급공무원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승진, 광주시 부교육감, 지금은 전주 예수대학교 총장 연임 중입니다. 장로님은, 자신의 축복은 예배당을 통해 온 오벧에돔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예배당을 통한 축복의 산증인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이런 간증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분쟁 일으키고 싸우고 교회를 비판합니다. 장로님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선악과가 무성한 한국교회’라고 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어 아담이 하와를 비난하고 하와가 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선악과의 악순환이 한국교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잘 섬기고 주의 종을 잘 섬기는 생명과 교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합니다. 생명과를 따 먹으면서 축복의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이 바로 오늘의 오벧에돔 성도입니다.
결론
예배당을 통한 축복이라면 저 역시 전설적인(?) 간증이 있습니다. 우리 늘빛교회가 부흥된 것을 발견하고 나는 실력도 없고 모든 것이 모자란데 어떻게 개척교회에서 이런 부흥을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기가 좋았고 지역이 좋았고⋯ 좋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입어 부흥한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나?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제주도에 엄청난 태풍이 몰려왔습니다. 우리 집도 날려 가는데 초가집 예배당이 걱정되었습니다. 교역자도 없었어요! 제가 지붕에 올라가서 그걸 지켜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감동을 먹고 이렇게 말씀하신 거지요!
“네가 내 예배당 지켰으니 나도 네 예배당을 지켜주마!”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지켜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집을 지켜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부흥시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집을 부흥시켜 주십니다. 절대 하나님의 집을 허는 일을 하지 마세요! 선악과 교인 노릇하지 마세요! 그러면 웃사가 따로 있습니까?
오벧에돔처럼 석달을 잘 섬겨서 3대의 복을 누리고⋯ 다윗처럼 평생을 잘 섬겨서 자손만대가 복을 받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설교는 3회 시리즈 설교입니다.]
1회 70년을 섬겼으나 돌아온 건(웃사)
2회 석 달 섬겨 대대로 먹을 축복을(오벧에돔)
3회 평생을 섬겼더니 영원한 축복이(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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