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설교도 맛있다] 믿음을 점검하라!(고린도후서 13:5~7)

갈렙처럼 2025. 2. 10.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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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점검하라!

고린도후서 13장 5~7절

 

서론

미국의 가수이며 라디오 방송인으로 크게 성공한 에디 캔터는 성공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는 전형적인 미국 청년입니다. 하루는 시골에 사는 어머니로부터 짧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에디야, 너무 빨리 달리지마라! 그렇게 하면 좋은 경치를 보지 못하느니라!”

이때부터 에디는 달리다가도 다음과 같은 4개항을 수첩에 적어놓고 발길을 조절합니다.

 

“나는 맹목적인 야심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나는 나의 경력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나의 가정의 행복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나는 물질적인 성공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인생의 참다운 보물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남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달려가다 한번 씩 내가 누구인가,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검이 없이 달리다가는 어느날 문득, 어? 벌써 내 나이가 이런가, 지금까지 무얼 구하며 살았는가? 마치 모래성을 쌓은 것 같은 허전함을 느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체크를 믿음에서 응용합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는 아가야 주도(主都)이며 항구 도시입니다. 그래서 지중해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나라들의 우상들이 총집결한 우상 도시입니다. 한창 번성 때는 2만 명 수용의 야외극장이 있었고, 1천 명 신전 여사제(창녀)들을 거느리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어 온갖 음행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런 도시였기에 고린도교회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교회입니다. 소송 문제, 독신과 결혼 문제,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 성만찬의 의미와 임하는 자세, 성도의 죽음과 부활의 문제와 답변을 써서 보내는데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러나 교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직접 고린도를 방문하였고(2:1) 마게도냐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디도에게서 교회가 바울의 교훈을 받아들였다는 보고를 듣고 쓴 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감사하면서 아직도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경거망동하는 일부 성도들을 강하게 질책하고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합니다. 고린도후서는 일종의 바울의 자서전 서신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은사가 많이 나타났기에 바울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은사중심의 사람들이 종종 걸리게 되는 믿음의 병입니다. 이런 고린도교인들에게 바울은 나를 의심말고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테스트해보라고 합니다.

 

5절,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테스트해보라! 마이크를 테스트해봅니다. 텔레비전을 만들면 하루 종일 브라운관을 두둘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술맛을 과자맛을 테스트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량이 되었는가, 정상적인가,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시험해보라 합니까? 믿음 안에 있는가? 믿음을 테스트해보라? 어떻게 하면 테스트가 되는 것일까요? 성경시험문제를 풀어보라는 것일까요? 믿음의 자세를 테스트해보라! 믿음 안에 있는가… 믿음이 아닙니다. 저들이 믿음은 있습니다. 교리로는 탄탄합니다. 그 믿음대로 살고 있는가,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자세인가? 그걸 테스트해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열렬한가? 보다 얼마나 진실한 믿음인가? 테스트합시다.

고린도교회는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은사가 충만했고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책망을 가장 많이 들었던 교회가 되었습니다. 왜? 열심은 있는데 진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 열심인가? 즉 진실한 믿음인가, 테스트해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의 종교관은 열광적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열심은 세상이 다 알아줍니다. 1주일에 예배가 여러 차례 열리고 새벽기도,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 참 열렬합니다. 독일 교회에는 평생 세 번! 세례 때, 결혼식 때, 장례식 때, 자신의 의지가 아닙니다. 세례는 부모님에게, 결혼식은 신부에게, 장례식은 자식들에 의해서. 한국교회 교인들은 정말 열심합니다.

 

문제는 열심은 있는데 그 열심이 진실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열심’은 부글부글 끓은 엔진에 비유됩니다. 추진력이지요. 엔진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방향을 잘못 잡고 열심을 내면 잘못으로 나아가는 것도 열심을 내는 것처럼 빠릅니다.

 

이제 신앙생활도 테스트해봅시다. 열심이 있나요? 천지창조를 믿는 사람답게, 구세주의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답게 뜨거움이 있나요, 부글거림이 있나요?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 봅시다. 열심에 진실함이 있나요? 진실-진리 앞에 서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의 깨끗한 순도가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보여야 합니다. 그 열심에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하는 분들에게서 결여되는 진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 열심히 아까워서! 열심도 중요하지만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열심도 좋지만 정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정화됩니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인격의 핵심은 성실성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에 성실했는가! 그게 바울이 테스트해보라는 실상이 아니겠습니까?

내 행위가 얼마나 선한가? 보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테스트합시다.

우리 믿음의 토양은 윤리적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면 우선 착한 사람을 연상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잣대로 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옛날 믿음은 술 담배 안 하면 모범 청년이고 큰 믿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선과 악으로 나누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가, 악한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신뢰하는가? 선악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은 상대적입니다. 10촉 전구와 20촉 전구가 서로 밝다 하지만 60촉 전기가 들어오면 꼼짝못합니다. 60촉도 동천에 해가 떠오르면 어떻게 됩니까? 무색해집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심방을 갔는데 자매가 모두 한센 씨 병 환자입니다. 언니는 심하고 동생은 덜합니다. 자매들 입장에서는 누가 심하고 덜한 것 같지만 목사님 입장에서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거기가 거기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義)를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교회조차 선한 사람들만의 경연장이 되고 죄짓고 들어온 사람들이 비참해지는 곳이라면 믿음의 장소가 아닙니다. 유교식의 예배당입니다.

 

미국에 세계적인 성중독증 치료자 마크 레이저 박사. 아버지에게 성희롱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목회상담학 박사가 되었으면서 세 명의 상담자들을 성폭행했습니다. 우리 정서라면 끝장입니다. 그러나 미국교인들은 그를 환자로 보았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패트리 칸스 박사를 만나 치료를 시작했고 지금은 세계적인 성중독 치료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죄가 문제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욱 귀하게 보인 것입니다.

 

다윗은 큰 범죄를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사울은 종교적인 범죄를 했습니다. 누가 용서를 받았습니까? 죄가 작아서?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수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의를 자랑하는 자들은 “저럴 수가 있나?” 하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은 “저럴 수가 있구나!”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보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그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으로 나왔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세리는 얼굴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의지했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의 믿음을 더 칭찬했나요? 이것이 교회로 하여금 단순한 윤리교실, 도덕교실, 상류층 사람들 회합의 차원을 넘어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나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나요? 그걸 테스해 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테스트합시다!

지금은 외모 지향시대이고 대한민국은 성형천국입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남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런 조류가 믿음의 세계에도 들어왔습니다. 신앙이 자꾸 사람들 중심이 되어버리고 신본주의는 인본주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거기에 진정 용기가 있고 도덕적인 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보다 바로를 의식했을 때 잘못된 행동이 나왔고 다윗은 하나님의 의중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기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요셉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했기에 죄의 환경에서도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죄 된 상황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사실 그 죄는 상관인 보디발과 관계됩니다. 보디발은 없습니다. 여주인은 죄에 대해 적극적입니다. 하인이기에 여주인에게 끌려 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떨쳐버리는 도덕적 용기는 어디에서 왔나요? 신전의식! 칼빈주의 핵심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너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사람들의 말에, 표정에 너무 신경을 쓰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됩니다.

 

사울은 초창기에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기를 얻게되자 자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들의 칭찬의 소리를 듣자고 하다가 결국에는 망하게 된 것입니다.

평가라는 것이 그래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세례요한-백성들은 선지자, 헤롯왕은 백성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로

김정은-미국과 맞서는 대단한 지도자다! 핵으로 세상을 공갈하는 철부지다!

 

인간적 평가는 이처럼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런 평가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머리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관심이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이런 자세로 나가게 된다면 사람들 인기에 연연하지도 않고 내가 욕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환경에 끌려다니나, 환경을 끌고 다니나? 테스트합시다!

환경은 시험장소입니다.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믿음이 있는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믿음이 있으면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환경에게 굴복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일까요? 믿음은 신뢰입니다. 누구를 신뢰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예수 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를 의지해도 2천년 전의 예수를 의지하면 구원은 받겠지만 내 삶의 큰 능력은 공급받을 수 없는 것이고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공급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만 먹을 수 없는 그림 속의 떡처럼, 성경 속에나 나오는 성현으로서의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종교일 뿐이고 교훈일 뿐입니다.

 

바울은 5절 하반절,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버리운 자라 했습니다. 버리운 자들은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믿음을 버리고 달아나 버리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나발과의 관계에서는 자신 속에 믿음이 있는가? 시험하지 않았기에 자칫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환경보다는 환경을 주장하는 하나님을 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환경자체만 봅니다. 눈의 차이입니다. 환경을 보는가? 환경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보는가? 이것은 결국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차이가 될 것입니다.

결론

고인이 되신 한국 최고의 지성 이어령씨가 암에 걸려 시한부생명을 살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 87년은 기프트였어요.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젊은이들에게 하고픈 말은 무엇인가요?

“딱 한 가지야.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두 가지의 의미겠지요! 아무 생각 없이 살지 말라는 것이고 쉽게 거짓을 덮지 말라는 것!

 

우리에게 완전한 믿음은 없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경주로 비유합니다. 잡은 줄로 생각하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계속 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믿음을 시험해보고, 확증해보라고 합니다. 오래 다닌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달리는 사람이 있고 공회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고 시험에 들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버림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합니다. 5절, 너희는 버림을 받은자라…6절.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7절,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 지라도…

 

우리가 열심히 일하면서도 버림을 받지 않으려면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얼마나 열렬한가? 보다 얼마나 진실한가?

내 행위가 얼마나 선한가? 보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환경이 어떤가? 보다 환경을 이겨내는가?

 

기자가 이어령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눈뜨지 않게 해주소서.”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늘 시험하면서 승리하시는 늘빛가족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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