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떼어내기와 바라보기
창세기 13:14~18
서론
동사무소(주민센터)에 조금은 어리바리한 공익요원이 있었어요! 민원인이 사망신고를 접수하는데 이렇게 물은 거예요.
“본인이신가요?”
사망신고를 하러 온 민원인은 더 어리바리했습니다. 이렇게 되묻습니다.
“꼭 본인이 와야 하나요?”(송길원 목사 유머)
골 때리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골 때린다, 하면 문제가 많다는 뜻입니다.
골 때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뒤통수치는 일입니다. 신체나 정신적으로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는 경우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이나 실망스런 일을 당할 때 뒤통수 맞았다!
본문에 아브라함도 뒤통수 맞습니다.
누구에게서 뒤통수 맞습니까? 조카 롯입니다. 롯은 아버지를 잃고 아브라함이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가정도 이루고 살만큼 되는데 두 집안 목자들이 목초지를 두고 싸웁니다. 이러다가는 삼촌과 조카 사이가 원수 되겠다, 생각한 아브라함은 분가 내지는 분립을 결심합니다. 그래서 조카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됨됨이가 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삼촌이 먼저 택하세요! 제가 오늘까지 밥이라도 먹고 가족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삼촌 덕분입니다. 그러니 먼저 택하시고 남은 곳에서 삼촌과 독립해서 새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래야 정상 아닙니까? 그러나 롯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또라이 질량보존의 법칙’이란 게 있습니다.
법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또라이를 피해 조직을 옮기면 그곳에도 다른 또라이가 있다.
둘째, ‘상또라이’가 없으면 이보다 덜한 ‘덜또라이’ 여럿이 있다.
셋째, 팀 내 또라이가 다른 데로 가면 새로운 또라이가 들어온다.
넷째, 또라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또라이가 될 필요도 있다.
다섯째, 팀 내에 또라이가 없다면 나 자신이 또라이다.
롯이 바로 그 또라이입니다.
또라이는, ‘생각이 모자라고 행동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또라이는 오히려 골 때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롯이 아브라함의 골을 때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에는 롯이 멀리 떠나리라 생각했을 거예요. 아버지 같은 삼촌을 제치고 좋은 곳을 홀딱 차지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니까 롯이 또라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뒤통수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섭섭하고 낙심했던 것 같아요.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롯을 아들 삼아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훌쩍 떠나니까 적막하고 외로운 것입니다. 강아지도 떠나면 허전한데, 그 마음이 오죽하겠어요.
14절,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마음의 쓸쓸함을 나타내는 문장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14절, “…너는 눈을 들어…”
아브라함이 어느 장소, 목적지를 눈알이 떨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입니다. 그 땅은,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요단 평지는 모압 산맥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풍부한 수원 덕분에 물이 좋았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에덴에는 강의 수원지가 네 개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와 곡식과 풀들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그 자체가 꽃동산 화원(花園)을 이루었습니다.
“애굽 땅과 같았더라” 애굽은 나일 강만 아니라 일찍부터 관개 수로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비옥한 땅이 많았습니다. 특히 나일 삼각주(Delta) 지경은 세계적인 옥토로 이름나 있습니다.
롯이 선택한 소돔은 누구나 탐이 나는 그렇게 비옥하고 좋은 땅입니다. 그래서 롯은 인간의 도리나 인륜을 저버리고 그 땅을 택한 것입니다. 그의 선택은 삼촌과 조카 사이를 끝낼 수도 있다, 사람의 도리를 포기할 수도 있다, 는 것을 보여줍니다. 돈과 재물과 성공과 출세에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또라이고 아브라함은 뒤통수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관점으로 이런 상황을 봅니다.
14절, “…너는 눈을 들어…”
이제는 롯에 대한 애정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옥토를 놓쳤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도 정을 떼고 옥토에서도 눈에 들라는 것입니다. 눈을 들면 어찌합니까? 하나님께서는 항상 해답을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14~17절, 같이 읽읍시다!
15절, 보이는 땅을…, 이 말은 땅의 광활함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부족이 아니라 국가 비전을 말합니다. 국가가 성립되려면 주권, 영토, 국민이라는 3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3대 요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5절 보이는 ‘땅’, 영토입니다.
‘너와 네 자손에게’, 국민입니다.
17절, ‘네게 주리라’ 주권입니다.
주권 영토 국민 모두 주겠다! 국가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주권 영토 국민을 얻었나요? 땅은 불타버렸고 국민이라고는 두 딸입니다. 그에게 주권은 사라지고 술에 취해 두 딸의 계략에 놀아나서 불량 자손을 만들어 낸 것 밖에 없습니다. 롯의 국가는 파탄국가인 것입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제사장국가의 시조를 만들려고 롯을 떼어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롯은 어떤 사람입니까?
12장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지만… 롯은 누구를 따라갔어요? 아브람, 삼촌을 따라간 거예요! 어떤 삼촌? 큰 비전을 갖고 있는 삼촌, 개척자 삼촌… 뭔가 큰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을 따라간 거예요! 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약속도 비전도 없어요! 그냥 성공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이나 헌신 같은 것은 처음부터 관심도 없는 세속인 같아요!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 주변에 있으면 되겠어요?
12장 10절,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애굽으로 가면 안 됩니다. 그곳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가나안이고 예루살렘 중심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기근을 당하여 가지 말아야 하는 애굽으로 갑니다. 갔다가 아내를 빼앗길 위기와 이방 왕에게서 망신살이 당합니다.
누구 때문에 이런 망신을 당한 것입니까? 롯 때문이라고 봐요. 롯은 개인적으로 약속을 받지 못했기에 가나안이건 애굽이건 어느 땅에서 거류하는가, 문제가 안 됩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성공하고 출세하면 하나님은 2차적이요 신앙은 액세서리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이 옆에 계속 있으면 아브람은 성장하는 중이었기에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세속주의자 롯을 계속 옆에 끼고 있으면 아브라함이 너무 더디게 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금덩이가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롯이라는 찌꺼기가 조카라고 달라붙어서 금덩이의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롯을 떼어낸 것입니다. 롯은 돈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기에 그냥은 안 떠납니다. 돈을 줘야 떠나고 성공을 주어야 떠납니다. 그것도 시시한 돈, 땅, 시시한 성공보증서 갖고는 떠나지 않습니다. 진돗개처럼 삼촌의 성공을 붙들고 악착같이 남아 있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큰 것을 주었습니다. 에덴동산 같은 땅! 나일강으로 항상 부족한 애굽과 같은 땅 소돔과 고모라… “옛다 이거 먹고 떨어져라!” 엄청난 뼈 따기를 던져주니 삼촌을 물었던 것을 얼른 놓고 그걸 물고 떠난 것입니다. 아브람이라는 금에서 롯이라는 찌꺼기를 떼어내려는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아브라함은 인정과 인륜이라는 도리에 빠져 떠난 롯으로 쓸쓸하고 좋은 것을 먼저 선점해 버린 조카의 행동에 섭섭했고 아직도 제대로 약속을 지켜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야속한 그런 마음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13장 14절, 너는 눈을 들어… 그런 상황에서! 그런 관점에서! 그런 마음에서 눈을 들라 하십니다. 다른 관점, 즉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중에 에픽테토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다섯 현제(賢帝) 가운데 한 사람, 15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이기도 한 대학자입니다. 에픽테토스는 원래 노예였습니다. 얼마나 자신의 신세가 가련하고 분합니까? 그러나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합니다. 주인이 화나게 다리를 비틀자 에픽테토스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계속 비틀면 다리가 부러집니다.”
화가 난 주인이 더욱 세게 비틀자 정말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 보십시오. 계속 비틀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노예 신분이면서도 황제의 스승의 자리에 올랐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일어난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시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시각! 하나님을 통해서 환경을 보는 시각! 이게 아브라함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 섭섭하고 분하고 외롭고… 그런 인간적인 관점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슬픔으로 눈이 가리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처럼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는 빛나는 금덩이를 만들려고 사람을 떼어내도록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갈대아 우르의 사람들을 떼어냈습니다.
12장 1절,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일가친척들을 비롯해서 친구들, 이웃들, 동포들을 떠나라! 그들은 아브라함 금덩이에 붙어있는 찌꺼기들입니다. 그들 속에 파묻혀 있고 그들이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는 금덩이는 금덩이로되 순금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떼어낸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금덩이에서 다시 두 사람을 떼어냅니다.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입니다. 이들은 약속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불신앙이 불러들인 찌꺼기들입니다. 늘그막에 나아 사랑스런 아들이었지만 이스마엘이 있는 동안에는 아브라함은 순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큰 부족이라는 뼈다귀를 주고 모녀를 떼어냈습니다. 그게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몰랐기에 아브라함은 쓸쓸했고 하갈 모자는 분노했던 것입니다.
다시 훗날, 그두라의 소생들 여섯 명의 아들들을 떼어냈습니다(25:6). 그때마다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도 순순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떼어냄이 있었기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야 말로 골 때리는 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골은 머리나 뒤통수가 아니라, 영어로 골(goal)입니다. 영어로 골은 축구나 농구, 핸드볼에서 공을 넣으면 득점하게 되는 문이나 바구니 모양의 표적입니다. 또한 경기에서, 문이나 바구니에 공을 넣어 득점하는 일을 말합니다. 골을 때렸다는 것은 목표를 향해 발로 차든 손으로 차든 득점을 노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골 때리기는 머리만 아프게 하지만 하나님의 골 때리기는 항상 목적에 명중합니다. 아브라함을 본토에서 떼어내시고 롯을 떼어내시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떼어놓으시고 그두라와 여섯 아들들을 떼어 놓았습니다. 그때마다 아팠지만, 골 때리시는 하나님으로 섭섭했지만 하나님의 골은 항상 성공했고 이런 득점으로 아브라함은 점점 금으로 순금으로 변해 그의 졸업장에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호가 주어집니다. 빛나는 졸업장은 떼어낼 것들, 그의 인생에서 찌꺼기들을 잘 떼어냈고 하나님께서 떼어내실 때마다 순종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떼어낸 것으로 분노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더 좋은 관점으로 눈을 들 때 금덩이 믿음이 된 것입니다.
결론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한양대 교수는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라는 관계에세이 책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10가지 유형을 소개합니다. 귀 막힌 사람(귀貴하게 대접받으려면 귀耳를 기울여야 한다.) 필요할 때만 구하는 사람, 나뿐인 사람(나뿐인 놈이 나쁜 놈), 365일 과시형, 말문 막는 사람(적게 말하면 적도 그만큼 없어진다.) 과거로 향하는 꼰대(꼰대는 과거로 돌아가려 하고, 리더는 미래로 향한다), 감탄을 잃은 사람, 책(冊)을 읽지 않고 책(責)잡히는 사람, 남의 단점만 지적하느라 남의 장점을 볼 시간이 없는 사람, 대접받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내 주변에 누구 있습니까? 어떤 취미가 있습니까? 어떤 성공관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라…”
그것들을 떼어내야 합니다. 믿음의 길에서 찌꺼기들을 떼어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롯과의 결별로 인한 인간적 고독과 상심을 극복하고, 롯처럼 탐욕의 눈이 아닌(10절) 믿음과 소망의 눈으로 약속의 땅(12:7)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눈을 떼기 훈련! 바라보기 훈련이 제대로 될 때에야 우리에게서도 찌꺼기들이 벗겨지고 떼어지고 믿음의 사람들로 성숙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골을 때리는, 득점력이 높은 신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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